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오선사는 확철대오에 이르면, 통밑이 쑥 빠지는 것처럼 통쾌하고 시원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도 걸림이 없는 것이므로 무상대각(無上大覺)이라고 정의하였다. 이제 이 경지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는 지에 대해서 알아볼 차례이다.

선사는 마음을 포함하여 안과 밖이 모두 공(空)하다고 노래하며 인연 없이 일어나는 법은 없기 때문에, 일체행이 무상하여 모든 법이 인연으로 좇아 일어난 줄 알아야 한다고 설파한다. 여기서 선사는 깨침의 당체가 ‘연기적(緣起的) 중도정관(中道正觀)’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다. 선사는 불교의 근본종지이자 존재의 실상을 공[연기‧무상‧무아]으로 함축한다. 그리고 간화선은 이 진리를 당장 이 자리에서 몰록 체화(體化)하거나 환히 드러내 보이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간화선에서 말하는 깨침은 바로 공에 바탕을 둔 반야행이며, 그 반야 또한 연기와 무상‧무아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간화선이 탁월한 수행법인 이유는 바로 이 자리에서 깨달음을 실현하는 데 있지 붓다와 ‘깨침의 경지’가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간화선이란 연기법을 바로 이 자리에서 보여주고 그것을 체험하는 수행법이다.

선사는 “온갖 상이 공으로 돌아가지만 오직 홀로 진심이 밝아진다.”고 노래한다. 따라서 마음 밖에는 산도 물도 없다. 오직 한 점의 영명함인 진심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공적(空寂)하지만 영지(靈知)한 마음을 좇아서 삼계만법이 다 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은 그 자체가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선사는 ‘진공묘유’라고 설파한다.

선사에 의하면 우리의 불성인 마음이 세상을 만든다. 따라서 모든 존재가 불성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연기법에 의거하여, 상호의존하면서, 절대성을 지양하고, 상대성을 지향하면서, 모든 현상은 현상에 대하여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어 이 세계를 만든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모든 존재는 부처일 수밖에 없으며, 그러하기 때문에 도(道)의 현전(現前)이라고 말할 수 있다.

궁극적 깨달음의 세계에서 본다면 현상계의 다양한 현상은 ‘차별’이라는 이름으로 질시하거나 극복되어야 할 사항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모두 도를 함유하고 있으므로 다양성이라는 이름아래 존중되어야 할 ‘차이’가 된다. 왜냐하면 모든 만물이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기에, 부분과 전체, 나와 세계, 생(生)과 멸(滅)은 다양함을 통하여 서로 자랄 수 있고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깨어있음은 ‘더불어 삶’을 의미한다. 모든 것이 인(因)과 연(緣)에 의한 관계로 이루어져 있기에 독립적인 존재는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어느 것이건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존재할 수 없다는 ‘공(空)’에 입각한 존재의 자각은 살아있는 생명으로서의 유기적 전체를 인식하는 일이다. 인간은 다른 인간을 위한 배경이 아니며, 자연 또한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인간과 인간, 자연과 인간은 서로 조화롭게 연결되어 있다. 우주는 하나의 출렁거리는 유기체이며 그 자체 완성된 존재로서 출렁거린다. 따라서 주인도 손님도 없으며, 인간과 자연 모두가 주인이고 모두가 손님이 된다.

선사는 깨친 이의 경계를 ‘일체자유’라고 정의한다. 왜냐하면 법신이기 때문에 이겨 낼 물건도 사람도 없고, 본래 공하였으니 해롭게 할 자가 없으며 세상의 잡식도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말은 깨침의 경계를 공(空), 즉 생각을 하되 생각에 걸림이 없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중생은 생각에 이끌리고 대상에 끄달려 속박된 삶을 살아가지만, 깨친 이는 진정 자유롭고 걸림이 없는 자유의 삶을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온종일 일상사를 여의지 않는 가운데 모든 경계에 미혹되지 않는 대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즉 종일토록 밥을 먹어도 한 톨의 밥알도 씹지 않으며, 종일토록 걷지만 한 조각의 땅도 밟지 않는다.

