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불교가 일제 강점기의 왜색불교 광풍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위의를 지키고 있는 데는 수많은 선지식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41년 3월 선학원에서 열흘간 개최된 유교법회는, 그런 노력 가운데에서도 ‘한국불교 중흥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가장 큰 의미를 둘 수 있다.
4월 22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전통문화공연장에서 ‘조계종 중흥의 당간, 1941년 유교법회(遺敎法會)를 조명하는 연찬회’가 열렸다. 이번 연찬회는 ‘봉암사 결사(1947년)’에 가려져 있던 유교법회를 재발굴해 불교중흥의 뿌리를 정립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여명 사부대중이 참석한 이번 연찬회에서 기조발제에 나선 목정배 동국대 명예교수는 “선학원 창립, 선우공제회 결사, 유교법회 개최 등은 조계종 교단정화로 이어지는 기초가 되었다”고 말했다.
발제에 나선 해인사 율주 종진 스님, 해인사 강주 법진 스님, 벽송사 벽송선원장 월암 스님, 김광식 부천대 교수, 김상현 동국대 교수 등은 유교법회의 전개?성격?동참대중?계율?선풍 등을 조명했다.

김광식 “현실과 사회에 적극 대응하려는 대승선”
유교법회는 지난 1941년 3월 4일부터 13일까지 10일간 서울 안국동 선학원에서 거행됐다. 이 법회는 민족불교와 계율수호, 비구승단 수호 등의 성격을 담보하고 있는데, 참석 스님들은 수행터전에 돌아가서도 계율을 수호하면서 수행을 지속하며 미래 불교를 꿈꾸며 비구승단 재건과 민족불교의 구현을 준비했다. 이는 이후 정화운동으로 추동되고 조계종단 재건으로 나타났다. 이런 정신을 가진 유교법회는 일제 말기에 선학원과 수좌들의 자기 정체성이 적극 구현된 법회였으며 현실과 사회에 적극 대응하려는 대승선이었다.

법진 스님 “동참 스님들, 1962년 통합종단 출범 주도”
유교법회에는 만공?한영?상월?영명?채응?청담?운허?동산 스님 등 40여 명의 스님들이 참석했다. 이중 확인된 27명의 스님 가운데 유점사를 중심으로 한 금강산 출신 스님들이 전체 41%인 11명으로 가장 많았다. 유교법회 동참 스님들은 당시 불교의 문제점을 타파하기 위해 율장 정신과 수행자의 청정성, 경건성, 위의회복을 대안으로 삼았고, 법회에서 부처님의 유훈(『유교경』)과 율장(『범망경』), 선(‘만공 스님의 법문’)을 주요 일정으로 잡았다. 동참 스님들은 해방 이후 조계종의 형성과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는데, 1962년 통합종단이 출범할 때 비구승 중심의 여론을 주도하거나 종단 주요기구를 운영했다.

김상현 “범망ㆍ유교경 강설, ‘청정교단’ 수호 증거”
유교법회에서는『범망경』과『유교경』이 강설됐다. 그 이유는 두 경전의 간행과 유통의 역사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범망경』하권에는 10중과 48경의 대승보살계에 해설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가장 널리 수계되고 있는 보살계다.『유교경』또한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간행 유통돼있음을 여러 문헌을 통해 알 수 있다. 유교법회에서 한국 고대로부터 줄곧 중시해왔던 이 두 경전을 강설해 불조혜명의 계승을 강조한 것은 법회의 개최 목적이 한국의 전통적인 청정교단 수호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종진 스님 “황국위령제 등 친일 엿보이나, 회주ㆍ증명 비교적 수준 높아”
1941년의 유교법회는 선학원에서 개최된 중요한 법회였다. 일제하에 때 묻지 않은 고승이 참여하였고 조사선이나 선원청규보다 석존의 계율과 여래선을 강조해 불교의 원형을 회복하려는 고승의 법회였다. 물론 3월 11일 법회에서 ‘황국(皇) 무운장구 전몰장병 위령제’를 열러 식민지의 불교계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지만, 위령제를 제외하고 법회 회주와 증명은 친일불교에 영합하지 않은 수준 높은 고승이 관여했고, 그런 점에서 유교법회의 중요성이 돋보인다.

월암 스님 “수행ㆍ포교에 전념하는 것으로 중생에 회향하는 해답 찾아야”
유교법회에서 미래지향적인 실천방안을 도출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실천방안은 첫째, 불조혜명의 계승이다. 열심히 수행해서 깨달음을 증득해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유교법회를 계승하고 조계종을 살리는 길이다. 둘째, 계선(戒禪)일치다. 선사와 율사와 강사가 통합돼 계정혜 3학을 모두 아우를 수 있을 때 한국불교의 미래는 밝다. 즉, 선율겸수(禪律兼修)의 종풍이 선양돼야 한다. 셋째, ‘불유교(佛遺敎)’의 봉행이다.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1947년 봉암사 결사의 뿌리가 유교법회이므로,『유교경』을 설하고 그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

편집실/

유교법회는 1941년 3월 4일부터 13일까지 10일간 선학원(서울 안국동)에서 거행된 당대 선지식들의 수행결사다. 만공?청담?자운 스님 등 40여 명의 청정비구 스님들이 왜색불교로 위기에 처한 한국불교의 현실 직시하고 한국불교의 전통과 수행본분을 되찾기 위한 첫 행보였다. 이는 선학원 설립(1921년) 정신의 계승이자, 1946년 해인사 가야총림 건설과 1947년 봉암사 결사의 연원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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