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을 내딛자‘마음 다스리는 글’을 촘촘히 새긴 돌기둥이 보였다. 그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 성불사 산문이다. 산문이라고는 하지만, 흔히 말하는‘일주문’은 아니다. 단지 성불사의 경내와 경외를 구분할 뿐, 차안과 피안을 나누는 경계선 같은 중압감을 주지 않는다. 근처를 지나는 등산객에게 사찰을 활짝 열어놓은 셈이다.
산문을 지나 돌계단을 오르니 성불사 경내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눈 보다는 귀가 더 쫑긋해졌다. ‘관세음보살’정근 소리가 청아하게 밀려왔고, 뒤이어 청법가가 들렸다. 매달 음 24일은 관음재일 법회가 봉행되는데, 성불사에서도 그 법회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법상에 오른 성산 스님을 뵐 수 있다는 생각에 한 걸음에 대웅보전으로 들어갔다.
대웅보전에는 40대에서 60대까지의 우바이와 우바새 50여명이 감로수 법문을 청하고 있었다. 잠시 후 법상에 앉은 성산 스님은 일상의 사유를 빗대어 부처님의 지혜를 풀어 주며, “취모검을 휘둘러 어려움을 극복해 나아가자”고 당부하고, 이내 『법화경』 강독을 진행하며 신심을 다잡아 갔고, 대웅보전에는 활발발한 기운이 밀밀(密密)히 퍼졌다.
성불사는 1960년대 초 부산 지부장을 역임하시던 송강(松江) 박차경 보살이 법당 10평, 산신각 2평, 요사채 10평 정도의 암자(칠성암)를 세운 것이, 그 시작이다. 그 후 성산 스님(성불사 주지)이 몇 차례 땅을 매입하며 칠성암에서 성불사 사찰 이름을 바꾸고 본격적인 불사에 들어갔다. (재)선학원에 등록한 것은 1971년 5월이다.
성산 스님은 우선 사찰 진입로를 포장하며 전기와 전화를 산사에 끌어들이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1986년 10평이었던 요사채를 50평으로 증축하고, 다시 1991년 2평이던 삼성각을 10평으로 늘였다. 또한 10평 남짓한 단층 법당을 지상 2층(각 62평)으로 새로 짓고, 1993년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약 15미터의 ‘청동관음대성상’을 조성하고, 범종각(1999년)과 팔각9층석탑(2003년)을 세우는 것으로 20여 년 동안 원력을 모아 추진한 불사를 마쳤다.
성산 스님은 성불사 적광암(寂光庵)에 주석하며, ‘고요한 빛’이라는 암자의 이름처럼, ‘고요하지만 밝은 빛[지혜]으로 수행과 포교에 매진하고 있다. “성불사를 찾을 불자들에게 헌신한다.”는 스님의 말을 굳이 옮기지 않더라도, 성불사는 지혜와 자비로 지역주민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는 셈이다.
매년 두 차례 진행하는 방생법회 보시금은 ‘1인 1만원’에 불과하다. 여느 사찰 같으면 3~5만원이겠지만, 성불사는 그렇지 않다. 인등비는 말할 것도 없다. 아직까지 ‘1인 1천원.’ 일 년 해봐야 ‘1만2천원’인 셈이다. 10만원을 훨씬 웃도는 다른 사찰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이는 “경제가 어려우면, 그만큼 법회 비용을 낮추어야 한다.”는 성산 스님의 지론 때문이다. 보다 많은 대중이 정법을 만날 수 있는 방편은 그것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불사 방생법회 때면 45인승 대형버스 20~30대가 움직이고, 청동관음대성상을 병풍처럼 둘러싼 수만 개의 인등이 밤마다 ‘환희심’을 뿜어낸다.
“승려의 기본 도리가 아니겠냐.”는 성산 스님은 “작은 보시라도 귀하게 여기고 긍휼한 사중 가풍을 세운다면 절 살림이란 어렵지 않다.”며 “또 성불사 모든 사부대중이 행복해 하는 일을 해나간다면, 그들에게 진정한 신앙의 가치를 깨닫게 하고, 또 진정한 불사가 아니겠냐.”고 말한다.
성불사를 외호하듯 서있는 나무처럼, ‘고요한 불빛’처럼 사부대중의 원융한 신행을 돕고 있는 성산 스님의 원력이, 가까운 미래 성불사를 부산, 경남지역에서 최고의 관음도량으로 우뚝 세우길 기대해 본다.
성불사 부산시 해운대구 우 2동 1108-11번지 (051)746-4800~1
오종욱/본지 편집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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