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진실은 어떻게 아는가?

진실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여기 한 장의 사진을 볼까요?

▲ 1937년 11월30일자 일본 신문에 실린 사진. “백 명의 머리베기 시합”을 한 두 장교, 무카이 도시아키 소위와 노다 쓰요시 소위.
일본군은 1937년 난징에 진격하여 이듬해 12월까지 머물며 중국인을 비롯한 약 30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합니다. 강간, 약탈, 살육. 민간인을 상대로 총검술을 연마하고 심지어 임산부의 배를 갈랐습니다. 이 두 명의 일본군 장교는 이 난징대학살에서 100명의 머리를 누가 먼저 베는지 시합을 했습니다. 그리고 각자 106명과 105명을 참수합니다. 이들의 표정엔 승자의 거만함과 자랑스러움이 듬뿍 묻어나옵니다. 무고한 민간인을 학살하였다는 죄책감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천인공노할 사악한 무리인가요?

이들이 나쁜 놈이라는 사실은 본질이 아닙니다. 어쩌면 이들도 희생자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이들 두 명의 장교는 용장이라는 칭호와 함께 강한 사무라이 정신의 소유자로 영웅시되었습니다. 이들의 상관은 이 목베기 시합을 격려하고 부추겼습니다. 그렇다면 난징침공을 지휘한 총사령관은 어땠나요? 일본 최고 권력자는요?

이들은 모두 전후에 사형당했습니다. 이들이 죽는 그 순간에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쩜 그때까지도 자랑스런(?) 일본 사무라이로 남아 있었는지도 모르고요. 하지만 만약 이들의 자부심이 조작된 것이라면 어떻게 되나요? 권력자들이 그들의 사악한 목적을 위해 이들의 머릿속에 잘못된 자부심과 왜곡된 애국심을 심어 넣었다면 말이지요.

이런 일이 어찌 일본에서만 일어나겠습니까? 동서고금에 그리 드문 일도 아닌데요. 독일의 홀로코스트나 십자군전쟁에서의 대량 살육도, 민족적 우월감과 돈독한 신앙심 속에서 발생합니다. 죄의식이 스며들 이유가 없습니다.

2. 진실은 은폐되고 진리는 왜곡된다

진실이 알기 어려운 건 그 내용이 어려워서가 아닙니다. 조작되고 은폐되기 때문에 알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진실은 무엇이냐고 묻지 않고, 다만 어떻게 아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잠시 이 시리즈 제2회 〈근본불교 그 두 번째 이야기, 무아론〉을 다시 펴볼까 합니다. 이 글에서 오디세우스가 세이렌의 유혹을 극복하는 과정을 이야기하며 문명의 탄생을 말했습니다.

오디세우스의 모험은 인간이 자연을 극복하고 문명을 건설해가는 과정……그것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분열, 노동하는 자와 노동하지 않는 자의 분업이었으며 사유와 경험의 분리였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내적 자연(욕망)을 억압함으로써 외부 자연에 대한 지배를 가능하게 하였고, 사회라는 ‘제2의 자연’에 예속시킴으로써 문명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문명은 절대권력의 등장과 궤를 같이 합니다. 원시사회에서 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는 오직 제사장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은 곧 지배자였습니다. 후에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더라도 그들의 권력관계마저 분리되는 건 아닙니다. 이들 종교적 수장과 정치적 권력자는 때론 대립하고 때론 협력하면서 지배권력체제를 강고하게 유지해 왔습니다. 이런 체제에선 권력만이 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마치 오디세우스만이 세이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지요.

병사들은 세이렌의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밀랍으로 귀를 막고 눈을 감은 채 오로지 노만 열심히 저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이들 피지배계층은 신의 소리를, 자연의 신비를 듣지도 보지도 못합니다. 이들은 다만 그 소리를 듣고, 그 신비를 본 사람의 말을 통해 자연과 신의 세계를 상상해 볼 뿐입니다. 이들은 제사장이나 지배자들에게 복종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신을 만나고 우주와 소통할 수 있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들 권력자들이 사실을 은폐하거나 왜곡한다면 어떻게 되나요?

