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몇 해 전에 ‘아라한 장풍대작전’이란 영화가 개봉된 적이 있다. 장풍과 공중부양 등의 초능력을 갖춘 자가 세상을 구한다는 코믹 액션 판타지 영화이다. 그런데 이 영화속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아라한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초능력을 구사할 수 있는 초능력자가 등장할 뿐이다.
초능력이란 말 그대로 일반인의 능력을 넘어서는 어떤 불가사의한 능력을 말한다. 불교에서는 초능력이란 말대신에 신통력이란 말을 사용한다. 신통력은 빠-리어로 iddhi라고 한다.
그럼, 아라한은 영화와 같이 신통력을 사용할 수 있을까? 답은 ‘그렇다.’이다. 영화보다 더 뛰어난 신통력/초능력을 구사할 수 있다. 흔히 재미삼아 ‘깨달으면 신통력이 생긴다’라는 말을 하는데,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신통력에 대한 태도가 우리와 다른 것이고, 신통력의 ‘질(?)’이 다를 뿐이다. 신통력을 얻기 위해서는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성취하여야 한다. 우리는 전호에서 아라한이 될 수 있는 7가지 수행법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7가지 수행법 중 어느 하나의 수행법을 통해 아라한이 된 수행자는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의 경지를 얻게 된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아라한이 된 수행자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있음을 보게 된다.

“번뇌를 없애고, 이미 수행을 완성하고, 해야 할 일을 마치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고, 헤맴의 생존의 속박을 끊어버리고, 완전지에 의해서 해탈했다.”

위의 인용문은 초기경전-남전의 니까-야든 북전의 아함이든-에서 아라한이 된 수행자의 심경을 묘사한 대표적인 문장으로 빈번히 나오는 내용이다. 이를 통해 아라한은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시킨 자이며, 수행의 완성자이며, 생존의 속박을 끊어 더 이상 헤맴이 없는 자이며, 완전한 지혜를 통해 해탈한 자임을 알 수 있다. 이 내용은 또한 석존께서 정각을 이루시고 읊으신 내용이기도 하다. 따라서 아라한과 석존의 깨달음의 상태는 동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완전한 지혜를 통해 해탈한 아라한에게는 특별한 능력(신통력)이 부가적으로 갖추어짐을 경전은 기술하고 있다. 먼저 담마빠다 419게송에는 ‘유정의 죽음과 재생을 완전히 아는 자’라는 표현과, 423게송에는 ‘이전의 거주처를 알고, 하늘과 고통의 세계를 보는 자’라는 표현이 있다. 이는 유정(중생)들의 내생을 알 수 있는 능력과 자신의 전생과 하늘나라와 지옥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묘사한 것이다. 이를 육신통에 배대해 말한다면, 천안통과 숙명통에 해당할 것이다.
그리고 상윳따 니까-야에는 아라한은 삼명(三明, tevijjo)을 갖춘다는 내용이 설해져 있다. 삼명이란 천안명, 숙명명, 그리고 누진명을 말한다. 마지막 누진명이란 자신에게 더 이상 번뇌가 남아 있지 않음을 아는 것을 말한다. 육신통의 누진통에 해당한다. 육신통 가운데 누진통을 제외한 5신통은 불교 이외의 종교전통의 수행자도 얻을 수 있지만, 누진통은 석존과 그 제자들만이 얻을 수 있는 신통력으로 알려져 있다.
바로 이 누진통을 얻어야 윤회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 이외의 수행자들은 누진통을 얻을 수 없기에, 불교의 수행법이 가장 수승함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이렇듯 삼명의 내용은 흔히 우리들이 기대하는 종류의 신통력과는 조금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경전의 기술을 보면, 우리들이 기대하는 종류의 신통력 역시 등장한다. SN. V, p.264에 그 내용이 기술되어 있는데,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비구는 다양한 신통을 즐긴다. (1) 하나를 많은 것으로 만들고, 많은 것을 하나로 만든다. (2)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을 장애없이 지나다닌다. (3) 집의 담을 통과하고, 도시의 담장과 산을 통과한다. 마치 허공을 통과하듯이. (4) 땅 밑으로 들어갔다가 솟아 오른다. 마치 물을 통과하듯이. (5) 물위를 걷는다. 마치 땅을 지나듯이. (6) 가부좌 한 채로 하늘을 다닌다. 마치 새가 날아가듯이. (6) 손으로 해와 달을 만지고 두드린다. (7) 그 몸이 범천의 세계에까지 미친다.”

이 내용을 보면, 요즘 방영되고 있는 미국 드라마 가운데 히어로즈(heros)라는 드라마의 주인공들을 연상케 한다. 벽을 통과하고, 하늘을 날고, 땅 밑으로 사라지고, 물위를 걷는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신통력의 내용들이다. 어렸을 적, 아니 가끔은 이런 생각을 나이가 들어서도 해 보지 않을까? 적어도 필자는 그렇다.
그런데, 이러한 신통력은 어떻게 얻게 되는 것일까. 위에서 인용한 경전에 그 방법이 제시되고 있다. 그 방법은 다름 아닌 ‘팔정도’이다. 팔정도는 불교의 핵심적이면서도 기본적인 수행법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익히 알고 있듯이,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직업(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주의 집중(正念), 바른 선정(正定)이다. 팔정도를 수행한 결과, 부수적으로 얻게 되는 것이 위에서 말한 신통력의 내용들인 것이다. 기상천외하고 초인적인 고통의 대가로 얻어지는 것이 신통이 아닌 것이다. 신통력이란 바른 견해를 갖고 바른 생활을 하며 바른 수행을 하면 보너스로 주어진 것과 같은 것이다.
또한 SN. II, p.121이하에 보면, 유행자 쑤씨-마가 아라한은 모두 신통력을 사용할 줄 아느냐는 질문을 한다. 이에 아라한들은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즉 지혜(위빠싸나)를 통해 아라한이 된 수행자들은 위에서 언급한 종류의 신통력을 사용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다만 정려수행(사마따)을 통해 아라한이 된 수행자들이 신통력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이는 신통력의 유무로 아라한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아라한의 판단 여부는 신통력이 아닌, 오로지 번뇌를 모두 끊어 완전한 해탈을 얻었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에서 인정하는 진정한 신통력이 있다면, 그것은 누진통뿐이다. 누진통을 얻은 자가 아라한이요, 그렇지 못한 자는 아라한이 아니다.

이필원/청주대 강사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