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말은 <열반경>에서 비롯됐습니다. 옛날 인도 어떤 왕이 장님 여섯 명을 불러 손으로 코끼리를 만져보고 각기 자기가 알고 있는 코끼리에 대해 말해보도록 하였습니다.

상아를 만진 장님은 무같이 생긴 동물이라고 하고, 귀를 만졌던 장님은 곡식을 까불 때 사용하는 키같이 생겼다고 우기고, 다리를 만진 장님은 절구공이같이 생긴 동물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코끼리 등을 만진 이는 평상같이 생겼다고 우기고, 배를 만진 이는 장독같이 생겼다고 주장하고, 꼬리를 만진 이는 굵은 밧줄같이 생겼다고 외쳤습니다.

다들 자신이 만진 것을 코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장님으로서는 당연한 결론입니다. 자신이 아는 것을 바탕으로 진리를 유추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러나 진실은 어떻습니까? 장님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영화 <엘리펀트>(미국, 2004)는 위의 우화에서 제목을 빌어 왔습니다. 영화는 미국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던 사건, 1999년 컬럼바인 고교의 총기난사 사건을 소재로 했습니다. 앞서 마이클 무어 감독이 <볼링 포 컬럼바인>에서 다큐멘터리 형식을 통해서 콜럼바인 총기사건의 맨얼굴을 보여줬다면 구스반산트 감독은 이 사건을 소재로 삶과 죽음이라는 인간존재의 근원적인 문제에 접근했습니다.

우화에서 왕이 여섯 명의 장님에게 코끼리를 만져보고 코끼리에 대해서 말하게 하였던 것처럼 영화에서는 12명의 아이들을 쫓아다니면서 죽음의 징후와 이유를 찾습니다. 영화는 알렉스와 에릭이라는 왕따 소년들이 총기로 무장한 채 학교로 들어와 무차별 폭력을 행사하기 전의 16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사고로 학생 12명과 교사 한 명이 죽었습니다. 죽기 전 16분을 통해 죽음의 예측 가능성이나 필연성 등을 찾아내고자 했으나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고도 결코 코끼리를 몰랐던 것처럼 감독 또한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습니다. 죽음은 인간 인식 밖의 영역이었던 것입니다.

영화는 맑은 가을 하늘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쪽빛 하늘엔 하얀 구름이 흘러갑니다. 모였다 흩어졌다, 모양을 바꿔가며 흐릅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밤이 찾아오고 하늘은 검은 빛으로 변합니다. 그리고 다른 날이 찾아오고, 학교 운동장에서 달리기를 하던 한 소녀가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여전히 하늘은 쪽빛이고, 양털구름이 낮게 깔려 있습니다.

오프닝은 꽤 길었습니다. 분명 감독이 하고자 하는 말이 실려있는 시퀀스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 소녀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채 지워지기도 전에 소녀는 죽기 때문입니다.

오프닝 다음으로 영화에서 눈여겨봐야 하는 것은 롱테이크와 ‘들고 찍기’로 촬영한 아이들의 뒷모습입니다. 뒷모습은 집요하고 불안하게 보입니다. 뒷모습과 함께 베토벤의 <월광소나타>와 <엘리제를 위하여>라는 음악이 흐릅니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묵묵히 걷고 있는 뒷모습,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긴 복도를 따라가며 아이들의 뒷모습을 끈기있게 담아내고 있는 카메라, 장차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지르는 지도 모른 채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고 있는 소년의 뒤통수, 단조롭다면 단조로운 장면이지만 베토벤의 음악과 어울려 시적인 장면을 연출해냅니다.

그런데 영화에서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서 보여주었던 뒷모습은 나중에 알렉스와 에릭이 하는 게임화면에서 다시 만나게 됩니다. 영화에서처럼 뒷모습을 보이면서 사람들이 어딘가로 가고 있고, 그 뒤를 총구가 겨누고 있습니다. 물론 발사 명령을 내리는 것은 알렉스와 에릭이고요. 알렉스와 에릭의 손동작 하나로 게임 속 사람들은 고꾸라지면서 죽어갑니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카메라가 불안한 모습으로 아이들의 뒤를 따라가는데 그런데 얼마 후 아이들은 게임에서처럼 알렉스와 에릭이 쏜 총을 맞고 죽습니다. 그런데 게임 속 아바타를 죽인 것은, 총구를 움직인 또 다른 아바타가 아니었습니다. 그 아바타에게는 어떤 의지도 없습니다. 알렉스와 에릭이라는, 보이지 않는 존재에 의해 아바타는 움직일 뿐이었지요.

