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마스터>(미국, 2012)는 지난해 베니스영화제에서 은사자상을 받은 영화입니다. 이때 그랑프리는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가 차지했었지요. 우연의 일치인지 1, 2등을 차지한 두 영화는 닮은꼴을 보였습니다. 둘 다 종교를 소재로 했으며 해결책은 불교에서 찾았다는 것입니다.

<피에타>는 크리스트교를 소재로 하였지만 개인의 구원이 신의 의지가 아니라 인간의 몫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으며, <마스터>도 비슷한 양상을 보였습니다. <마스터>는 톰 크루즈로 인해 유명해진 사이언톨로지라는 종파에서 힌트를 얻어 만든 영화입니다. 창시자인 론 허버트를 소재로 택했던 영화가 도달한 최고점은 뜻밖에도 불교의 현재중심주의였습니다.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이며, 순간에 완전히 머물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자기 삶의 마스터라는 결론은 어느 모로 보나 불교적입니다.

영화 <마스터>의 주인공인 프레디 퀠(호아킨 피닉스)은 정신적으로 온전치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알콜 중독자고, 어머니는 정신병원에 있으니, 태생부터 문제를 안고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전쟁에 참전했다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까지 얻게 됩니다.

프레디 퀠은 성적인 상상력으로 머릿속이 꽉 찬 인물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교관과 상담할 때 교관이 보여주는 모든 사진을 성적으로 해석했습니다. 정상인이 봤을 때는 전혀 성과 관련 없는 사진이 그의 머릿속에서는 다르게 읽히는 것을 보면서 그의 비정상성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있는 정신병원에 넣어도 하등 문제가 없을 정도로 정신적 이상 징후를 보였습니다.

화학 약품과 알콜을 섞어서 만든 독주도 그의 뇌를 더욱 파괴하였습니다. 현실과 환상을 구별하지 못하는 경지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해군에서 근무할 때 배가 잠시 바닷가에 정박한 적 있었는데, 그때 동료들이 장난삼아 모래로 여자의 나체형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프레디는 모래여자를 현실에 존재하는 여자로 인식한 것인지 그 모래여자와 관계를 갖는 모션을 취했습니다. 장난이라 생각하며 지켜보던 동료들은 점차 현실과 환상을 구별 못하는 프레디의 괴이한 행동에 혐오감을 보였습니다. 프레디가 미쳤다는 것을 깨달은 표정이었습니다.

프레디가 이렇게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환상 속을 헤매는 것은 과거에 의식이 얽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술에 취해서 고모와 근친상간을 했던 것도 그에게는 트라우마였고, 전쟁에 참전했다가 사람을 죽였던 것도 트라우마였습니다.

그러나 프레디에게 가장 큰 트라우마는 사랑했던 여자 도리스였습니다. 랭케스터와의 면담에서 도리스라는 이름이 나왔을 때 그는 극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도리스와의 추억을 얘기하는가 하면, 때론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그런데 의문이 남았습니다. 가장 사랑했던 여인과의 이별이 프레디에게 가장 큰 트라우마인 이유가 개인적으로 납득이 안 갔습니다. 이 보다는 고모와의 근친상간이나 전쟁경험 등이 더 큰 일로 보이는데…. 그런데 영화는 도리스와의 이별이 프레디의 정신해체에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을 크리스트교의 원죄와 연관시켰습니다. 크리스트교적으로 봤을 때 인간의 원죄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면서 시작됐고, 그 후 인간은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도록 운명지어졌습니다. 프레디가 도리스와의 이별 후 급격하게 타락하고 정신적으로도 망가지는 것은 결국 낙원에서 쫓겨난 인간의 운명과 닮았다고 봅니다. 에덴에서의 추방이 인간에게서 가장 큰 트라우마인 것처럼 프레디도 도리스와의 시절을 가장 그리워하면서 또한 현실과의 괴리가 그에게 가장 큰 트라우마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프레디는 병적인 한 인간이 아니라 보편적 인간의 전형을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프레디가 성적 상상력으로 가득 찬 인물이라고 했는데 심리학자 프로이드는 인간의 의식을 모두 성적으로 해석했었습니다. 그러니 프레디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 인간의 모습을 좀 과장되게 보여줬을 뿐인 것입니다.

