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은 아름다워.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디엔가 우물이 숨어있기 때문이야.
그런데 눈으로는 찾을 수 없어. 오직 마음으로 찾아야 해.
—생텍쥐페리, 《어린왕자》

1. 차라리 수미산 같은 아견(我見)을 일으킬지언정 겨자씨만큼도 공견(空見)에 빠지지 말라

오래전 군대 제대하고 지리산에 올랐다가 마침 영광 건설현장에 파견 나가 있던 형님을 찾아가던 길이었습니다. 한적한 시골버스에 우연히 비구와 비구니 두 스님이 앉은 자리 뒤에 앉아 가게 되었습니다. 해서, 본의 아니게 두 스님이 나누는 이야기를 얻어 듣게 되었지요. 스님들은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중 한 구절이 아직도 제 귀에 생생합니다.

“무아(無我)라! 나를 없애라 나를 없애라 해서 나를 없앴는데… 이젠 뭘 해야 할지 모르겠소.”

비구니 스님이 비구 스님에게 한 말입니다. 비구스님의 대답은 기억에 남아 있는 게 별로 없고..... 비구니 스님의 이 말이 지금도 귓가에 울리는 것은 이 문제가 여전히 풀기 어려운 숙제이기 때문이겠지요. 철학을 전공으로 삼은이래 이 문제는 불쑥불쑥 제 생각을 지배하곤 하였으니 어쩜 제 평생의 화두가 된 셈이네요. 인연치고는 참 묘한 인연입니다.

비구니 스님은 악취공(惡取空)이란 함정에 빠져있었던 것입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중관학은 파사(破邪)를 통한 현정(顯正)을 구현하려고 하였습니다. 잘못된 인식, 그릇된 관념 일체를 타파함으로써 바른 진리를 드러내고자 하였습니다. 이 파사의 논리에서 공(空)개념이 종횡무진 활약하기에 이들 중관학파를 공종(空宗)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공종은 중국의 삼론종(三論宗)을 가리키는 말입니다만...... 삼론종이 나가르주나[龍樹]의 《중론(中論》과 《십이문론(十二門論)》, 그리고 나가르주나의 제자인 아리야데바[提婆]의 《백론(百論)》이란 중관학의 주요 논서를 소의논서로 삼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고, 그런 만큼 공종이란 말을 중관학파와 일치시켜 이해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이 세계는 인연에 의해 생멸하니 항구불변하는 실체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空)이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사물이나 사건을 가리키는 말들은 다만 잠시 빌린 가명(假名)에 불과하며 공(空) 또한 가명입니다. 그러므로 중도의 뜻[중도의(中道義)]이란 언어문자가 내포하는 실체성을 공(空)이란 이름으로 부정하고, 다시 이 공이란 이름마저도 부정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런 부정의 부정은 결국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를 여실히 드러내기 위함인 것은 앞에서 이미 살펴본 그대로입니다. 중관학의 중도사상은 부정의 부정을 통한 절대긍정에 도달하는 논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부정만을 되풀이할 뿐 그 절대긍정의 경계로 돌아올 줄을 몰랐습니다.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부정의 수레바퀴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중관학자들을 악취공자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차라리 수미산 같은 아견(我見)을 일으킬지언정 겨자씨만큼도 공견(空見)에 빠지지 말라. 《가섭소문경》 : 참고로 이 경은 유식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위경(僞經)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진리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예전에는 자신들의 사상의 정통성과 논리의 정당성을 드러내기 위해 경(經)의 형식을 빌려 책을 만들었는데, 이런 경전을 위경이라고 한다. 위경은 이름 그대로 가짜 경전이지만, 옛 사상가들의 표현방식이었으며, 거기에는 나름의 철학과 역사성이 풍부하게 있다. ”

2. 자성도 없고 존재도 없다. 그 아공법공(我空法空)의 세계

삼계가 허망하니 만법은 오직 마음이 만든다.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삼계가 왜 허망한가요? 봄에는 꽃이 피고, 가을에는 어김없이 영그는데, 어디에 허망함이 있다는 말인가요? 이렇게 눈에 들어오고 손으로 만져지는 이 생생함이 다 거짓이란 말인가요?

여기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는 세계를 어떻게 알게 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나무에는 나무의 속성이 있고, 바위에는 바위의 실체가 있어서 경험을 통해 이를 인식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사물의 속성과 나의 인식이 일치하면 참된 인식이라고 여기지요. 과연 그럴까요?

