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은 예로부터 인간에게서 공포를 몰아내고 인간을 주인으로 세운다는 목표를 추구해 왔다. 그러나 완전히 계몽된 지구에는 재앙만이 승리를 구가하고 있다.
—M. 호르크하이머, T. 아도르노, 《계몽의 변증법》

1.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다?

중세의 숨막힐듯한 질곡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킨 건 이성이었습니다. 이성은 과학적이며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힘입니다. 진리는 과학의 검증을 거쳤고, 제도는 합리적으로 재편되었습니다. 중세적 몽매로부터 깨어난 근대의 선각자들은 사람들에게 이성을 믿고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라고 외쳤습니다. 그게 계몽입니다. 근대 계몽주의는 진정 우주의 주인은 신이 아닌 인간이며, 인간계의 주체는 왕이 아닌 ‘나’임을 천명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프랑스 대혁명에 이르러 계몽주의는 위대한 결실을 맺게 됩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자유롭게 태어났다”는 인권선언이야말로 인간이성의 개가요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찬란한 계몽의 시대 끝자락에 검은 먹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나치 치하의 독일에서는 600만의 유대인이 그냥 살해당했습니다. 그들의 시신은 가발로 비누로 재생되었습니다. 스탈린 독재하의 소련에선 약 2천여만 명이 정치범 수용소에서 추위와 굶주림 속에 강제노역에 시달리다가 죽어갔습니다. 제도는 결코 합리적이지 못했고, 과학은 대량살상무기가 되어 인간에게 되돌아왔습니다. 이 새로운 야만의 시대를 접하며 개개인은 무기력하게 바라만 볼 뿐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참 어이없습니다. 20세기 초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의 탄생은 계몽주의의 완성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바이마르헌법은 ①국민주권주의 ②보통•평등•직접•비밀•비례대표의 원리에 의거한 선거 ③의원내각제 ④약간의 직접민주제를 명문화한 헌법으로 여기에 최초로 소유권의 사회성과 재산권행사의 공공성을 규정하고, 인간다운 생존을 보장한 헌법이었습니다.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며, 국가는 국민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여야한다는 현대 민주 복지국가의 틀이 갖추어진 선진적인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훌륭한 체제는 단명으로 끝나고 맙니다. 1919년 탄생한 바이마르 체제는 1933년 히틀러가 독일 수상으로 취임하면서 사라집니다. 15년에 걸쳐 진행된 바이마르 공화국은 실패로 귀결되고, 이 체제가 구현코자했던 자유•민주•복지주의 이념은 정반대쪽 전체주의로 대체되었던 것입니다.

당시의 독일인들은 바이마르체제를 매우 혐오했습니다. 이해합니다. 너무도 살기 어려웠기 때문이지요. 히틀러가 등장하기 직전까지 독일의 인플레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1919년 말에 빵 1㎏의 가격은 80페니히였으나 1922년 말에는 이미 163마르크에 달하고, 1923년 10월에는 17억 5천만 마르크, 연말에는 무려 3990억 마르크에 달했습니다. 독일의 마르크화는 휴지 조각만도 못하였습니다. 화폐는 불을 지피기 위한 불쏘시개로 사용되었습니다. 물론 원인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와 그에 따른 천문학적인 전후배상비가 첫째 이유입니다만 바이마르 공화국을 이끌고가던 정치지도자들의 분열과 무능을 탓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증오가 히틀러에게 총통이라는 전권을 부여한 이유일까요?

2. 자만과 증오의 정치학

히틀러의 전략에는 두 가지 극단이 공존합니다. 증오와 애정은 나치가 집권하고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중요한 전략입니다.

“오늘날 이 지상에서 찬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과학•예술•기술•발명 등은 다만 소수의 민족, 아마도 원래는 한 인종의 독창적 산물일 뿐이다.” -히틀러, 《나의 투쟁》

▲ 나치의 만행을 증명하는 사진.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이처럼 주장하면서 게르만 족의 우수성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유대인에 대한 증오를 증폭시킵니다.

“유대인은 다른 민족의 체내에 사는 기생충일 뿐이다.”

유대인을 기생충에 거짓말쟁이로 몰아가는 저들의 전략은 군국주의하에서의 일본이 중국인을 가리켜 버러지라고 했던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타민족에 대한 증오심은 자민족을 향한 지고한 애정과 병행할 때 증폭됩니다. 6백만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불과 한 달 보름 만에 30여만 명을 지독히 잔인한 방법으로 학살한 난징대학살은 단순한 증오심에서만 나오는 게 아닙니다. 인종차별주의는 반드시 자민족우월주의를 배경으로 합니다.

“아리아 인종은 지적 능력보다는 오히려 자기 능력의 일부를 사회를 위해 기꺼이 바치는 점에 있어서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이다.”

