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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용수(龍樹)의 중도사상(中道思想)
현재의 삶을 긍정하면 진여의 문 드러나
2013년 08월 02일 (금) 13:12:41 김문갑 meastree@naver.com

1. 돈이 행복의 조건?

봄에 사촌들과 삼겹살을 구워 먹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행복의 조건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아내는 행복해지려면 얼마간의 돈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폈고, 아내의 주장에 사촌동생이 동조했습니다. 제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돈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가 곧장 반론에 부딪힌 것이지요. 제가 물었습니다.

나 : “지금 너는 행복해질 만큼 돈이 있냐?”
사촌 : “그만큼 없지.”
나 : “그러면 너는 불행하니?”
사촌 : “그건 아니고………”

사촌동생은 분명 행복의 조건을 충족시킬 만큼의 돈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촌은 현재 결코 행복하다고 느끼지는 못합니다.

만약 돈이 행복의 필수조건이라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이건희 삼성회장일 것입니다. 하지만 회장님의 표정에서 행복하다는 느낌을 저는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입만 열면 근심·걱정을 말합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다 망한다.” “일본과 중국 사이에 끼어 일본에 뒤처지고 중국에 쫒기는 신세이다.” 등등… 말씀대로라면, 이 분은 단 하루도 편히 잠자는 날이 없을 것 같습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돈이란 일정 수준을 넘으면 그때부턴 사람을 지배합니다. 돈이 일정 수준을 넘으면 그 돈 가진 사람은 그의 돈을 관리하고 유지하기 위해 노심초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돈의 노예로 전락하는 순간이지요. 투자든 혁신이든, 돈을 유지·관리한다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건 이건희회장님 말씀을 듣다보면 저절로 알게 됩니다. 삼성 같은 세계적인 기업일지라도 언제든 망할 수 있다는 불안이 잠시라도 떠나지 않습니다.
돈은 살인의 동기가 되기도 합니다. 지독한 가난은 자살을 부르고요. 엄청난 부자들이 불안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가난한 사람은 절망에 한탄합니다. 재산을 노린 존속살인, 어느 독거노인의 자살, 가난에 시달리던 가족의 동반 자살…

세상에서 가장 바쁜 사람인양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시간에 얽매여 살아가는 남자 척 놀랜드(톰 행크스 분). ‘페덱스’의 직원인 그는 여자친구 캘리 프레어스(헬렌 헌트 분)와 깊은 사랑을 나누지만 막상 함께 할 시간은 가지지 못한다. 크리스마스 이브, 캘리와의 로맨틱한 데이트를 채 끝내지도 못한 그에게 빨리 비행기를 타라는 호출이 울리고 둘은 연말을 기약하고 헤어지게 된다.

캘리가 선물해준 시계를 손에 꼭 쥐고 "페덱스" 전용 비행기에 올랐는데, 착륙하기 직전 사고가 나고, 기내는 아수라장이 된다. 그의 몸을 때리는 파도. 눈을 떠보니 완전 별세상이다. 아름다운 해변과, 무성한 나무, 높은 암벽. 아무도 살지 않는 섬에 떨어진 것을 알게 된 척은 그곳에서의 생존을 위해 이전의 모든 삶을 버리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외롭게 살아간다. 영화 《캐스트어웨이》 줄거리, 네이버 영화

   
▲ 영화 ‘캐스트어웨이’의 한 장면. “시간은 주님이시다.”
무인도에서의 생활 3년째. 도저히 그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척은 결국 자살을 결심합니다. 목을 매달 줄을 만들고, 자신만한 통나무를 구해 자살실험을 합니다. 실험 중에 줄을 매단 나무가 부러지고…, 그 순간 척은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척이 자살을 결심한 이유는 외로워서 일까요? 무인도라는 절대의 고독이 정말로 견디기 힘들어서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섬길 대상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척은 시간의 노예임을 자랑스럽게 떠들며 다녔습니다. 시간을 섬기라고. 시간은 나의 주님이라고 외치고 가르쳤습니다. 초단위로 쪼개며 시간을 아끼고,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하는 시간조차 미뤄야 했습니다. 그런 척에게 무인도에서의 삶은 시간이 남아도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도 많은 시간, 너무도 한가로운 여유! 데이트할 시간이 너무도 없던 척에게 갑자기 주어진 풍성한 시간은 시간의 노예상태로부터의 해방임에 틀림없습니다. 무인도에서의 시간은 관리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초단위로 쪼개야할 이유도, 주님 모시듯 섬겨야할 가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일순간에 내가 모시고 섬기던 주님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 상실감은 엄청난 부자가, 재산관리인을 따로 고용해야 할 정도인 부자가 어느 날 갑자기 빈털터리가 된 것과 똑같습니다.