여기에 낙락장송 한 그루가 있습니다. 소나무는 우리의 눈을 통해 수용되고 의식 속에서 소나무로 인지됩니다. 그 결과 우리는 ‘저것은 소나무이다.’라는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판단이 과연 저 소나무와 일치하는지 증명을 해 봐야겠습니다. 다시 저 소나무를 보니까 ‘저것은 소나무이다.’라는 판단이 내려집니다. 앞의 판단과 뒤의 판단이 일치하므로 우리는 이 판단은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가만히 따져보면 이는 판단과 판단의 일치에 불과합니다. 문제는 소나무라는 대상과 우리의 판단이 일치하여야 하는데, 그 일치여부를 가릴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애초부터 우리가 판단하는 소나무는 우리의 밖에 있는 저 소나무가 아니라 우리의 망막에 맺힌 소나무의 영상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할 때는 먼저 인식하는 대상과 인식하는 주체가 나누어져야[分] 가능합니다. 이렇게 나누어진 다음에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은 외부 사물이 아니라 눈, 코, 귀와 같은 감각기관을 통해 우리 안에 들어온 영상이나 혹은 울림같은 것이지요. 이를 유식학(唯識學)에서는 상분(相分)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이 상분에 대해 판단하는 주체가 있습니다. 이를 견분(見分)이라고 하는데, 유식학에서 인식대상과 인식주체를 각각 상분과 견분이라고 이름하며 나눌 분(分)자를 쓴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왕양명(王陽明)선생이 남진(南鎭)이란 곳을 갔을 때입니다. 깊은 산 깎아지른 절벽 위에 한 송이 산유화가 곱게 피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바위 위에 핀 꽃을 가리키며 물었습니다.

“(선생께서는) 천하에 마음 밖에는 사물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저 꽃은 깊은 산중에서 스스로 피고 스스로 지니 내 마음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입니까?”

왕양명선생이 대답하였습니다.

“그대가 저 꽃을 보지 않았을 때에 저 꽃과 그대의 마음은 모두 고요함 속에 있었을 따름이다. 그대가 저 꽃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저 꽃의 빛깔이 일시에 명백해지는 것이니 저 꽃이 마음 밖에는 있지 않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질문을 한 사람은 인식대상을 절벽 위에 핀 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이 꽃은 왕양명에게 있어서는 알 수 없는 것, 즉 그것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아니면 우리가 어떤 환상을 보고 있는지 도대체 알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눈을 통해 들어온 어떤 이미지를 의식하고서야 비로소 ‘아! 꽃이 있구나!’라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꽃이 눈에 들어오지 않거나, 설혹 들어 왔다해도 의식하지 못하는 한, 꽃이 있다고 인식하지 못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꽃〉

감각기관을 통해 수용된 어떤 이미지를 인식주체가 꽃이라고 불러주어야 비로소 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부득불 외부세계에 사물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독단(獨斷, dogma)입니다. 없는 걸 있다고 하거나, 알 수 없는데도 안다고 하는 것이 바로 독단이지요. 이게 독단임을 밝힌 서양의 철학자가 바로 데이비드. 흄입니다.

독단에서 벗어나면 비로소 눈앞에 펼쳐지는 이 세계가 환상이고 허망임을 깨닫게 됩니다. 너무 허무한 걸까요? 외부 세계는 알 수 없고,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세계는 결국 우리들의 의식 속에 맺힌 이미지에 불과하니 어디에 항구불변하는 실체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자성도 없고, 존재도 없다는 아공법공(我空法空)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3. 오직 식일뿐 대상이 없다. 그 유식무경(唯識無境)의 경지

중관학(中觀學)은 일체의 독단에 저항하고 싸웠습니다. 그런 만큼이나 삼계의 허망성을 중관학보다 더 잘 밝힌 사상도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머물면 허무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악취공은 인식대상의 허망성에 집착하여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유식학(唯識學)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중관학이 인식대상과 인식주체의 공성(空性), 즉 아공법공을 위해 싸울 때 유식학자들은 조용히 자신들의 의식속으로 침잠해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어떻게 이것은 꽃이 되고, 저것은 바위가 되는지, 정확히 인간이 이것을 꽃이라 부르고 저것을 바위라고 부르는지를 탐구했던 것입니다.

근본불교에서는 인간에게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라는 육근(六根)이 있다고 합니다. 이 육근에 수용되어 하나의 이미지로 형성되는 대상이 육경(六境)이고, 육경을 판단함으로써 형성되는 인식이 육식(六識)입니다. 유식학에서는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 다섯 감각기관에 의해 형성되는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을 전5식(前五識)이라 하고, 여섯 번째의 의식(意識)을 제6식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제7식이 말나식(末那識)이고 제8식이 아뢰야식(阿賴耶識)입니다.