게임에서와 마찬가지로 아이들의 목숨도 알렉스와 에릭에 의해 빼앗긴 것이 아닙니다. 알렉스와 에릭은 게임의 또 다른 아바타에 지나지 않습니다. 알렉스와 에릭으로 하여금 총을 쏘게끔 명령한 다른 존재가 분명 있습니다. 카메라가 쫓는 아이들의 뒷모습 속에서 다른 존재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조롱’이 담긴 시선이었지요. 이제 16분 후면 죽을 운명인데 그것도 모른 채 애인을 만나러 가는 걸음에 다른 여자도 한 번 돌아보는 여유, 죽는 순간에도 죽는 줄 모르고 카메라를 들이대는 방심, 이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에 대한 비웃음이 느껴졌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을 조롱하는, 현실이라는 화면 밖의 존재는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게임을 하던 알렉스와 에릭이기도 하고, 오프닝 후 바로 등장하는 존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술 취한 채 운전하다가 다른 집 화단을 들이받기도 하는 사람, 그러니까 그 존재에게 합리성이나 선한 의지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우린 이 이상한 존재가 운전하는 차안에 갇힌 불쌍한 존재일 뿐입니다. 우리 운명은 어떻게 되냐고요?

미셸의 죽음은 참 어이없었습니다. 오프닝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던 소녀가 바로 미셸입니다. 학교에서 미셸은 없는 사람 취급 받았습니다. 뚱뚱한 다리를 가리기 위해 늘 긴 바지만 입는 미셸이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을 때 다른 소녀들은 그녀가 앞에 있는데도 대놓고 ‘멍청이’라고 욕하지만 미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묵묵하게 자기 할 일을 하고는 다음 목적지인 도서관을 향해 뛰어갑니다. 도서관에 도착해서 책을 정리하는 순간 알렉스와 에릭이 들어오고 미셸은 첫 희생자가 됩니다.

미셸은 가해자들에게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고, 또한 그들과 마찬가지로 학교생활이 불행했었는데 그런데도 미셸이 가장 먼저 죽은 것입니다. 술 취하지 않았다면 결코 만들 수 없는 설정입니다. 죄 없는 자의 불행은 그리고 나약한 자의 불행은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인 것이지요.

게임에서 다른 아바타를 넘어뜨린 것이 또 다른 아바타가 아니라 알렉스와 에릭이었던 것처럼 영화를 통해서 보면 에릭과 알렉스의 처지 또한 게임 속에서 총을 잡고 있던 다른 아바타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카메라는 에릭과 알렉스의 뒤를 쫓아가지만 그들에게서도 뚜렷하게 살인의 동기를 찾기 어려웠으니까요.

알렉스는 피아노 앞에서 베토벤의 음악을 연주했으며, 에릭은 컴퓨터 게임을 하다가 책을 읽었습니다. 그러다 총기를 구입했는데, 그 모습은 너무나 즉흥적이었습니다. 갑자기 생각난 일을 처리하는 것처럼 심드렁했습니다. 끔찍한 재앙의 필연적인 이유는 없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범행의 핵심에 왕따문제를 거론하지만 영화는 이 견해에 반기를 들기 위해 범행의 첫 번째 희생자로 왕따 소녀 미셸을 지정했던 것입니다. 왕따가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영화를 통해본 죽음의 모습은 예측 불가능할 정도로 제멋대로였습니다. 피살자를 선택하는 기준도 제멋대로였고, 또한 피살자들에게 조금의 단서도 주지 않을 정도로 불친절했습니다.

감독에 의하면 우리 처지는 카메라 앞에서 뒤통수를 보이며 걷던 아이들과 다름없고,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의 결정권자는 게임을 즐기던 소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존재, 술 취한 듯한 그 누구인 것입니다. 미셸이 올려다보던 하늘에 혹시 있는지 모르는 그 존재인데 그 존재는 술 취한 남자처럼 제 정신이 아닌 것이고, 그래서 우리의 처지가 참 가여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열두 명의 아이들을 쫓아다니며 삶과 죽음을 지켜본 감독이 죽음에 대해 내린 결론입니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죽음은 무엇일까요? 영화에서 보여준 것처럼 제멋대로이고, 술 취한 남자처럼 통제 불능이고, 갑작스런 것일까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에서 노 선사는 빠진 이를 버리는 퍼포먼스 정도로 죽음을 이해했습니다. 불교는 죽음의 원인이나 형태에 집중하기 보다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더 마음을 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죽음을 당하는 자아에 집중했을 때는 영화에서처럼 이해 불가능한 현실에 그 누구를 원망할 수도 있지만 불교에서는 죽음을 맞는 자아가 존재한다는 기본 설정 자체를 부정했습니다. 내가 없다는 걸 알면 죄도 사라진다고 한 것처럼 내가 없다면 죽음도 없는 것이므로 죽음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저 빠진 이빨을 버리는 퍼포먼스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요. 그러니 그저 담담할 뿐입니다.

김은주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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