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문관의 환경은 <위대한 침묵>에서 수사들이 생활했던 삶의 조건보다 더욱 금욕적이었습니다. 그래도 수사들은 바깥 경치도 내다보고, 텃밭으로 나가 식물도 가꾸고, 하루에 세 번씩 미사에 참석하면서 동료 수사를 만나고, 가끔은 다른 수사들과 대화도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무문관 수행은 3년간 좁은 방에서 나올 수조차 없었습니다. 하루 한 끼를 먹으며 독방에서 치열하게 자신과 만나야 하므로 정말 인간의 한계를 경험하게 하는 조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지엄스님은 이 어려운 환경을 극복해냈습니다. 그렇다면 스님의 손엔 무언가 들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님은 대상포진이라는 병이 아직 완치되지도 않았는데 또 다시 무문관 수행을 떠나는 것으로서 전리품을 기대하는 사람들의 기를 완전히 꺾어놓았습니다.

그토록 긴 시간, 한계를 경험하게 하는 수행을 했건만 스님은 다음을 기약했습니다. 이 작은 몸뚱이 안에 갇혀있는 나를 끄집어내는 일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설산에서 6년 고행을 했던 것이나 달마스님이 소림굴에서 9년 면벽을 했던 것이나 티베트 최고의 승려인 미라레빠가 히말라야 동굴에서 12년 수행을 했던 것도 결국은 지엄스님의 무문관 수행과 다르지가 않은 것입니다.

지엄스님도 이 성인들처럼 결국은 무언가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생이 아니라면 다음 생에라도. 지엄스님의 수행에 대한 강한 의지는 결국 자기 삶에 대한 개척정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숙명을 따르는 자의 비굴함이 아닌 운명을 개척하는 자의 자존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절에서 살아온 선우스님은 동진출가인데, 스님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기도 했습니다. 절을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열두 번도 넘었지만 막상 나가려고 해도 갈 곳이 없었다는 것이 절에서 산 이유라면서 울먹였습니다. 남들은 다들 동진출가를 부러워하는데 적장 본인은 맺힌 게 많은 것 같았습니다. 절에 버려진 아이, 업장이 두터운 아이라는 말이 듣기 싫었기 때문에 아프다고도 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선우스님의 자기 한탄을 듣고 은사스님은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선우스님이 도를 깨닫지 못하고 어영부영 살게 된다면 정말 선우스님의 생각처럼 스님은 오갈 데가 없어서 절에서 사는 처지밖에 안 되지만, 선우스님이 열심히 수행하여 도를 깨닫는다면 선우스님의 처지는 도를 깨치는 데 가장 좋은 환경이라고, 어쩌면 선우스님은 전생에 수행자였는데, 도를 깨치기 좋은 환경에서 수행하기 위해 다음 생에는 꼭 동진으로 출가하겠다는 원을 세웠기 때문에 지금의 모습인 것이라고 말씀하면서 열심히 수행해야 한다고 독려했습니다. 은사 스님과의 만행 후 선우스님은 수행 정진하러 떠납니다. 자기 삶이 누군가의 의지가 아닌 자신의 의지였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리고 상욱스님은 세간의 화제를 모으기에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명문대를 졸업했고, 미국 유학도 다녀왔고, 교수 임용 면접을 앞두고 출가를 단행했습니다. 세간의 시선으로 봤을 때는, 정말 많은 걸 가졌고, 또한 버리기 어려운 걸 버린 경우입니다. 출가사문이 된 상욱스님은 끝까지 매달리는 부모의 끈끈한 정 앞에서도 “어쩔 수 없어요.”라면서 매정하게 돌아섰습니다. 이렇게 상욱스님은 사회와 부모가 만들어준 삶의 조건을 박차고 나와 본인의 의지대로 수행자의 삶을 선택했습니다. 이는 앞의 지엄스님이나 선우 스님처럼 자신의 삶을 본인이 결정하고 개척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창재 감독은 1년여를 법흥암에서 머물면서 비구니 스님의 일상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일 년에 두 번 초파일과 우란분재에만 외부에 개방되는 경상북도 영천 팔공산 은해사 산내암자인 법흥암에서의 촬영을 끝내는 날 영운 스님은 감독에게 그동안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감독은 아무 대답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감독이 본 것을 알게 됐습니다.

