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千世界海中구 대천세계해중구
一切聖賢如電拂 일체성현여전불
假使鐵輪頂上旋 가사철륜정상선
定慧圓明終不失 정혜원명종불실

대천의 세계라도 바다의 거품하나
일체의 성현들도 번갯불 지나가듯
만약에 쇠바퀴가 머리 위 돌아가도
정혜의 원명함은 끝까지 잃지 않네

삼천대천세계와 같은 엄청 큰 것이라도 비유컨대 바다에 생겨나는 거품 하나와 같은 존재요, 아무리 성현이라도 마치 이 세상에 왔다 감이 번갯불 번쩍하듯 순식간에 없어진다. 무릇 모양 있는 것은 다 그러하나 진실하게 수행하여 생긴 선정과 지혜의 힘은 가령 두꺼운 쇠바퀴가 내 머리 위를 돌고 돌아 금시 떨어질 것 같은 상황에서라도 언제나 밝고 뚜렷하여 잃게 되는 일이 없다.

대천세계(大千世界?大千沙界) - 삼천대천세계를 말하는 것이니 이렇게 크고 많은 것이라도 역시 무일물(無一物) 임에는 다르지 않다고 하는 예
일체성현(一切聖賢) - 『화엄경』 보살의 수행 52위 가운데 10주(住) 10행(行) 10회향(回向)의 단계는 3현위(三賢)이며 10지(地)의 단계는 성인위[十聖位]이며, 이것을 합하여 성현(聖賢)이라 한다.
여전불(如電拂) - 『금강경』에는 “모든 모양으로 이루어진 것은 생겼다 없어졌다 하여 무상하기가 아침 풀숲의 이슬같고 번갯불 번쩍 하듯 없어지는 것이다[一切有爲法 如露亦如電].
가사철륜(假使鐵輪) - 『대지도론』 제11권에 “가령 두꺼운 쇠바퀴가 내 머리 위에서 돌고 있어 금시 떨어질 것 같은 상황이라도 일심으로 불도를 구하는 이 마음은 후회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삼악도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통을 받는 가운데 있더라도 일심으로 불도를 구하는 마음이 달라지지 않으니라” 하였다.
정혜원명(定慧圓明) - 『육조단경』에 “선지식이여 나의 이 법문은 정혜로써 근본을 삼는다” 하였으니, 어떠한 압력을 받더라도 정혜의 완전함을 파괴하거나 손상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해제]
정혜의 정은 선정(禪定)을 말하며, 혜는 정력(定力)에서 정신집중으로 인하여 발하게 되는 지혜(智慧)를 말한다. 그런데 흔히 말하는 여러 가지 경우에서의 정신집중에서 나오는 힘과 정력에서 나오는 깨달음의 힘은 같은 것 같으면서도 엄연히 다른 것이다. 즉 각종의 무도(武道)나 예도(藝道) 등도 대단히 집중력을 요하는 것이지만 밖의 그 여러 가지 대상에 정신을 집중하는 거기에서는 깨달음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세계에 정신을 집중하여 정력을 얻게 되면 언젠가 모르게 갑자기 깨달음이 튀어나오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정’과 ‘혜’라고 하는 두 가지 말로 표현하지만 깨달음의 지혜란 정신집중의 정력이 없다면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정진의 수행으로 갖추어 지니게 되는 완전하며 원만하고 분명한 것이 바로 정력(定力)과 깨달음의 지혜[悟慧]이며, 이 깨달음의 지혜로 비추어보는[照見] 진실한 세계란 가령 어떠한 환경과 경우에 부딪친다 하더라도 조금도 흔들림이 없다는 것이다.

