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경』은 간화선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고, 특히 대혜를 비롯한 임제종양기파는 ‘입법계품’, 그 중에서도 입누각(入樓閣) 이야기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 내용과 간화선의 구조가 동일한 점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도 대혜는 ‘입법계품’과 간화선을 동일한 구조를 가진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대혜법어』권22‘시묘심거사’에서 대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결정코 이 일을 궁구하려고 한다면, 지금까지 멋대로 생각해서 도리를 말하고, 문자와 언어로 기억하고, 심의식중에서 사려하고 헤아려서 얻은 것을 다른 세계에 내던져 버리고, 조금도 가슴속에 놓아두지 말고, 깨끗하게 제거해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후에, 심의식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한 걸음을 나아가 보십시오. 만약 이 한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면, 마치 선재동자가 보현보살의 털구멍 속에서 한 걸음을 나아가, 수많은 불국의 무수의 세계를 지나간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 무자(無字_를 참구하기만 하면 됩니다. 끊임없이 참구하여 홀연히 소식을 끊으면, 그곳이 바로 안락한 곳입니다. 그 외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전에 말한 ‘나아가기 힘든 한 걸음’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지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대혜에 의하면, 간화선이란 지각이 없는 무생물과 같이 무념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공안을 끊임없이 의심하여 더 이상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의식이 막다른 골목에 몰렸을 때 돈오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혜는 간화선의 ‘사량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한걸음을 나아가는 것’을 ‘선재동자가 한 걸음을 나아간 순간 무수의 세계를 지난 것’과 동일하게 보고 있는 것이다. 간화선에서 ‘사량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한 걸음을 나아가는 것’이란 분지일발(噴地一發)이며, 이러한 오도의 체험이야말로 간화선의 요체이다. 그런데 대혜는 이러한 ‘입법계품’의 구조가 간화선의 구조와 유사하다고 보는 것이다.
어쨌든 ‘입누각’ 이야기에 있어서는, 화엄사상가나 다른 선승들과 달리 대혜종고를 비롯한 간화선자들은 문개(門開)보다 환폐(還閉)에 주목한다. 반면 굉지정각을 비롯한 묵조선자들은 오직 ‘문개’에만 주목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선재가 누각에 들어간 것’은 선재가 깨달음에 들어간 것을 의미하고, 선재가 누각 안에서 본 세계는 중중무진의 화엄세계이며 모든 것이 완결된 본각의 세계, 해탈의 세계이다. 또, 문이 다시 닫힌 것은 ‘종전에 얻었던 모든 가르침, 나아가 깨달았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리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시각이며 반본환원이다.
따라서 본각을 중시하는 묵조선자들은 ‘문개’에만 관심이 있는 반면, 묵조선자들이 ‘해탈이라는 함정’에 빠져있다고 비난하는 대혜를 비롯한 간화선자들은 ‘환폐’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정영식(부산대 철학과 강사)
*제2회 학술상 수상논문 ‘『화엄경』해석을 둘러싼 간화선자와 묵조선자의 차이’를 요약했습니다.

“누각의 문이 열린 것”과 “누각의 문이 다시 닫힌 것”의 두 가지 사건을 두고, 화엄승과 선승의 사상적 차이는 물론 화엄선승간의 차이와 간화선과 묵조선의 차이를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화엄사상가들이 ‘문개’와 ‘환폐’에 대하여 독자적인 해석을 내려서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법장, 징관, 이통현은 문개와 환폐의 어느 한 쪽에 더 가치를 두고 해석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혜종고를 비롯한 간화선자들은 환개에 주목했고, 묵조선자들은 오직 문개만을 주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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