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와 간다라 지역의 출가유성도의 도상적 특징을 살펴보면, 고대 인도의 경우 가장 이른 시기에 조성된 Barhut 탑 부조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기원 후 1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중인도의 산치 1탑 탑문에 표현되기 시작하였다. 산치 탑문의 출가유성은 상징 즉, 불족적(佛足跡)과 산개(傘蓋)로 석존을 표현한 무불상시대의 출가유성을 보여주고 있다. 출가유성 장면을 탑문에 조각한 것으로 보아 출가유성의 비중이 다른 불전도 장면에 비해 중요하게 여겨진 것으로 보인다.
반면 간다라 지역의 출가유성 장면에서는 불상불 표현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인간의 모습 석존을 표현하였다. 석가여래의 일생을 다룬 불전도에 있어서 상징물이 아닌 인격화된 석가여래를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 전후를 한 시대부터 시작된 셈이다. 인격화된 석가여래 주변으로 조익관을 쓰고 무장을 한 천신, 카필라 성의 여신, 숄을 걸친 밤의 여신 등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들은 인도적인 인물이 아니며, 동서 문화의 교류를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기존의 학설에서는 간다라 지역에 있어서 헬레니즘시대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것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2세의 동방원정에서 시작하여 이후 헬레니즘 문화와 간다라 미술과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추상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출가유성도의 제작 시기는 대체적으로 쿠샨왕조와 부합하고 있으며 간다라 미술에 대하여서는 간다라라고 하는 지역의 특성보다는 쿠샨왕조라고 하는 테두리에서 파악하는 것이 좀 더 설득력 있지 않을까 싶다.
쿠샨왕조는 대월씨(大月氏)가 서쪽으로 옮겨서 서투르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북반부를 지배했을 때에 영지 안에 설치한 5제후(諸侯)의 하나인 쿠샨에서 발전한 왕조로 기원 전후 쿠줄라카드피세스 때에 다른 4제후를 쓰러뜨리고 힌두쿠시 이남으로 진출하여 간다라지역을 지배하였다. 그 후 카니슈카왕은 사방으로 영토를 넓혀 인도 중부까지 그 세력을 확장 하였다. 불교의 경우, 대승불교도 이 때 성립 발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쿠샨왕조를 세운 민족은 이란계 유목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같은 시기 시리아를 비롯한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차지한 파르티아 왕조와 민족적 구성이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쿠샨왕조 이전에도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시대부터 박트리아, 간다라 지역과 페르시아간의 교류가 확인되고 있고,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간다라 지역의 페르시아 문화, 이후 나타나는 헬레니즘의 영향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교류 현상은 쿠샨왕조의 출발과 함께 더욱 가속화되고 범위 또한 확장된 것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유근자(동국대 미술학과 강사)
*제2회 학술상 수상논문 ‘간다라 출가유성 불전도(出家踰城 佛傳圖) 연구’를 요약했습니다.

간다라의 출가유성이라고 하는 특수한 주제를 통해 살펴본 동서 문화 교류는 이민족의 불교 인식과 더불어 이를 또 하나의 지역적인 특수성을 지닌 도상으로 정착시켜나가는 과정을 살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불교도상의 동서 문화 교류는 제한된 지역과 시기적 문제에 국한하지 않고 주변지역과 민족 간의 상관관계를 통해 좀 더 입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헬레니즘’과 ‘그리스-로마 문화의 영향’이라고 하는 추상적인 언급보다는 구체적 작품 비교를 통해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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