日可冷 月可熱 일가냉 월가열
衆魔不能壞眞說 중마불능괴진설
象駕?嶸漫進途 상가쟁영만진도
誰見螳螂能拒轍 수견당랑능거철

햇빛이 차가워지며 달빛이 더워진들
이같이 진실한 말 악마가 파괴하랴
코끼리 끄는 수레 천천히 지나가도
사마귀가 맞서서 그 길을 막을 손가

가령 태양의 빛이 얼고 달빛이 더워지는 일이 있다하더라도 부처님의 진정한 깨달음의 가르침을 악마라도 파괴할 수는 없는 것이며, 그것은 마치 고끼리가 끄는 거대한 수레가 당당하게 나아가는 길 앞에 겁 없이 마주서서 도끼 같은 앞발을 들고 막아보려고 한들 어찌 감히 그 진행을 막을 수 없는 것과 같다할 것이다.

일가냉 월가열(日可冷 月可熱) - 『불유교경』에 나오는 말로써 절대로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함을 가정하는 말.
상가쟁영(象駕?嶸) - 코끼리가 끄는 가장 큰 수레이니, 이것은 부처님의 진정한 법설을 비유한 것이니 쟁영(?嶸)은 높고 거대한 모양을 형용한다. 만(漫)은 그만 두었으면 좋으련만 쓸데없는 짓을 저지르는 것을 가리킴.
수견당랑거철(誰見螳螂拒轍) - 『장자』의 ‘인간세편’에 나오는 비유. 즉, “그대 저 사마귀의 하는 짓을 보지 못하였는가. 화가 나면 그 도끼 같은 두 앞발을 들고 수레의 쇠바퀴 앞에 대어드니, 그의 힘으로는 이길 수가 없음을 알지 못하는 탓이다” 하였으니,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나서는 어리석음을 말하는 것이다.

[해제]
태양열은 뜨겁고 달빛은 차가운 것이 보통인데 가령 태양이 차갑고, 달빛이 뜨거운 것 같은 이상 사태가 버려지고 그와 같이 악마들이 아무리 들끓어 모여 든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진실한 말씀을 방해하거나 파괴할 수 없는 것이다. 진설(眞說)이라는 것은 다만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이니까 진설이라기보다는 틀림없는 진실을 말씀하신 것이기에 그래서 진설인 것이다.
악마에게는 네 가지 종류의 악마[四魔}가 있는데, 이들은 어느 종류의 악마이던 간에 모두가 어디까지나 불도의 수행과 성취를 방해하는 것은 다름이 없다. 그러나 아무리 어떤 종류의 악마들이 나타나서 어떤 방해를 한다 하더라도 진정한 불설을 끝내 파괴할 수 없으며 따라서 수행자의 수행과 그 성취를 방해할 수가 없으니 불도 수행의 요체는 불도를 믿고 행하는 사람은 석가세존의 가르침이 진실함을 틀림없이 믿고 행하는 것이 악마 외도의 방해를 물리치고 불도를 성취하는 요체이다.
코끼리가 끄는 높고 큰 수레란 대승의 불교를 가리키는 것이며, 그 수레가 당당하게 천천히 굴러간다는 것은 대승의 가르침이 그 어떤 다른 외도의 가르침에도 방해받거나 흔들림 없이 위풍당당하게 세상을 바로 가르치면서 교화해 나간다는 말이다. 누가 보았느냐[誰見]는 아무도 그런 일을 보는 예가 없다는 것이니 중국의 속담에 자기 분수를 도무지 헤아리지 못하고 감히 적은 힘을 믿고 상대가 어떠하던지 간에 덮어놓고 도끼 같이 생긴 앞다리를 들고 대드는 버릇이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사마귀가 아무리 화가 나서 거대한 코끼리 수레를 가로막는다 해서 그 굴러가는 바퀴를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것을 영가 스님은 일반적 세속의 학문이나 철학 또는 소승적 가르침을 아마도 사마귀의 앞발[螳螂斧]에다 비교하여 그런 가르침들이 만약 코끼리 수레 같은 대승의 가르침을 방해하려 도전한다 하더라도 도저히 상대가 될 수가 없는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大象不遊於兎徑 대상불유어토경
大悟不拘於小節 대오불구어소절
莫將管見謗蒼蒼 막장관견방창창
未了吾今爲君決 미요오금위군결

