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

명상이 붐이다. 스트레스 해소는 기본이고 마음 치료도 이미 넘어섰다. 이제는 영성[靈性]과 소명(召命, calling)을 체득하는 수준을 넘보고 있다. 방법도 여러 가지다. 앉아서 하는 명상은 이미 철 지난 얘기다. 걸으면서도 하고, 춤추면서도 하고, 먹으면서도 한다. 장소도 정해져 있지 않아, 다양한 명상센터가 곳곳에 즐비하다.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에 쉼 없이 수행하라는 옛 선사의 가르침이 21세기의 한국에서 현실화 되는 모양이다.

명상프로그램에 참여하려면 돈도 적지 않게 든다. 10주 내외의 코스를 기준으로 적게는 몇 십만 원부터 많게는 백만 원이 넘는다. 명상센터에 숙박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어떤 명상센터는 호텔 숙박비에 맞먹는 돈을 지불해야 한다. 단순 숙박비용만 그렇다. 비성수기와 성수기로 나눠 요금이 다르게 책정되고, 명상프로그램에 참가하면 추가로 또 비용이 청구된다.

명상에 돈이 드는 것을 두고 탓할 일은 아니다. 서구적 의미에서 명상은 본래 치료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명상으로 번역되는 메디테이션(meditaion)이 약(藥, medicine)과 어원을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다른 진료과목들이 육체적 질환을 주로 다루는데 비해 명상 치료는 심인성질환을 다룬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서구에서 명상은 신학적 배경도 내포하고 있다. 명상을 통한 치유는 신(神)에게 귀의하여 신의 품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비한 치료이기 때문이다. 매개한다(mediate)는 뜻의 영어표현이 메디테이션과 이어지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매개의 대상이 바로 신이다. 반면에 선(禪) 수행에서는 비밀스러움이나 구원이 확인되지 않는다. 선 수행자에게는 자신의 고통을 내맡길 신의 품이 없다. 그래서 자력신앙이라고 한다.

명상을 지도하는 사람들 자신도 명상을 치료라고 말한다. 그리고 명상하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을 클라이언트(client), 즉 고객이라고 부른다. 치료라는 상품이 생산되기까지 이자, 지대, 임금은 물론이고 적정 이윤까지 세밀히 계산될 수밖에 없다. 치과에서 치아를 스케일링하는데도 돈이 든다. 무려 마음을 스케일링하는데 비용이 발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명상프로그램 참여자에게는 비용이 부과되고, 그 일부 혹은 전부가 안내자에게 지불된다. 이렇게 명상이 치료의 성격을 갖는데 비해서, 불교의 수행은 교육의 성격을 갖는다. 이 차이는 수행과 명상의 차이를 파악하는데, 속되 보이지만 가장 본질적인 문제다. 교육은 본래 피교육자에게 비용을 부과하지 않는다. 무상교육은 시혜가 아니다. 무상은 교육이 교육답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온갖 명상이 있지만 빠지지 않고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메시지는 힐링(healing)과 행복이다. 명상을 통해 심적 고통이나 병리상태가 치유되고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분명 좋은 일이다. 그런데 붐(boom)이란 어떤 사회 현상이 갑작스레 유행하거나 번성하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붐이라면 이미 나의 자발성이 들어설 자리는 거의 없다.

명상이 치료라면 필연적으로 치료자와 피치료자 사이에 주종(主從)관계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주종관계는 지속될수록 강화된다. 주종관계가 강화될수록 피치유자는 더욱 종속되고 나약해진다. 이것이 모든 치료행위가 내포하고 있는 피할 수 없는 속성이다.

만해 한용운은 명상이 ‘피동 되지 않는 참사람’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고 했다. 오로지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인간육성만을 목표로 하는 것이 선불교의 교육론, 즉 선수행의 처음이자 끝이다. ‘치유’와 ‘행복’을 말하는 각종 명상법이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인간의 완성을 목적으로 하는지 돌이켜 볼 일이다.