히틀러가 말하는 아리아 인종은 인도유럽문명을 창조한 민족을 가리킵니다. 유럽문명에 대한 강한 우월의식 속에 그 문명의 창조자로 아리안족을 말하고, 아리안족에서도 게르만족이 가장 우수하다는 주장이지요. 히틀러는 이렇게 자민족의 우수성을 말해놓고 그 우수성의 특징으로 사회와 국가에 대한 헌신과 희생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민족우월주의는 애국주의로 이어집니다. 애국주의는 편협한 민족주의를 먹고 자라납니다. 안으로는 자민족에 대한 사랑이 지극할수록, 밖으로 타민족에 대한 증오도 비례하여 증폭됩니다. 그리하여 “독가스로 그 타락한 히브리 민족(유대인)을 1만 2천 명 내지 1만 5천 명 정도만 죽일 수 있다면, 전선에서 수백만 명이 희생된다고 해도 헛된 일은 아니다”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이 애국애족이라는 탈을 쓰고 횡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치 독일의 증오는 집시를 향하고 공산주의자들을 겨냥하였습니다. 집시는 본래 유랑족이다 보니까 그들의 권리를 대변해줄 국가도 단체도 없었습니다. 나치 치하에서 그들은 그냥 씨가 말라갔습니다. 이념적으로는 공산주의자들이 타겟이었습니다. 국가소멸론을 주장하며 평등사회를 추구한 공산주의를 국가에 대한 헌신과 절대적 복종을 기치로 내건 나치가 용납할 수는 없겠지요. 또한 동성애자와 같은 사회적 소수자들도 전체주의의 완성을 위해서는 희생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3. 대중선동의 심리학

국가와 민족에 대한 맹목적인 애정과 타민족이나 다른 이념, 혹은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무차별적 증오를 한데 버무려 위대한 지도자 히틀러가 탄생합니다. 여기에 선전•선동은 매우 중요한 전략이며, 이 프로파간다를 진두지휘한 사람이 괴벨스입니다.

“승리한 자는 진실을 말했느냐 따위를 추궁당하지 않는다.”

나치의 선전장관이었던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의 말입니다. 거짓은 승리를 얻기 위한 중요한 수단입니다.

“선동의 제1의 가치는 거짓말이며, 거짓말도 백번 반복하면 진실이 된다.”

▲ 나치의 선정장이었던 괴벨스.
참 아이러니한 것입니다. 히틀러는 유대인을 절멸시켜야할 이유 중의 하나로 거짓말을 들었습니다. 유대인의 거짓말은 타고난 본성이라고요. 그런데 그 누구보다 히틀러를 존경했기에 그를 신의 경지로까지 끌어올린 일등공신의 입에서 거짓말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니까요. 나치의 거짓말은 지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고, 유대인의 거짓말은 생존을 위한 수단인 게 차이인가요? 아닙니다. 진짜 차이는 나치의 거짓말은 정말로 거짓말이고, 유대인의 거짓말은 나치에 의해 덧씌여진 거짓말입니다.

괴벨스는 선전•선동의 탁월한 기획가이며 그 자신이 뛰어난 연설가이자 행동가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계획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라디오에 주목합니다. 당시로써는 첨단의 미디어였지요. 그는 자신의 입이 되어주기 위해 라디오를 매우 싼 값에 대량으로 보급했습니다. 그리고 그 화려한 연설이 연일 독일인의 귀에 울리도록 하였지요. 물론 연설이라고 하면 히틀러 또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람이지요. 라디오를 독일 각 가정마다 보급하면서, 한편으론 비판적인 언론에 대한 탄압과 회유가 진행되었습니다.

1930년대 독일 나치당 선전국은 언론·방송·영화·연극·선전 5개 분과를 단일한 대규모 조직 내에 통합해 영향력을 행사했다. 괴벨스는 선전을 창조적 과정으로 미화했으며 “언론은 정부의 손 안에 있는 피아노가 되어 정부가 연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괴벨스는 언론을 프랑스 혁명에서 터져 나온 계몽정신의 산물이자 자유주의적 도구로 파악했으며, 신문을 ‘부패의 전령’, ‘몰락의 인도자’로 표현하며 정부의 언론 장악을 정당화했다. - ‘괴벨스, 대중선동의 심리학’ 서평, 미디어 오늘, 정철운기자의 글

4. 2013년 대한민국의 언론

신문, TV, 영화, 광고 등등의 미디어는 우리들의 눈과 귀를 끊임없이 자극합니다. TV에 나오고 신문이 기사화하면 거짓말도 진실이 되는 시대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는 사실에 대응한다고 하였지만 따져보면 세계는 우리가 보는 대로 보이고 사고하는 대로 드러납니다. 언어가 사실을 반영하는 게 아니라 언어에 의해 사실이 구성됩니다.