스피드 시대에 시간은 곧 돈이고, 돈은 곧 권력입니다. 시간과 돈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권력입니다. 따라서 정밀히 관리하고 세밀히 보살펴야 하는 대상입니다. 재테크니 시테크니 하는 말은 모두 그 관리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시간도 돈도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가장 높은 자리에 계신 주님입니다. 섬기고 봉사해야 하는 주인이지요. 돈은 많을수록, 시간은 적을수록 그 지배력은 배가됩니다. 이런 주인이 무인도에선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숭배의 대상을 잃어버린 척에게 애인의 사진도 배구공 윌슨도 결코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2. 연기를 연기 그대로 보라

인연으로 생겨난 모든 것을 나는 공(空)이라고 설한다. 이 또한 잠시 빌린 이름[假名]으로 또한 중도(中道)이다. 《중론(中論)》 : 衆因緣生法, 我說卽是空, 亦爲是假名, 亦是中道義

연기(緣起)이므로 공(空)입니다. 이른바 연기성공(緣起性空)은 이 시리즈 5회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인연에 의해 생하므로 독립불변 실체, 즉 자성(自性)은 없다는 의미입니다. 공이란 이름 또한 잠시 빌린 이름일 뿐 공의 실체도 자성도 없으며, 이게 중도(中道)의 의미라는 것입니다. 연기성공이후에 바로 가명과 중도를 말하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연기를 연기 자체로 보라는 것이지요.

가령 어떤 사람이 벼락에 맞아 죽었다고 하자. 벼락의 원인인 기상현상을 지성이 파악하지 못할 때 우리는 상상력을 동원해 이렇게 미신적 원인을 고안한다. ‘그는 나쁜 사람이었고, 신이 그에게 벌을 내린 것이다.’ 자연법칙이 상상력을 통해, 징벌을 내리며 복종을 강요하는 공포스러운 신의 도덕법으로 변질되는 순간이다. 어떤 타인이 이 신의 명령에 위배될 때 그는 ‘증오’의 대상이 되며, 내가 신의 명령을 위배할 경우 나는 ‘죄의식’의 대상이 된다. 예속적 법의 탄생과 더불어, 삶에 대한 긍정이 있어야 할 자리를 주어진 삶을 부정하는 두 방식인 증오와 죄의식이 차지하는 것이다. 서동욱(서강대 철학과 교수)의 〈예속에 맞선 자유의 철학〉, 네이버캐스트에서 인용

벼락이 치는 기상조건 —연(緣)— 에 의해 사망사건이 발생 —기(起)— 하였습니다. 이렇게만 보는 것이 연기를 연기 자체로 보는 것입니다. 연기 이외에 아무 것도 개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공입니다. 그런데 만약 여기에 다른 어떤 것, 예컨대 전능한 신(神)을 끌어 들여 그 인과관계를 이해한다면, 이게 바로 증익견(增益見)이고 상견(常見)입니다.

만약 인연 따라 생멸하는 이 세계의 배후에 기독교의 여호와 같은 전지전능한 신을 상정한다면 이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은 그 신을 향한 과정에 불과할 것입니다. 현세는 부정되어야할 어떤 것이고, 신의 도성만이 진실한 것이 될 겁니다. 마찬가지로 일정한 정도의 돈이 행복의 조건이라 믿고 산다면 그 돈이 모아지는 그때가지의 삶은 행복을 목적으로 하는 과정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는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을 불행하게 사는 것입니다.

반대로 에피쿠로스처럼 현세에는 어떤 원리나 원칙도 없이 그저 우연히 왔다가 우연히 만나 편안히 살다 가면 그만이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이는 감손견(減損見)이고 단견(斷見)입니다. 이 철학에서 현세적 삶은 매우 긍정되지만 한 편의 허무 또한 피하지 못합니다. 무인도에서 느끼는 숭배할 대상도, 사랑할 사람도 없는 짙은 허무는 그 삶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게 공에 가명을 덧붙인 이유입니다. 공, 혹은 무(無)는 잠시 빌린 이름이니 허무에 빠지지 말라는 가르침이지요. 그래서 중도입니다. 중도는 지금 이 순간의 삶 그 자체를 그대로 보라는 말입니다.

3.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

지난겨울은 참 추웠습니다. 겨울 초입에 밤새 눈이 많이 내린다고 해서 출근과 등교가 염려된 저희 세 식구는 시골집을 나와 대전 시내에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다음 집으로 돌아와 보니, 물이 얼어 있었습니다. 전날 수도꼭지를 틀어 놓고 나갔어야만 했는데, 미처 그 생각을 못한 거지요. 뜨거운 물로도 헤어드라이어로도 풀리지 않는 물! 지난겨울 몇 십 년만의 추위는 물을 더욱 꽁꽁 얼렸고…… 결국 하룻밤의 도피는 한 겨울 내내 저희 세 식구를 표류자로 만들었습니다. 빨리 새봄이 와 언 물이 풀리기만 기다리는 부평초 인생이 되어버렸습니다.

