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

▲ 촛불은 세상을 밝히는 상징이다.
다시 촛불이 켜졌다. 촛불을 들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고, 왜 드느냐는 사람도 있다. 들고 싶어도 못 드는 사람도 있을 테고, 마지못해 드는 사람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촛불이 빨리 꺼지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을 테고, 더욱 활활 타올랐으면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한쪽에서는 촛불이 민심이라고 하고, 다른 쪽에서는 그 나머지가 여론이라고 한다. 촛불이 바람에 흔들리듯이, 사람들의 마음도 갈팡질팡한다.

그러다보니 저마다 세는 촛불의 숫자도 다르다. 수만 명 단위로 들쭉날쭉한 게 예사다. 촛불의 숫자를 세는 마음속에는 민주주의는 곧 다수결이라는 엄혹한 생각이 있는 것 같다. 하나의 촛불은 대수롭지 않고 많은 촛불은 중차대하다는 생각이야말로 민주주의를 슬프게 한다. 다수결은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한 최소한의 그리고 최후의 선택지일 뿐인데도 말이다.

다수결은 본래 직접민주주의, 즉 모든 구성원이 참여하는 과정에 적용되던 원칙이다. 바쁜 현대사회에서는 국민의 대표를 따로 선출해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의사를 대신하게 하는 대의제(代議制)를 택하고 있다. 뜻을 대신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잘 대신할 수 있는지 물을 수 있는 장치는 별로 없지만, 어쨌거나 이미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국민투표와 대통령선거에서 직접민주주의의 절차를 채택하여 모든 국민이 참여한다.

다수결에 의한 결정사항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토론과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따라서 전제가 잘못되면 그 결과는 끝내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지금의 촛불은 이 전제가 성립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제기로 보인다. 투표에 앞서서 토론과 언론의 자유가 과연 보장되어 있었는지, 누군가 혹은 어떤 기관이 이 자유를 방해하지는 않았는지 따져 보자는 것이다.

결국 따져지지는 못할 것이다. 만약 따져봐서 전제가 깨지면 상황은 걷잡기 어렵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전제가 깨지고 나면, 그 전제에서 도출된 결과 또한 무의미해지리라는 것은 논리적 필연이다. 그래서 따질 수 없고, 따져서는 안되는 것이다.

촛불이 세상을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촛불은 언젠가 꺼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 켤 필요가 없어서 꺼질지, 지쳐서 꺼질지, 누가 불어서 꺼트릴지는 알 수 없다. 어쨌거나 촛불을 들 필요가 없다거나 꺼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바꿀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인왕산 중턱까지 들렸다는 아침이슬 노래도, 그 때 이후의 행적을 보면, 사람의 마음을 적시지 못했던 것이 분명한 것처럼 말이다.

세상을 바꾸려면 촛불을 꺼트리지 말아야 한다. 그러려면 저마다의 마음속에 켜야 할 것이다.