감독은 인간의 의지를 확인했습니다. 인간의 삶이 다른 누군가의 뜻이 아닌 본인의 의지에 따라 변화하고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그 증거가 바로 그가 보여주는 것들인데, 지엄스님의 모습이나 선우스님과 은사스님의 대화는 감독의 깨달음을 보여주는 결과물이었습니다.

선우스님이 비록 자기 뜻과 관계없이 산사의 삶을 선택 받았지만 이 또한 전생에서의 의지의 결과물이기에 결국 사람의 삶은 마음먹는 데 따라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엄스님의 투철한 수행 의지 또한 다음 생과 연관돼 있으며, 조금 가벼워 보이기는 하지만 민재행자의 출가 동기는 분명 불교라는 종교가 갖는 성질을 설명하기에 적당했습니다.

민재 행자는 절에 들어오기 전에 불교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냥 그는 막연하게 종교인이 되고 싶었고, 그래서 인터넷에서 여러 종교에 대해서 찾아보았는데 다른 종교는 신의 의지에 기대는데 반해 불교는 자기의 의지대로 삶을 개척해 가는 종교라는 걸 알아냈고, 자신을 찾고 싶어서 절에 왔다고 했습니다.

민재 행자의 출가 동기처럼 감독은 영화를 촬영하면서 바로 이 깨달음을 철저하게 알아나간 것입니다. 이 깨달음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기에 감독은 영화를 만든 후 불교 신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번 영화 <길 위에서>는 스님의 실제 삶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지금을 사는 대한민국 스님들의 일상을 보여주고, 또한 그들의 고민을 읽을 수 있는 영화였습니다. 지금까지 픽션이었던 영화에서 보았던 스님들의 삶과는 사뭇 다른 삶을 보여주었습니다.

엄숙하기만 할 것 같은 스님의 일상은 의외로 활기차고 행복해 보였습니다. 갓 출가한 민재행자가 부모님이나 형제는 자기 때문에 고통 받고 있는데도 자기는 지금 너무 행복한 게 참 미안하다고 말하는 대목을 보면서 스님들의 일상의 질을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하하 호호 수다를 떨면서 고추를 따고, 김장하는 날은 잔칫날처럼 떠들썩하고, 울력을 하는 날은 맛있는 별식도 만들었습니다. 비록 피 한 방울 안 섞인 사이지만 은사고, 상좌면 혈육보다 더 마음이 쓰인다고 하신 주지스님의 말씀처럼 끈끈한 정으로 연결돼서 서로 위해주면서 살아가는 모습은 사람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삶이었습니다.

예전에 공지영 씨가 <수도원 기행>이라는 책에서 프랑스의 어느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거기서 만난 수녀님의 모습은 더 이상 행복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었다고 표현했었는데 영화에서 내가 본 법흥암 스님들의 모습도 그 수녀님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스님들이 만행 나왔을 때 시장 통에서 울려 퍼지던 노랫가락은 너무 통속적으로 들렸고, 생선을 파는 아주머니가 갈치를 토막 내는 장면은 섬뜩했고, 소원을 적는 탑에 걸려있던 ‘30억 벌게 해주세요’는 천박하게 여겨졌습니다. 자유롭고 행복한 스님들의 세계와 욕망이 가득한 사바세계가 비교되면서 현실이 참 남루하게 여겨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영화를 보고 출가하는 사람들의 수가 많이 늘었다고 합니다. 영화는 우리가 피상적으로 생각했던 스님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진실에 다가가게 하는 데 한 몫 했으며, 또한 행복한 스님의 일상을 엿보는 것은, 우리에겐 힐링이었고, 또한 자정작용이었습니다. 다큐멘터리 영화 본연의 역할을 잘 수행한 영화였습니다.

김은주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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