아뢰야식은 일종의 무의식입니다. 이 식에 인간은 수많은 기억과 경험들을 저장합니다. 그래서 아뢰야식을 장식(藏識)이라고도 하며. 여기에 저장되어 있는 기억이나 경험들을 종자(種子)라고 합니다. 이 종자는 어느 순간이 되면 의식의 표층으로 떠오르며 우리들의 생각과 판단에 영향을 끼칩니다. 이를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루어진 생각과 판단은 다시 기억과 경험의 종자가 되어 아뢰야식에 저장됩니다. 이를 ‘현행훈종자(現行熏種子)’라고 하지요. 한편 이렇게 훈습된 종자는 아뢰야식 안에서 생장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종자를 만들어 내는데, 이를 ‘종자생종자(種子生種子)’라고 합니다. 이렇게 종자와 현행이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우리들의 판단과 사유가 작동하는데, 이 사유를 담당하는 식이 바로 제7 말나식입니다.

▲ 영화 본 아이덴티티 포스터.
이탈리아 어부들이 지중해 한 가운데에서 등에 두 발의 총상을 입은 채 표류하고 있는 한 남자(Jason Bourne: 맷 데이먼 분)를 구하게 된다. 그는 의식을 찾게 되지만 기억상실증에 걸려 자신이 누구인지 조차 모른다.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단서는 등에 입은 총상과 살 속에 숨겨져 있던 스위스 은행의 계좌번호 뿐.....

자신의 존재를 찾아 스위스로 향한 그는 은행에 보관되어 있는 자신의 소지품을 살펴본다. 그는 자신이 파리에서 ‘제이슨 본’이라는 이름으로 살았음을 알게 되지만, 여러 개의 가명으로 만들어진 여권을 보고 자신의 실명과 국적 또는 정체성을 잃게 된다. 영화 《본 아이덴티티》 줄거리, 네이버 영화에서 인용.

영화 《본 아이덴티티》의 줄거리입니다. 기억상실증은 인식능력을 상실한 것과도 같습니다. 주인공은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하던 사람인지, 전혀 모릅니다. 여러 개의 가명은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만 가져다 줄 뿐이지요. 정체성을 찾아가는 와중에 그가 얻는 정보들도 그 진실성을 확정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마치 삼계가 허망한 것처럼 주인공의 주변은 온통 혼란뿐입니다. 그 어느 것도 명쾌하게 분류되지 않은 채 어지럽게 섞여 있습니다. 이 속에서는 살 수 없습니다. 그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오직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분명히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체성을 찾아가며 그는 자신도 모르는 능력이 본인에게 잠재되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뛰어난 무술실력과 민첩한 동작, 여기에 명석한 두뇌와 빠른 판단력이 순간순간 작용합니다.

이런 능력이 종자(種子)입니다. 기억상실증에 걸렸기 때문에 비록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무의식적으로 불쑥불쑥 현행하는 종자인 것입니다. 무의식에 저장되어 있던 종자들을 조금씩 의식의 표층으로 불러내면서 주인공은 진실에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과정은 매우 고통스럽고 때론 외면하고 싶은 것이기도 합니다. 결국 자신을 둘러싼 세계는 자신이 저지른 업보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임을 인지하게 됩니다. 한 때의 불타는 애국심이 무자비한 살인병기가 되어 단란했던 한 가정을 파괴하였음을 알게 됩니다. 알고 보면 참으로 허망하고 꿈같은 지난날입니다. 결국 한 순간 잘못 먹은 마음이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이루었고, 진실을 여실히 알게 된 이 순간에 드는 마음이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느끼고 생각하는 내 주체가 이 모든 세계내 존재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게 유식무경을 통해 유식학자들이 말하고자 했던 진실입니다.

4. 중관학에서 유식학으로, 그 주체를 찾아가는 여정

진실을 안다는 것은 사실 고통스런 것입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진실을 알게 해주는 빨간 약을 먹은 네오가 기계에 지배되는 세계의 참모습을 바로 본 순간은 곧 추락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진실을 안다는 것은 때로 저 밑바닥으로 처박히는 것과도 같습니다. 어쩌면 악취공에 빠진 중관학자들의 느낌이 그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은 바로 나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지를 깨닫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그래야만 나는 무엇이 되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바르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중관학자들이 대승(大乘)이라는 크나큰 수레가 나아가기 위해 먼저 일체의 독단으로 쌓아올린 옹벽을 온몸을 던져 깨부수었다면, 유식학자들은 그 수레가 가야할 길을 제시해 준 것입니다. 그 이정표를 훗날 생텍쥐페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막은 아름다워.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디엔가 우물이 숨어있기 때문이야. 그런데 눈으로는 찾을 수 없어. 오직 마음으로 찾아야해. 생텍쥐페리, 《어린왕자》"

김문갑(철학박사, 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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