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품은 열반의 삼덕을 이해하는데 있어, 사상(四相)을 밝혀서 반야덕을 이해하도록 하고, 삼밀(三密)을 밝혀서 법신덕을 이해하고, 백구(百句)를 밝혀서 해탈을 이해하도록 한다.

사상(四相)이란 열반의 뜻을 네 가지로 열어보인 법문으로, 부처님의 교법이 진실하고 상주함을 밝혀서 반야덕을 이해하도록 하였다. 이번호에는 이어서 나머지 두 가지덕 부처님의 법신이 영원하며, 부처님의 해탈의 덕이 상(常)·락(樂·아(我)·정(淨)임을 밝힌다.

먼저 여래의 몸에 대해 밝힌다. 여래는 비밀법장을 얻어 그 몸이 법신(法身)의 덕으로 장엄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께서는 사바세계에서 생로병사의 모습을 보이셨고, 팔상성도(八相成道)를 나타내셨다. 그렇다면 어떻게 여래가 번뇌의 바다를 건넜다고 할 수 있겠는가.

곧 경에서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미 번뇌의 바다를 건넜노라’하셨으나, 부처님께서 만일 번뇌의 바다를 건넜으면 무슨 인연으로 야수다라를 맞아 라후라를 낳으셨습니까?”라고 의문을 제기한다.

이에 대해서 부처님께서는 먼저 대열반에 주(住)하고 있어서 여래의 한량없는 신통변화를 나타낼 수 있다고 한다. 곧 보살마하살이 만일 대열반에 머물면 수미산과 같이 높고 넓은 산이나 삼천대천세계와 같이 한량없는 세계를 모두 가져다가 겨자씨 같은 작은 티끌 속에 넣어도 넉넉하여 그 속에 의지하여 사는 중생들이 비좁지도 않고 가고오는 줄도 몰라 전과 같이 변동이 없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보살마하살이 대열반에 머물면 삼천대천세계를 몽땅 들어서 오른 손바닥에 놓기를 요, 옹기장이의 물레와 같이 하며, 또한 시방의 한량없는 삼천대천의 제불세계를 자기의 몸에 넣더라도 그 속에 사는 중생들은 비좁지도 않고 가고오는 것이 본고장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여래는 대열반에 주하고 있어서 우리 중생들이 헤아릴 수 없는 무량한 신통변화를 나타낼 수 있으니 여래께서 애욕을 가까이하여 라후라를 낳은 일이나, 생로병사나 팔상성도의 모습은 모두 여래의 비밀법장에서 나오는 방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욕심과 애욕에서 행하신 것이 아니라 중생을 교화하기 위한 방편에서 보이신 모습이라는 것이다. 부처님이 몸소 보이신 것은 신체에 구현되어 있는 부처님의 비밀법으로, 이것을 곧 법신의 덕이라 한다.

부처님은 삼천대천세계에서나 혹은 염부제에서 열반에 듦을 보이지만 끝까지 열반에 드는 것이 아니며, 혹은 염부제에서 어머니에 탁태하여 사람들이 아들을 낳았다고 하지만 부처의 몸은 언제나 애욕이 화합하여 생기는 것이 아니다. 부처는 한량없는 옛적부터 애욕을 여의었으며, 부처의 몸은 열반에 들어있는 법신의 몸이지만, 세상을 따르느라 태중에 들고 염부제의 룸비니에서 태어나고 일곱 걸음을 걸었고, 대소변을 보고 숨쉬는 모습을 보였으며, 라후라를 낳았고, 세간의 쾌락을 받았고, 출가하여 도를 닦는다고 하였으며, 염부제에서 열반에 든다고 하였다.

그러나 실로 여래는 항상 머무는 법이며 변역하지 않는 법으로 이러한 대열반은 부처님 법계라고 한다. 다만 중생들을 위하여 세간에 나고 출가하고 아뇩보리를 이루고 열반에 들었다고 하는 것이다.