명상 안내자와 선사(禪師)의 역할은 엄연히 다르다. 명상은 교육이 아니라 반대급부를 제공하는 치료행위이고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행위이다. 명상 안내에는 반대급부가 따르고 그것은 사실상의 치료일 것인데, 그렇다면 엄연히 의료 상거래 행위이고, 상거래 행위는 부가가치가 발생하지 않으면 행해지지 않는다. 이것은 호오(好惡)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관계의 문제다.

선설禪說

▲ 《도서(都序)》.
당나라 시대의 규봉(圭峯) 종밀(宗密, 780~841)은 당대 최고의 학승이었다. 교학(敎學)과 선(禪) 양쪽을 종횡으로 오가며 큰 족적을 남겼다. 그의 저술은 지금까지도 출가자들의 교육과정에서 교과서로 채택되어 읽히고 있다. 그는 《도서》(都序)에서 수행을 5가지로 분류했다.

① 외도선(外道禪): 둘로 나누는 생각을 가지고[帶異計], 나아지는 것은 기꺼워하고 못해지는 것은 꺼려서[欣上壓下] 수행하는 것.
② 범부선(凡夫禪): 인과관계를 곧이곧대로 믿어서[正信因果] 기꺼워하거나 꺼리는 마음을 가지고서[以欣厭] 수행하는 것.
③ 소승선(小乘禪): 자아가 공함을 알고[悟我空] 치우친 진리관[偏真之理]에 의거하여 수행하는 것.
④ 대승선(大乘禪): 자아와 대상이 모두 공함을 알고[悟我法二空] 그런 다음에 드러난 진리[所顯真理]에 의거하거 수행하는 것.
⑤ 최상승선(最上乘禪): 자신의 마음은 본래 청정하고, 번뇌가 없으며, 지혜가 본래 갖추어져 있어서 부처와 다를 바 없다는 것에 의거하여 수행하는 것.

종밀이 제시한 기준에서 선(禪) 수행은 말할 것도 없이 최상승선이다. 선불교의 이론적 전제인 돈오(頓悟)의 맥락에서 보면 치료는 어불성설이다. 치료를 모색한다는 것은 이미 병들어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고, 병들어 있음을 전제로 하는 한, 치유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미 있는 것은 결코 사라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최상승선이 내포하는 의미다.

그러면 명상은 어디쯤 해당될까. 아무리 넉넉히 잡아도 범부선 이상으로 보기 어렵다. 만족감과 불만족감 즉 기꺼워하거나 꺼리는 마음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좀 모질게 보면 외도선일 수도 있다. 혹여 외도선으로 볼 수 있는 명상법이 있다면 사태는 심각하다. 외도선이란 불교수행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불교가 아니라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즉 사이비(似而非)라는 뜻이다.

치유와 행복을 추구하는 명상과, 추구하는 행위는 모두 미망(迷妄)을 양산할 뿐이라고 보는 선의 논리 사이를 관통하여 흐르는 강은 아직 깊고 멀어 보인다. 선 수행과 명상의 접점은 희미해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접점이 있어도 혹은 없어도 문제될 것은 없다. 문제의 심각성은 접점이 있거나 없는 것이 아니라, 희미하다는 사실에 있다. 희미해서 헷갈리고, 그래서 위태롭다.

명상이 번성하고 치유와 행복을 말하는 사람이 늘었다는 것은, 우리 시대가 불황과 우울증의 시대로 돌입했다는 방증이다. 권력이나 돈에 빠져 있는 것 보다야 명상을 하는 게 훨씬 낫다. 자기에게 잘 맞는 것이면 어떤 것이라도 무방하다. 그런데 요즘 출가사문이나 불자들 중에서도 명상에 관심을 둔 사람들을 적지 않게 본다.

적어도 조계(曹溪)의 문도라면, 그리고 불자라면 되돌아 봐야 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외도선일지도 모르는 수행을 불교수행으로 잘못알고 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이켜봐야 할 시점이다. 사이비는 겉보기에는 비스름하지만[似] 사실은 아주 다르다[非]는 의미를 담고 있다.

공자(孔子)는 대놓고 말했다. “나는 비슷해 보이면서 아닌 것을 정말 미워한다. 가라지(피)를 미워하는 이유는 벼 싹을 해칠까 두렵기 때문이다.” 성인(聖人)이 염려하는 지점이 예사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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