이러한 메커니즘을 그 누구보다도 정확히 꿰뚫고 있던 사람이 바로 히틀러이고 괴벨스였습니다. 그들은 세상은 사람들이 믿는 대로 보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나아가 사람들의 생각을 어떻게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는지도 너무 잘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나치의 선전•선동술에 독일 사람들은 취했고, 그 집단적 광기가 홀로코스트를 낳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2013년, 대한민국의 눈과 귀는 어떻게 열려 있나요? KBS, MBC, SBS 등의 지상파방송은 물론, TV조선, 채널A, JTBC, MBN의 종편채널에 YTN, 뉴스Y 등의 뉴스전문방송까지 전부 보수언론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신문은 어떤가요? 이르바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보수언론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언론사를 통털어 한겨레신문과 경향신문만이 진보좌파로 분류될 뿐이며, 그나마 이들의 보급력은 매우 미미한 형편입니다. 결국 21세기 대한민국의 눈과 귀는 사실상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제 보수주의자들은 마지막 비상구인 인터넷 포털도 자신의 통제력 아래에 두려고 할 겁니다.

보여주어야 할 것을 안 보여주기, 안 보여줘도 될 것을 계속해서 보여주기, 국민들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기,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게 하기, 치고 빠지기, 물타기 등등의 언론형태는 일찍이 괴벨스가 그 효과를 입증한 탁월한 전략이었습니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바뀌어 성공한 민주주의 국가라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이러한 언론전략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다른가요? 아직도 김대중, 노무현 두 대통령을 빨갱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주위에는 너무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빨갱이를 지도자로 모셨다는 말인가요? 의견이 다르다고 좌빨로 모는 행태, 결국 5•18 광주민주화운동까지도 북한특수부대의 침투에 의한 것이라는 뻔한 거짓말이 버젓이 종편채널에서 방영되는 이 순간이 도대체 나치 독일과 다를 게 무엇인가요? 그래서 두려운 것입니다. 나치집권시기에 독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고, 그 종국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우리는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대한민국이 두려운 것입니다.

히틀러같은 독재자가 나오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나 보수정당에 의한 장기집권은 가능할 것입니다. 일본처럼 말이지요. 그리고 이것이 그들 보수우파의 전략은 아닐런지요? 일본은 아사히신문 계열의 미디어사를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이 보수신문, 보수방송국들입니다. 요미우리를 비롯한 대부분의 신문이 그렇습니다. 일본은 그나마 아사히신문의 영향력이 작지 않고, 최대 공영방송인 NHK가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는 편입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민당의 장기집권이 가능한 이유 중에는 현저히 우경화된 언론이 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서유럽이나 미국의 언론매체가 비교적 보수와 진보가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과는 매우 큰 차이이지요. 그런데 21세기 대한민국의 언론기상도는 일본보다도 훨씬 더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폐해를 이제 느끼기 시작했고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용수(龍樹)의 팔불설(八不說)

팔불설은 《중론(中論)》에서 설해진 여덟 가지 부정론(否定論)입니다. 이른바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항상하는 것도 아니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며, 한결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며, 가는 것도 아니고 오는 것도 아니다.[不生不滅 不常不斷 不一不異 不去不來]”입니다.

나가르주나의 《중론》은 시종일관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로 점철되다시피 합니다. 그리고 이런 부정론은 이미 살펴본 것처럼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계를 실상 그대로 보지 못하는 이유는, 실상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은폐되고 왜곡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은폐와 왜곡을 깨부수기 위해 나가르주나는 치열하게 부정하는 것이지요. 팔불설의 구체적인 내용이 어떤 건지는 전문 불교학자에게 맡겨도 좋습니다. 우리는 다만 나가르주나가 그토록 치열하게,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 팔불설을 제창하여야만 했던 까닭을 이 시점에서 환기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아들딸들이 앞으로 살아갈 대한민국이 적어도 전체주의 시대의 독일이나, 자민당 장기집권하의 일본처럼 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독일은 가장 민주적인 제도를 만들어 놓고 전체주의로 후퇴했습니다. 그리고 21세기 대한민국은 민주주의가 어디로 후퇴하는지조차 헤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니라고 말하여야 합니다. 침묵은 동조와 다를 게 없습니다. 유대인 학살에 가담했던 독일인들이나, 난징대학살에 참가했던 일본인들은 그들이 죄악을 범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민족적 우월감과 자부심에 기생충을 절멸시키고, 버러지를 제거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구 이들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을 심어놓았는지를 잘 생각하여야만 합니다.

맨 처음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을 잡으러 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므로
다음에 그들은 유대인을 잡으러 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유대인이 아니므로
다음에 그들은 노조원을 잡으러 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노조원이 아니므로
……
다음에 그들은 나를 잡으러 왔다.
그리고 그 때엔 나를 위해 말해줄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치의 종교정책에 저항하다가 집단수용소에 수감되었던 마르틴 니묄러(Martin Niemöller) 목사의 〈그들이 처음 왔을 때〉란 시입니다. 나와 나의 아들딸들이 그들에게 잡혀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용수보살의 치열한 구도의 정신이 절실한 때입니다.

김문갑/철학박사,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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