커다란 코끼리는 토기 길 가지 않고
위대한 깨달음은 작은 일 집착 않네
저 하늘 대쪽 통해 좁다고 비방 말게
아직도 모르거든 그대를 도와줌세

거대한 코끼리는 겨우 토끼 같은 작은 짐승들이나 드나드는 작고 좁을 길은 지나가지 않는 것이다. 그와 같이 위대한 깨달음은 작은 일들에는 구애받지 않는 법이다. 마치 좁은 갈대 구멍이나 대나무 구멍으로 하늘을 엿보는 것 같은 아주 작은 소견으로 저 높고 넓은 하늘을 이렇다 저렇다 하고 망념된 비판을 해서는 안 되듯이 아주 좁은 학식이나 지식을 가지고 광대무변한 불도의 진리를 비판하거나 비방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눈먼 짓이며 정법을 훼손하는 죄업이 참으로 지대한 것이리로다. 그러니 위대한 불법을 아직도 확실하게 알만한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있거든 이 영가현각이 조금도 서슴없이 지금 곧 여기서 그들의 눈이 바로 뜨도록 도와줄 것이로다.

대상불유어토경(大象不遊於兎徑) - 『우바색계경』 제 1권에 삼수도하의설[三獸渡河說]이 있는데 “선남자야 항하(Ganges)의 물을 건널 때 토기는 바닥에 닿지 못하여 둥둥 물에 떠서 건너고 말은 어느 때는 바닥에 닿기도 하고 어떤 때는 바닥에 닿지를 못한다. 그러나 코끼리는 곧장 바닥을 착실하게 밟고 건너가는 것이 보살의 수행과 같다” 한데서 나오는 말인데 중국의 『조당집』 제 13권에 있는 중초경화(中招慶和) 화상의 선문답에 다음같이 나와 있다. 즉, 수행승이 화상에게 묻기를 “경전에 말하기를 큰 길[大道]을 가려하거든 작은 길[小道]을 보지마라 하였으니 그러면 어떤 것이 큰 길입니까” 하였다. 화상이 묻기를 “그대가 그 길을 얻었는가” 승이 답하기를 “학인이 아직도 모릅니다. 그러하오니 스승님께서 거기에 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기 바랍니다” 화상이 말하기를 “내가 만일 그대를 위하여 이끌어 준다면 그대의 큰 길을 잘못 가게 하게 되리라” 하였다고 한다.

대오불구어소절(大悟不拘於小節) - 『조당집』 제 3권에 있는 지책(智策) 화상의 전기에 말하기를 “조계의 깊은 뜻[曹溪密旨]에 계합한 이래로 세간 밖을 노닐면서[物外道遙] 작은 일에 구애됨이 없었노라[不拘於小節] 토로하고 있다.
관견방창창(管見謗蒼蒼) - 『장자』의 ‘추수편‘에 나오는 말로 갈대 구멍으로 하늘을 보고는 돈쪽만큼만 보이듯이 매우 좁은 소견을 말함.
미요오금위군결(未了吾今爲君決) - 영가 스님은 이 『증도가』의 첫머리에서 그대가 보지 못했는가[君不見]이라고 한데 대해서 마지막에 거기에 응하는 글귀이다. 즉, ‘이제까지 고구정념하게 노파심절로 누누이 말해주었건만 그래도 아직도 석연치 못하거든 얼마든지 어떤 문제라도 물어 오너라. 내가 바로 여기서 당당에 모든 의문을 일도양단하여 해결해 주리라’ 하고 맺고 있으니 새삼스럽게 영가형각 스님의 선지(禪旨)에 대한 경지가 진정하고 확실함과 함께 그의 풍부하고도 유려한 시상과 문장에 감탄을 금하지 못하는 바이다.

인환 스님/전 동국대 교수

▲이번 호로『증도가』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성원해 주신 독자 여러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성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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