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대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가 집대성한 간화선(看話禪)은, 당대 조사선 본래의 면목을 상실하고 있는, 송대 선의 현실을 한탄하며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제시된 개혁운동이다. 조사선에서는 수행자들이 스스로가 본래 부처임을 확인하기 위해 ‘선문답’을 통해 깨닫는 증득의 과정을 거친다.

이때 (조사)선은 어떤 모방도 허용하지 않고 스승과 제자의 1:1의 ‘직접적 가르침’이라는 반복 불가능한 1회적 사건인 행위나 기연(奇緣) 등을 통하여 법을 전승한다. 이때 직접적 가르침은, 스승이 제자의 능력과 수준을 가까이 보고, 그에게 다른 차원의 통로를 열어 보임에 의해서, 같은 차원에서 맴돌던 제자의 의식을, 급속히 실재에의 인식으로 전환시키는 기능을 한다. 이것은 정형화되거나 체계화되어 있지 않을 뿐, 화두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송대가 되면 조사선 본래의 면목을 상실하게 된다. 선문답을 뜻과 이치로 이해하고 그것을 게송으로 표현하는 의리선(義理禪)적 경향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에 분개한 대혜는 옛 조사들의 선문답을 깨침의 관문이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정형화하고 이렇게 정형화된 화두를 철저한 의심으로 참구해나가는 선법을 체계화하고 정착시킨다. 조사선과 간화선이 다른 점이 있다면 선문답이 화두로 정형화된 것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간화선은 조사선이 강조하는 견성 체험을 그대로 이어받았을 뿐만 아니라, 조사들이 마음의 본래면목을 바로 보였던 말길이 끊어진 말씀을 화두라는 형태로 잘 정형화해서 이 화두를 통해 지금 이 자리에서 마음을 깨치게 하는 탁월한 수행법이기 때문에 조사선의 흐름을 고스란히 이어받고 있는 정맥이라고 할 수 있다.

금오선사에게 있어서, “선은 불조의 골수요, 생령의 근본”이다. 여기서 선사가 말하는 선은 주지하듯이 간화선이다. 그것은 “참다운 수행자란 첫째도 참선, 둘째도 참선, 셋째도 참선이다. 그러므로 오직 참선수행을 으뜸으로 삼아야 한다.”는 선사의 말에서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선사에 대해서 철저하게 외골수(外骨髓)로 간화선 일원의 공부법만을 주장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해도 그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사는 어떻게 간화선을 공부하고 어떻게 간화선을 가르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평생을 통하여 일관되게 전력을 경주한다.

선사는 참선법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을 찾아내는 법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마음을 찾아내어야 하는가? 선사는 마음의 뿌리를 더듬어 캐어야 마음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선사의 설명에 의하면 사람에게는 몸과 마음이라는 두 가지 물건이 있다. 이때 마음이 몸을 동서사방으로 끌고 다니는데, 대법에 눈이 어두운 자는 몸이 스스로 먹고 자고 가고 오는 것으로만 생각한다. 따라서 ‘한 물건’인 마음이 주인공인 것을 우선 알아야만 한다. 따라서 ‘참선 공부’는 ‘마음공부’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알면 성인이 되지만 마음을 알지 못하면 범부가 되어 생사의 바다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게 된다. 만사를 제쳐놓고, 마음을 찾는 공부를 통해서, 천하 생사대사(生死大事)를 해결하기 위해 농사일을 할 때나 밥 먹고 옷을 입을 때나 오가는 때에도 놓치지 말고, 갈 때는 가면서 보고, 앉았을 때는 앉아서 보며, 말할 때는 말하면서 보며, 침묵할 때는 침묵하면서 보면서, 화두를 일심으로 참구하여 주인공이 어느 곳에 있는고? 하고 나의 주인공을 하루속히 찾아야 한다. 그렇다면 화두 참구의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 선사의 견처는 어떠한가. 다음을 보자

이 물건을 향해서 “이것이 무엇인고? 대저 이것이 무엇인고?” 의심하고 의심하되, 배고픈 사람이 밥을 생각하듯, 목마른 사람이 물을 생각하듯, 칠십 늙은 과부가 죽은 외아들을 생각하듯, 고양이가 쥐를 잡듯이 마음 눈을 다른 곳에 팔지 말고 간절히 의심하고 의심하여 찾아보고 찾아보라. 이때를 당해서는 어리둥절하고 아득하여 도저히 생각으로는 알아맞힐 수 없으며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그러나 답답하고 막막한 생각을 괴롭다 하지 말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이 무엇인고?”라고 자꾸 자꾸 의심을 지으며 소소영영한 물건을 앞에다 놓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이 무엇인고?” 한없이 되풀이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물건을 찾기 위해서는 의심을 하자니 저절로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이 무엇인고?” 하게 된다.