여래는 염부제에서 질병겁이 일어나 많은 중생들이 병이 걸렸으면 먼저 약을 주고 뒤에 법을 말하여 위없는 보리에 머물게 하듯이, 제법이 항상하다고 하는 이에게 무상하다는 생각을 말하고, 오욕락에 탐착하여 생사고해의 세상을 낙이라고 억측하는 사람들에게 괴롭다는 생각을 말하며, 이 몸에 영원한 나가 있다고 집착하는 사람에게 무아라는 생각을 말하고, 나와 내가가진 부귀영화가 청정하다고 생각하는 이에게는 부정하다는 생각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래는 법기(法器)여서 세간의 무상한 몸이 아니요, 온갖 법 가운데 열반은 항상하며, 여래는 이 법을 깨달아 세상의 모든 진리를 체달하였으므로 항상하다고 한다.

다음으로는 부처님 해탈의 덕을 밝힌다.

부처님의 비밀장이라는 것은 중생들이 깨달아 알아야할 비밀의 말씀이 있을 뿐 여래가 따로 숨겨둔 비밀한 장(藏)이 있다고 하였다. 마치 환술장이가 만든 나무인형과 같아서 구부리고 펴고 내려다보는 것을 사람들이 보지만 그 속에서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한다. 부처님법은 그렇지 아니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모두 알게 하신다. 이같은 해탈의 덕을 7가지 비유와 장자교자(長者敎子)의 비유, 용왕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자세히 많은[百句] 비유로 밝힌다.

7가지 비유란 여래의 비밀장은 첫째 허공에 뜬 보름달과 같이 환히 드러나며, 한량없는 금 은 보배를 아끼지 않고 보시하여 중생을 구제함과 같으며, 불구자가 자신을 보이지 않으려 하지만 여래는 자신의 법을 모두 보게 하며, 가난한 사람이 빚을 지어 숨지만 여래는 중생을 외아들과 같이 여겨 위없는 법을 연설하며, 재물이 많은 장자가 외아들에게 모든 재물을 보임과 같으며, 세상 사람들이 남근 여근을 옷으로 감추지만 여래는 근이 없어 감추지 않음과 같으며, 바라문의 논리는 찰리나 수타에게 듣게 하지 않으며 여래의 바른 법은 처음과 중간과 끝까지 훌륭하여 비밀한 장이라 하지 않는다.

다음으로 장자교자의 비유란 어떤 장자가 외아들을 두었는데 항상 사랑하고 염려되어 스승에게 보냈다가 빨리 학업을 성취하지 못할까 염려되어 도로 데려다가 반자교(半字敎)만을 가르치고 성명론(聲明論: 산스크리트어 vyākaraṇa 바라문교에서 가르치는 문법학, 또는 그에 대한 문헌. 여기서는 여려운 공부의 뜻)이나 방등경 대승경을 가르치지 않음을 말한다. 그러나 여래는 대승의 지헤가 없는 성문들에게는 반자교를 설하고 다음에 성명론을 설한다는 것이다.

용왕의 비유란 여름에 큰 구름과 우레가 일어 큰비가 오면 농부들이 씨를 심은 자는 많은 수확을 거두고 심지 않은 자는 거둘 것이 없음과 같아서 이는 용왕의 허물이 아니고 감추는 것이 있기 때문도 아니다. 여래도 이와 같아서 대열반의 큰 법비를 내려 중생들로 하여금 선근의 씨를 심은 이는 지혜의 열매를 거두고 선근의 씨를 심지 않는 이는 거둘 것이 없음이니 이는 여래의 허물이 아니고 여래가 감추는 것이 아니다.
이와같은 여래의 해탈은 번뇌의 때를 모두 여의어 청정하고 안온하며 근심과 두려움이 없는 참해탈이며, 몸이라 할 것이 없는 법신이며, 귀의할 곳 등의 광대한 덕을 갖추고 있다.

이기운/불교학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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