【선설禪說】

▲ 법안문익선사 초상화.
공안(公案) 가운데 불(火)과 관련된 얘기가 여럿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법안병정’(法眼丙丁)이다. 법안은 법안종(法眼宗)을 일으킨 중국 송나라 시대의 법안문익(法眼文益, 885~958)이라는 사람이다. 그리고 병정(丙丁)은 갑을병정으로 나가는 십간(十干)의 그 병정이다. 십간에는 저마다 음양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 중에서 병(丙)과 정(丁)은 모두 불(火)에 해당되는데, 양화(陽火)와 음화(陰火)에 속한다. 법안선사가 현칙(玄則)이라는 승려와 주고받은 대화에서 불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법안이 감원(監院) 소임을 맡고 있는 현칙에게 물었다.
-이곳에 머문지 얼마나 되는가?
-3년 되었습니다.
-그대는 후생(後生)으로서 평상시에 어째서 본분사(本分事)에 대하여 묻지 않는가?
-제가 스님을 더 이상 속이지는 못하겠군요. 이전에 청봉(靑峯)선사의 문하에 있을 때 이미 안락한 경지를 얻었습니다.
-그대는 어떤 말로 인하여 깨달았는가?
-언젠가 ‘저의 자기란 어떤 것입니까?[如何是學人自己]’라고 물었는데, 청봉이 ‘병정동자가 불을 구하러 왔구나[丙丁童子來求火]’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좋은 말이기는 하나 그대가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걱정될 뿐이다.
-병정(丙丁)은 불에 속하니, 불을 가지고 불을 구하는 것은 자기를 가지고 자기를 찾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그대가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겠구나. 불법이 이와 같은 것이라면 오늘날까지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에 현칙은 마음이 조급하고 답답하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길을 가던 도중에 ‘법안은 5백 명의 대중을 가르치는 선지식으로서 나에게 틀렸다고 말했을 때는 틀림없이 특별한 뜻이 있을 것이다’라 생각하고, 다시 돌아와 참회하고 용서를 구한 다음 ‘저의 자기란 어떤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법안이 대답했다.
-병정동자가 불을 구하러 왔구나!
현칙은 대답하는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크게 깨달았다.

절에는 많은 대중들이 살다보니 적잖이 일이 많다. 그래서 저마다 소임을 나눠가진다. 그 중에 하나가 감원(監院)이다. 요즘의 총무 같은 역할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병정동자도 소임 중에 하나인데 등화(燈火)를 관리하는 역할이다.

본분사(本分事)는 생사대사(生死大事)라고도 하는데,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혹은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같은 실존적인 물음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출가수행의 도리는 바로 이 물음에서 시작하고 이 물음에서 끝을 낸다. 그만큼 빈틈없이 붙잡고 늘어져야 하는 물음인 것이다. 그리고 후생(後生)은 그냥 요즘의 후배라는 뜻이다.

현칙이라는 승려가 3년 동안이나 아무 말도 없으니 법안선사 보다 못해 질문한 것으로 얘기는 시작된다. 현칙의 대답이 걸작이다. 자기는 답을 이미 알고 있어서 더 물어볼 것이 없다는 반응이다. 깨달음이란 자기가 자기를 찾는 것일 뿐, 별게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니 물어볼 것도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법안선사는 내버려두지 않았다. 부처의 법이 그렇게 쉬운 것이었으면 지금까지 전해질 필요가 있었겠냐고 야단쳤다. 이런 대답 유형을 선가에서는 살(殺)이라고 부른다. 건방진 생각을 한꺼번에 깨버린다는 뜻이다. 현칙은 순간 당혹스럽고, 야속하고,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얼마 후 마음을 가다듬자 다시 물었다.

법안선사는 현칙이 이미 알고 있던 것과 똑같은 대답을 했다. 그러자 현칙은 깨달았다. 답변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자기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얼마나 절실하게 하느냐의 문제이다. 청봉에게 물었던 절실함과 법안에게 물었던 절실함이 다른 것이다. 배워서 묻는 질문이 있고, 우러나와서 묻는 질문이 있다. 바로 그 차이다.

▲ 촛불은 세상의 민심으로도 작용한다.

촛불을 드는 것도 마찬가지다. 들 만해서 드는 사람도 있고, 남들 따라 드는 사람도 있고, 마지못해 드는 사람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촛불이 꺼지지 않게 하려면 마음속에 켜 둘 일이다. 그리고 절실하게 물어야 한다. 내 집값이 오르기를 바라거나 내 집 주위에 장애인 시설이 들어서지 않기를 바라는 그 마음이 촛불을 들고 있는 마음과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촛불은 누구 때문에, 누구의 마음에 의해서 켜져 있는지 줄기차게 되물어야 한다. 그래야 다시는 촛불을 들고 길에 나설 일이 없을 것이다.

박재현/철학박사, 동명대학교 불교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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