선사는 위에서 화두의 참구를 단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주지하듯이 화두 공부인은 대신심(大信心)‧대분심(大憤心)‧대의심(大疑心)의 삼요(三要)를 갖추어야 한다.

첫째, 간화선 수행자는 ‘화두에 큰 믿음’을 가져야 한다. 이 믿음은 자신은 물론 일체 중생이 본래 성불해 있다는 믿음이고, 이 믿음은 나와 부처님은 어떠한 차이도 없다는 믿음이다. 둘째, 간화선 수행자는 ‘크게 분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자신이 본래 부처이건만 왜 스스로를 중생으로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수행자는 이렇게 자책감으로 치밀어 오르는 대분심이 울컥울컥 솟아나야 한다. 셋째, 간화선 수행자는 ‘크게 의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화두는 생각의 길이 끊어진 본래면목이기에 가히 잡아볼 수 없고 형용할 수도 없다. 수행자는 여기에 이르러 전심전력을 기울여 정면 승부를 할 수밖에 없다. 간화선 수행에서 의심한다 함은 바로 이런 때의 마음 상태를 두고 하는 말이다.

부처님과 모든 조사들께서는 법을 화두라는 형태로 우리 눈앞에 명백히 보여주었다. 이렇게 불조께서는 내게 있는 본래 물건을 눈앞에서 밝게 보여주고 있는데 나는 어찌하여 그것을 보지 못한다는 말인가? 이렇게 하여 큰 의심이 일어나면 온몸 온 생각이 하나의 화두 덩어리로 바뀌게 된다.

선사는 삼요 가운데에서 특히 ‘크게 의심하는 마음’ 부분을 강조한다. 이 물건을 향해서 “이것이 무엇인고? 대저 이것이 무엇인고?” 마음 눈을 다른 곳에 팔지 말고 간절히 의심하고 의심하여 찾아보고 찾아보라는 것이다.

간절하게 의심을 지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의심이 끊어지지 않게 되는데, 이것을 ‘의정(疑情)’이라 한다. 다시 말해서 의정이란 화두에 대한 의심이 순일하게 되어 그 의심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상태를 말한다. 의식적으로 애써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심이 일종의 감정처럼 지속되는 것이다. 이렇게 의정에 들면 억지로 화두를 의심하지 않아도 저절로 화두 속에 몰입하게 된다. 의심하지 않아도 자연히 의심이 되고 화두를 들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화두가 들린다. 화두를 간절히 의심해 들어가다 보면 의정이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뭉치는 데, 이것을 ‘의단(疑團)’이라 한다. 의심 덩어리로 똘똘 뭉친 것이 의단이다.

그래서 나중에는 의단만이 홀로 드러나게 된다. 이것을 ‘의단독로(疑團獨路)’라 한다. 이 의단이 독로하면 화두와 내가 하나가 되어 서로 나누어지지 않고 한 몸을 이룬다. 의심 덩어리가 불덩어리가 되어 다른 것이 끼어들 틈이 없는 상태이다. 이런 상태를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 한다. 화두가 뚜렷이 한 조각을 이루는 것이다.

선사는 여기에서 ‘의정에서 의단으로 나아가 타성일편의 상태인 의단독로에 이르기까지’의 단계를 설파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계속 의심하고 의심하면 아득하여 도저히 생각으로는 알아맞힐 수 없으며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는 순간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답답하고 막막한 생각을 괴롭다 하지 말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이 무엇인고?’라고, 머리가 아니라 온 몸으로, 자꾸 자꾸 의심을 지으며 소소영영한 물건을 앞에다 놓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이 무엇인고?’ 한없이 되풀이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 말한 내용이 그것이다.

선사는, 화두가 타성일편이 된 상태에서 은산철벽을 투과하면, 즉 홀연히 깨치면 통밑이 쑥 빠지는 것처럼 통쾌하고 시원한 경계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마침내 한물건도 없는 확연한 태허공(太虛空)에 모양이 없는 법신이 나타나면 의심이 끊어져 만법에 걸림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만일 약간이라도 걸림이 있으면 깨친 것이 아니다. 도라는 것은 하나도 걸림이 없는 것이므로 이것을 ‘무상대각(無上大覺)’이라고 한다고 설파한다.

이덕진/창원 문성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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