3. 매트릭스, 그 기계화된 산업사회의 실상

▲ 영화 《매트릭스》는 기계화된 산업사회와 그 속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실상으로도 읽힌다.
컴퓨터 프로그래머 토머스 앤더슨(키누 리브스)은 네오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해커이다. 어느 날 그는 전설적 해커 모피스(로렌스 피시번)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는다. 그가 1999년으로 알고 있는 현재가 사실은 2199년이며, 인공지능 컴퓨터 AI(Artificial Intelligence)가 가상현실을 담은 매트릭스라는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인간을 가축처럼 양육하면서 인간의 생체에너지를 자신의 동력원으로 쓰고 있다는 것이다. AI에게 양육되는 인간들의 비참한 현실을 확인한 토머스는 모피스와 그의 동료들의 도움으로 매트릭스를 탈출하여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사이버 전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네이버 두산백과에 나와 있는 영화 《매트릭스》에 대한 글입니다. 이 SF영화를 저는 산업자본주의에 대한 텍스트로 읽어 보고자 합니다. 기계의 지배를 받는 사회는 기계화된 산업사회를 상징합니다. 기계화된 산업사회는 필연적으로 대량생산체제를 갖추게 되고, 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량소비가 가능해야 합니다. 결국 대량생산 대량소비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산업자본주의는 경쟁적으로 식민지를 건설하고, 전쟁을 불사합니다. 전쟁은 모든 걸 파괴하기 때문에 전쟁처럼 대량소비를 일으키는 계기도 없습니다. 생존을 위한 전쟁은 고대로부터 있어 왔습니다만, 소비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이익을 위한 전쟁은 산업사회가 만들어진 이후에 발생합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추악한 전쟁이지요.

식민지 건설, 전쟁, 다음으로 산업자본주의는 인간의 욕망을 통제합니다. 한편으론 공장에서 찍어내는 온갖 물건들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다른 한편으로 이런 상품들을 소유하지 못하는 자들을 루저(패배자)로 낙인찍습니다. “아빠 엄마가 해주신 게 뭐가 있냐”는 자식들의 핀잔은 조선시대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말입니다. 자본주의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리며 그저 자식들을 위해 열심히 산 죄밖에 없는 평범한 아버지 어머니들이 자식들 앞에서 패배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오죽하면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란 제목을 가진 책이 상당기간 베스트셀러 목록을 장식할까요? 도대체 누가 가난한 아빠인가요? 가난한 아빠들은 대개 열심히 일한 사람들 아닌가요?  누가 그들을 가난한 아빠, 즉 이 사회의 루저로 만드는 걸까요?

네오 : “진실이 뭔대?”
모피스 : “그건 네가 노예라는 거야, 네오. 다른 모든 사람처럼 너도 느낄 수도, 맛볼 수도, 만져볼 수도 없이 묶인 죄수로 태어나지. 네 의식의 죄수.”

진실은 은폐되고 왜곡됩니다. 이 기만술에 환상이 사용됩니다. 잘 꾸며진 전망좋은 집, 날렵한 스포츠카, 이들은 멋진 인생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이 누리는 멋진 인생과 한편엔 꾀죄죄한 초라한 아버지들이 절묘하게 대비됩니다. 옷장에는 수십 벌의 옷이 빼곡한데도 오늘도 입고 나갈 옷이 없다고 느끼게 만듭니다. 그리하여 백화점 쇼윈도우를 기웃거리게 합니다. 도대체 '소비가 미덕'이라는 슬로건이 말이 되나요? 이 말이 왜?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자본주의가 우리들의 의식 속에 무엇을 심어 놓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장 보드리야르가 《소비의 사회》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이렇게 과잉생산되는 사회에서는 거울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쇼윈도우가 대체합니다. 인간은 자신을 비춰보는 게 아니라, 대량으로 기호화된 물건들을 응시할 따름입니다. 현대인이 자동차를 소유하는 이유는 유용한 운송수단으로써가 아니라, 자동차가 자신의 사회적 신분과 지위를 나타내는 기호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소유한 자동차에 매겨진 의미에 따라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가 결정됩니다. 그래서 현대인은 고급 승용차를 욕망합니다. 최고급 스포츠카는 현대인의 로망이며, 환상입니다. 이렇게 기호화된 사물의 질서 속으로 인간은 흡수되어 버립니다. 우리들은 그가 사는 아파트, 그가 모는 자동차에 따라 이 질서체제 속 어디에 자리해야 되는지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보다 높은 자리, 보다 좋은 위치에 놓이고자 오늘도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합니다. 노동합니다. 경쟁적으로 과잉노동합니다. 우리들은 모두 대량의 과잉생산 체제를 갖춘 기계화된 산업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노예들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자신이 이 자본주의 사회의 노예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생산의 역군이고 소비의 주체라는 자부심을 갖습니다. 오늘도 열정을 다하면 멋진 인생이 기다리고 있다는 꿈을 꿉니다. 그것이 이 체제가 우리의 의식 속에 심어놓은 환상인 줄도 모른 채 말이지요.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스가 네오를 인도한 진실의 세계는 네오의 의식 속입니다. 인간의 의식 속에 무엇이 심어져 있고, 어떻게 조작되는지를 보게 합니다. 화려한 쇼윈도우가 아니라 진정한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조작된 환상을 떨치고 진실을 본 사람들은, 이 체제에 저항합니다. 저항군들은 멀건 스프 한 접시로 한 끼를 떼우고, 초라한 옷으로 몸을 가리지만, 그들은 자유로운 영혼들입니다. 