정작 진짜 고생은 개가 했습니다. 산이와 맥이. 두 마리 풍산개는 그냥 시골집에 있고. 제가 이틀에 한 번씩 가서 물과 먹이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때는 3일 만에 심한 경우 4일째에 간 적도 있었습니다. 앞집에 부탁은 해 놨지만 개들의 고생은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지요. 그런데도 이놈들은 제 차만 보면 꼬리를 흔들며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인간이 지난겨울의 개와 같은 처지가 되어 이틀에 한 번 와야 할 주인이 3일이 지나서 온다면 어떻게 할까요? 분명 크게 화를 내겠지요. 인간은 기다릴 줄을 압니다. 그래서 주인이 와서 먹을 걸 줄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 기다림은 고통스럽기에 약속시간을 어기면 화를 내는 것입니다. 인간만이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을 고통 속에서 참으며 기다릴 줄 압니다.

하지만 동물들은 기다림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먹이를 주기 전에 기다리는 것은 훈련의 결과일 뿐, 기다림을 알아서 하는 행위는 아닙니다. 따라서 동물들은 미래의 무엇을 기다리며 오늘의 고통을 견디려 하지 않습니다. 힘들면 힘든 대로 좋으면 좋은 대로 그냥 받아들입니다. 동물들은 또한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기에 죽어가는 그 순간을 다만 받아들일 뿐입니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지적합니다.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산이와 맥이처럼 남을 원망하지 않고 그 순간을 기뻐할 수 있냐고. 개 같은 인생을 원하는 것도, 개로 다시 태어나고 싶은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인간에게 묻는 것입니다. 당신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왜 우리는 불확실한 내일을 기다리며 오늘을 고통 속에서 부정하며 살까요? 그건 지금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동주 이민구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인입니다. 전주 이씨 왕족으로 세 번의 장원급제와 최연소 관찰사를 역임할 만큼 총명했습니다. 그렇게 잘 나가던 그가 병자호란 때 인조를 강화도로 호종할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죄로 영변에 유배됩니다. 영변 유배지에서 그는 종일 서울만 바라봅니다. 하루 이틀……, 한 해 두 해……

젊어 승승장구하던 시절, 동주선생은 늘 도연명을 읊조렸습니다. 도연명이 귀거래사를 지으며 귀향한 것처럼, 자신도 전원 속에서 자연과 벗하며 살겠다는 욕망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49살에 영변으로 유배 가게 됩니다. 비록 타의에 의한 전원생활이지만, 그토록 바라던 전원생활이 시작된 것이지요. 하지만 그는 늘 서울만 바라보며 통곡합니다. 벼슬살이 중에는 전원만 바라보고, 전원에서는 궁궐만 바라봅니다.

우리는 내게 없는 것을 욕망합니다. 현재 없는 것이 미래에는 갖춰질 거라 믿으며 오늘을 고통스럽게 살아갑니다. 이런 생각을 한 번 뒤집어 내게 있는 것에 기뻐하고 오늘을 감사해 할 줄 안다면,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요. 현재의 이 삶이 그대로 긍정되는 것, 이게 중관학에서 말하는 중도(中道)이며 해탈입니다. 중관학의 연기성공은 세속의 삶 그대로에서 곧바로 진리의 세계가 열리는 길을 펼쳐주는 것입니다.

〈사천에서 놀다(遊斜川)〉
—도연명

새해에 들어서서 어느새 닷새가 지났으니
내 인생도 머지않아 끝장이 날 것이라.
이 일 생각하니 가슴 속 울렁거려
때에 맞춰 이 놀이를 하는거라.
공기는 온화하고 하늘 또한 맑은데
긴 물줄기 따라 줄지어서 앉았다.
느린 여울목엔 아롱진 방어 치닫고
조용한 골짜기에는 우는 갈매기 뒤집으며 난다.
먼 물 쪽으로 눈을 돌려서
아득히 曾丘를 바라본다.
아홉 층의 빼어남 없기는 하나
둘러보아도 그에 맞갈 만한 것이 없다.
술병을 들고 같이 온 친구들 상대하여
잔에 가득 술을 따라 번갈아 주고 받는다.
알 수 없거니와 지금 이후에야
또 이같이 놀게 되겠나.
잔 비우는 도중 초탈한 마음 멋대로 풀어놓고
저 천년의 근심 잊어버린다.
잠시나마 오늘 아침의 즐거움을 맘껏 누리는 거라
내일이야 알 바 아니지. 차주환 번역

김문갑/철학박사,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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