결국 도리스에 대한 프레디의 반응을 통해서 보면 인간에게서 가장 큰 트라우마는 원죄인데, 인간이 자유로운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 또한 이 원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프레디에게 행운이 찾아옵니다. 불안정한 인간인 자신을 구원할 마스터를 만난 것입니다. 마스터에게서 프레디는 여러 가지 훈련을 받습니다. 면담을 통해 자신의 트라우마를 확인합니다. 지금까지는 트라우마가 자신을 지배하는 것을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면서 살아왔는데 마스터는 프레디로 하여금 트라우마를 일으키는 원인에 계속 접촉하도록 훈련했습니다. 도리스라는 여자를 평정심을 갖고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반복해서 떠올리게 했습니다.

마스터의 훈련이 효과를 발휘한 것인지 프레디는 생각하는 것조차 거부했던 도리스를 만나러 갔습니다. 도리스와 헤어지고 7년 만입니다. 그런데 도리스는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돼있었습니다. 도리스의 이모가 전해주는 이 소식을 들으면서도 프레디의 마음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모를 통해 도리스 소식을 전해 듣는 것은, 그가 진정으로 과거와 결별했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졌고, 트라우마에서 해방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원죄의식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인간이 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거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인간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프레디는 술집에서 만난 여자와 관계를 갖습니다. 이 장면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성적 상상력에 가득 차 있었지만 한 번도 정상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던 프레디가 비로서 현실의 여자와 한 침대에 누워 있는 것입니다. 이는 프레디가 비로소 현실을 살게 됐다는 걸 의미입니다.

그리고 프레디는 마스터가 그에게 했던 것처럼 여자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합니다. ‘이름이 뭐냐?’고 몇 번씩 묻습니다. 이는 진정한 자신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합니다. 프레디의 마스터인 렝케스터의 고객 중 한 사람은 렝케스터가 “이름을 말하세요?” 하고 몇 번씩 반복하자 자신이 누구인지 헷갈린다고 대답했습니다. 지금 자기라고 생각하는 자기가 자신의 전부가 아님을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즉 무한 반복되는 이 질문은 사회적 자아에서 근본 자아로 의식을 전환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첫 장면에서처럼 프레디가 모래로 만든 여자의 나체 옆에 눕는 걸로 끝납니다. 그냥 조용히 누워있을 뿐입니다. 모래 여자를 그냥 모래로 인식하는 것이지요. 모래를 모래로 보고,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를 가리고 있던 모든 막을 제거했음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비로소 그는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경지에 이른 것입니다. 어떤 프리즘을 통해서가 아니라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경지에 이른 것이지요. 과거를 극복하고, 환상을 극복하고 결국 현재와 만난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경지가 불교가 도달하려고 하는 경지라고 생각합니다.

문제 많은 인간 프레디는 영화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습니다. 정신병원에 갇혀야 마땅했던 프레디는 마침내 그의 마스터인 랭케스터를 넘어서는 인간이 된 것입니다. ‘코즈’라는 신흥 종교의 창시자이자 프레디의 마스터였던 랭케스터는 ‘너는 마스터가 필요 없는 최초의 인간’이라고 프레디에게 말했습니다. 프레디가 마스터인 자신조차도 얻지 못한 자유를 획득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졌으며, 권위나 재물, 사람 등 어떤 것에도 걸리지 않는 프레디의 모습은 그야말로 새처럼 자유로우면서 바람처럼 가벼웠습니다. 자기 삶의 마스터가 된 것이지요. 또 다른 마스터를 주인으로 섬기지 않는 사람,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 이는 분명 불교적 인간상이었습니다.

김은주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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