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아가면서 스스로 파멸(破滅)의 문으로 들어서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자신의 실존이라는 삶의 언저리에서 주인공으로 살면서 승리하기를 기대하고 또 기원한다. 이때 그 파멸이 구체적으로 무엇이고 승리가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각자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돈을 잃는 일이 가장 심각한 파멸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건강을 잃은 것을 파멸과 동일시할 수도 있다.

승리(勝利)에 대해서도 많은 의견이 있을 수 있다. 21세기 한국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한국인들은 대체로 돈을 많이 벌거나 높은 지위 또는 명예를 얻은 것을 승리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에 키로 상징되는 외모를 갖추는 것을 승리의 핵심 부분으로 받아들여 세계적인 ‘성형공화국’을 만드는데 ‘성공’하고 있기도 하다. ‘루저(loser)’라는 말이 여러 분야에 적용되지만, 우리에게 그것은 많은 경우 어이없게도 키가 평균보다 작은 사람에게도 적용된다.

승리와 파멸을 어떻게 받아들이든지 누구나 파멸을 피하고자 하고 승리를 원한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본능적으로 죽음을 의식하면서 공격성을 보이는 것이 인간이기도 하다는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S. Freud)의 지적에도 유념할 만한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상적인 인간이 스스로를 의식적으로 파멸로 이끌어가는 경우는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 불자들에게 이 승리와 파멸은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을까? 불자도 불자 나름이어서 쉽게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최근 조계종단을 움직이고 있는 일부 스님들의 모습에서는 불자다운 승리와 파멸의 가르침을 얻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물론 우리 주변에는 수행자로서의 모범을 보이는 분들이 적지 않게 있고 성철스님이나 법정스님처럼 우리 현대사 속에서 몸소 가르침으로 전해준 분들이 계셔서 희망을 버려야만 하는 지경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상황이 좋지 않다는 사실 또한 분명해 보인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감로수처럼 갈망하게 된다.

여색(女色)에 미치고 술에 중독되고 도박에 빠져 있어 버는 것마다 없애버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파멸의 문입니다.(《숫타니파타》,<파멸의 경>)

힘이 지혜에 있고 계행과 덕행을 지키고 삼매에 들고 선정을 즐기며 집착에서 벗어나 황무지가 없고 번뇌를 여읜 자, 현명한 님들은 그를 또한 성자로 안다.

홀로 살면서 방일하지 않는 성자, 비난과 칭찬에 흔들리지 않고,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렵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남에게 이끌리지 않고 남을 이끄는 자, 현명한 님들은 그를 또한 성자로 안다.(《숫타니파타》, <승리의 경>)

우리 시대에 수행자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지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우리들은 일부 승려들의 여색과 음주와 도박에 대해서도 쉽게 비난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그런 파계 행위들을 보면서 어떤 점에서는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 길이 파멸의 문이라는 엄연한 진리가 바뀔 수는 없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계행과 덕행을 지키면서 홀로 또는 함께 삼매에 들고 선정을 즐기면서 세상의 흐름에 이끌리지 않고 세상 사람들을 이끌어가는 한국 불교계의 지도자를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는 시절이다. 스스로 그런 승리자의 모습을 갖추고자 노력하지 않는 지도자가 있다면, 그는 우리를 승리의 문으로 이끄는 것처럼 위장하면서 실제로는 파멸의 문으로 몰아넣는 자일 것이기에 우리 모두가 수행자로서의 깨어있음을 간직해야만 한다. 

-박병기/한국교원대 교수, 동양윤리교육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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