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호스님은 한시대를 풍미한 지성들과 폭넓게 교류했다.

 

독립운동가이자 한학자 정인보(鄭寅普)는 이 분을 일컬어 ‘계행(戒行)이 엄정(嚴正)하신 분’으로 평가했고, 문인 최남선(崔南善)은 ‘통철한 식견으로 내경(內經)과 외전(外典)을 꿰뚫어 보신 분’으로 회고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지성들과의 교유 속에 그들의 극찬을 받았던 인물은 다름 아닌 영호(暎湖, 1870~1948)스님이다.

스님은 1870년 전북 완주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떠돌다가 19세 때 위봉사(威鳳寺)의 금산(錦山)스님에게 출가하였다. 법호는 영호, 법명은 정호(鼎鎬), 시호(詩號)는 석전(石顚)이다. 세속에서는 박한영(朴漢永)이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스님이 수행자의 본분을 바로 잡고 혜안(慧眼)을 연 곳은 백양사(白羊寺) 운문암(雲門庵)이었다. 함명(涵溟) · 경붕(景鵬) · 경운(擎雲) 세 스승과의 만남은 스님의 시 ‘비 속에 눈발 속에’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경인(庚寅)년 봄도 저물어, 운문(雲門)을 찾아 가 환응(幻應)스님 만났네.
한 여름 능엄경을 읽노라고, 쌍계언덕을 내려갈 줄을 몰랐네.
8월에 조계를 건넜는데, 세 노인이 한가하게 앉아 있더군.
경운스님이 웃어른으로, 먹 글씨를 한참들 쓰고 있는데.
제봉(霽峰)과 금봉(錦峰)스님이 마주보고 있고,
재민(在敏)과 찬의(贊儀)스님이 훤출하더군.
쓴 글발이 번지르르 뛰어나더군. (이하 생략)
庚寅春已暮 雲門訪幻師
一夏讀棱楞 不下雙溪陲
八月渡曹溪 三老坐參差
擎雲當座主 俊七列墨池
霽峰對錦峰
在敏及贊儀
以爲法筵首 文質彬一時

스님은 당시에 세 스승을 만나 ≪능엄경≫을 비롯한 여러 경전을 배웠고, 붓글씨에도 관심을 두었던 모양이다. 스님의 어록에 실린 글씨 또한 글발이 번지르르 막힘없이 뛰어나다. 선교일치(禪敎一致)와 3백여 편이 넘는 시를 통해 보여 준 선시일여(禪詩一如)의 기초를 이때 마련한 듯하다.

이후 스님은 1895년 순창 구암사의 설유 처명(雪乳處明)스님의 문하에서 수행하여 전법제자가 된다. 스승 설유스님은 조선 후기 선교양종(禪敎兩宗)의 고승으로 추앙받는 백파 긍선(白坡亘琁,1767~1852)의 법맥을 계승한 제자다. 백파스님이 동시대의 석학 추사 김정희(金正喜)와 서신으로 오고 간 삼종선(三種禪)에 대한 논쟁은 이후 1백여 년 동안 불교계 공통의 화두가 되기도 하였다. 백파스님 문하의 선교일치(禪敎一致) 가풍은 스님에게도 전해졌다.

스님은 “선가(禪家)에서 종(宗)으로 삼는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말은 친히 조사(祖師)께서 말한 바가 아니라 선가의 한 유파(流派)의 공안이었다가 세월이 흘러 무식한 무리들의 호신부(護身符)가 되고 졸렬함을 감추는 큰 일산(日傘)이 되고 말았다.”고 하였다. 역대 조사나 선사들도 한동안 경전을 탐독하였다 하여 선 일변도의 수행풍토를 엄중하게 경계하신 것이다. 스님은 교학을 기반으로 대흥사 · 백양사 · 범어사 · 법주사 등에서 대법회를 열어 불법을 강론하셨다.

한편 당시 불교계의 강사에게도 준엄한 일침(一針)을 가하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교만과 게으름 등 5개 항목에 걸쳐 강도 높은 비판과 함께 가르침을 주신 것이다. 요컨대 얕은 지식으로 불법의 높은 경지를 맛보지 못하고, 게으르고 산만하여 천하 일이 제대로 이루어짐을 보지 못한 것은 마치 눈 먼 노새무리를 이끌고 캄캄한 구렁 속을 향하여 가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스님의 만년은 인재양성과 포교의 현대화로 귀결된다. 1916년에는 불교중앙학림에서 후학양성을 위해 강의를 시작하였고, 1926년에는 개운사에 불교전문학교를 설립하였다. 청년불자의 양성은 삼보(三寶)를 이루는 기초라는 평소의 신념을 실천한 것이다. 특히 불교전문학교의 설립은 불교뿐만 아니라 국학(國學)의 진흥에도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정인보 · 최남선 · 이광수 · 오세창 · 홍명희 · 안재홍 · 김복진과 같은 당대의 지성들이 영호라는 거목(巨木)의 그늘로 몰려들었다. 뿐만 아니라 청담과 운허스님과 같은 큰스님들도 스님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는 이승을 뜰 때까지 스승에 대한 깊은 사랑을 다음과 같이 읊기도 했다.

나보고 천수염불을 외워 보라더군.
콩밥 먹여 재울만한 진짜인가를
시험해 보자는 속셈이었지 뭐.
거기 통과하고 나니 좁쌀밥 대접인데
이런 밥이 특미인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지.
우리 석전(石顚)스님은 용하시여.
이런 맛을 두루 알아차리시고
걸어가며 골고루 맛보게 하셨으니. (이하 생략)

스님은 미당이 구도의 열병을 앓고 있었던 20 전후의 몇 해 동안 자비로 이끌어 준 은사이자 또 한 분의 아버지였다고 술회했다. 미당은 환속한 이후에도 스님이 지닌 도력(道力)의 청정(淸淨)하고 호연(浩然)함을 흠모했다고 한다. 여하튼 당대의 지성들은 암울한 시대의 지적 허기와 평안을 스님에게서 발견하고자 했다.

스님은 1913년 해동불보(海東佛報)라는 잡지를 발간하여 불교혁신을 중심으로 한 대중적 포교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불교의 깊고 넓은 범위는 이치를 갖추지 않은 바가 없지만 당시의 사정은 불교와 세계에 대한 생각은 부질없는 망상만 일으키고 있을 뿐이며, 명예와 이익에 골몰하여 통탄할 뿐이라고 하였다. 스님은 포교하는 사람은 자비와 지혜, 원력 이 세 가지를 반드시 갖추어야 하고 자기를 버리는 일을 강조하였다. 또한 미신(迷信)을 타파하고 지혜와 믿음으로 실학(實學)을 실천케 하는 포교로 중생을 이롭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스님의 이러한 생각은 만해스님과 함께 진행한 불교유신운동(佛敎維新運動)으로 표출되기도 하였다.

온전히 배우고 익히는 일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세상에 제대로 펼치는 일은 더욱 힘들다. 그릇 큰 사람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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