선사는 “반 칸 작은 집에서도 내 만족함을 알고”라고 하여 깨친 이의 삶이 소욕지족(少欲知足)임을 가르친다. 그런 다음에 “생사에도 무간하니 티끌세상도 싫지 않네.”라고 노래한다. 이것은 선사가 일체법 가운데에 있으면서 그것들로부터 자유롭게 깨어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선사에 의하면 깨침은 현실세계를 부정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번뇌즉열반(煩惱卽涅槃), 다시 말해서 번뇌(煩惱)와 열반(涅槃)의 불이(不二)에 의거하여 적극적으로 번뇌의 세계에서 깨어있음을 전개하는 작용이다. 여기서 우리는 선사가 티끌세상을 번뇌 속에 있으면서 번뇌에 물들지 않으며, 도가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장으로 삼고 있음을 인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이 깨침의 경지는 어떻게 중생에게 회향되어야 한다고 선사는 보고 있을까?

선은 대승불교이다. 따라서 선은 중도‧연기‧무아‧공의 법칙을 증득한 깨침 이후 반드시 대 사회적 실천행인 보살행으로 나아가야 할 당위를 가진다. 그렇기 때문에 선사는 확철대오(廓撤大悟)한 이후에 반드시 회향해서 일체중생을 제도하도록 간곡하게 우리를 타이른다. “병든 자에게는 약풀이 되며, 허기진 자에게는 음식이 되며, 바다를 건너려는 자에게는 배가 되며, 불에 타는 자에게는 물이 되며, …… 마침내는 죽음과 칼, 독약, 화약 등이 올지라도 갖가지의 몸이 되어 막고 보호해야 하리라.”라는 선사의 가르침은 아주 곡진하다.

선사에 의하면 중생에 대한 제도는, “법에 의지하여 부처님의 교시(敎示)를 어기지 말고 어디까지나 심법(心法)으로 몸을 닦으며, 심법으로 마음을 찾으며, 심법으로 한없는 중생을 제도하며, 심법으로 법륜을 정하여 불국토를 이루어야” 만 한다. 이때 그 (심)법이란 ‘하나도 걸림이 없는’, ‘무상대각법문’이다.

이 무상대각법문은 선사에 의하면 연기법을 그 기초로 하고 있다. 깨침은 두 개의 날개를 가진다. 그 하나는 지혜(知慧)이다. 이 때 그 지혜란 반야지로써 인연법에 의해 나와 네가 둘이 아니라는 자타불이(自他不二)의 세계를 증득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자비(慈悲)이다. 자타불이의 세계를 증득함은 곧 우주의 모든 것이 동체라는 자각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동체대비(同體大悲)에 필연적으로 이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비가 온 우주에 가득차면 깨달음에 이른다.”라는 불교적 명제의 성립이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이 명제는 역으로도 성립이 가능해야만 한다. 즉 “깨달음에 이르면 자비가 온 우주에 가득 찬다.”는 선적 명제가 그것이다. 따라서 깨달음과 중생 제도는 반드시 그 궤를 같이 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때 ‘연기적 중도정관’이야말로, 깨침과 지혜를 통섭하는 길이기도, 생사대사를 해결하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기도, 중생을 제도하는 길이기도 하다. 이것이 선사가 설파하는 무상대각법문의 요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사는 “널리 중생을 위하여 도심(道心)을 발하옵니다. 고해의 가운데에 빠진 뭇 중생들이 여러 불법승의 힘과 자비로운 방편으로 인하여 여러 고통을 벗기를 원하옵니다. 큰 서원을 버리지 않고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니, 교화의 힘이 자재하여 제도에 끝이 없으며, 항하사와 같이 무수한 중생들이 정각(正覺)을 이루소서.”라고 발원하는 것이다.

이덕진/창원문성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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