4. 나가르주나와 중관학자들, 무엇이 그들을 전사로 이끌었나

바라문 가문에서 천재적 재능을 갖고 태어난 나가르주나[Nãgãrjuna, 용수(龍樹)]는 은신술을 익혀 친구들과 함께 밤에는 몰래 왕궁을 넘나들었다. 어느 날 그는 마하나가[Mahãnãgã, 대룡(大龍)]에게 인도되어 용궁으로 들어가 대승경전을 보게 된다. 그는 그가 알고 있는 현실은 환영이며, 진실은 은폐되고 왜곡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외도든 불교든 모든 종교인들은 교육과 여러 매체를 동원하여 중생들은 가르치고 훈육하면서 그들의 에너지를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동력원으로 쓰고 있다는 것이다. 종교집단에게 훈육되는 중생들의 비참한 현실을 확인한 나가르주나는 그와 생각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함께 기존의 교리체계에서 벗어나 중생을 구원하기 위한 전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앞에 나왔던 영화 《매트릭스》에 대한 글을 다만 명사만 바꾸어 다시 써본 것입니다. 똑같습니다. 다만 등장인물과 배경이 다를 뿐 기본 줄거리는 같습니다. 네오나 나가르주나는 모두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을 보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을 한 사람들입니다. 방어벽이 쳐진 프로그램을 뚫고 들어가는 게 해커입니다. 나가르주나는 은신술을 익혀 왕궁의 담을 넘습니다. 모두 금기(taboo)를 어기는 기술자들인 것이지요. 이들은 금기를 넘어 진실을 봅니다.

한 때의 쾌락을 뒤로 하고 진리에 눈을 뜬 나가르주나의 삶은 진리를 왜곡하고 진실을 은폐하는 자들과의 치열한 투쟁으로 점철됩니다. 그는 기존의 체제와 제도에 격렬히 저항합니다. 바라문교와 같은 이교는 말할 것도 없고 기존의 불교전통조차 정면에서 거부합니다.

격정적이며 인간관계에 좌절이 있고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았던 점은 많은 공(空)의 철학자에 공통적이다. 나가르주나의 제자인 아리야데바도 인도교의 신전에 들어가 신상(神像)의 눈을 뽑고 신과 대결하였으며, 그의 거리낌 없는 비판이 재난을 불러와 격한 투쟁의 생애의 마지막에는 이교도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전해진다. 쿠마라지바도 장안에 오기까지는 서역의 여러 나라에서 긴 유랑의 생활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후대의 중관학자 샨타라크쉬타도 불교도 간의 내분으로 죽음을 맞았으며, 그의 제자인 카말라쉴라도 종교적·정치적 투쟁의 와중에서 살해되었다.

이들이 이처럼 죽음을 불사하며 격렬히 저항하는 건 그 질서체제가 인간의 비판의식조차 마비시킬 정도로 교묘하고 완고하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비판이나 얼마간의 의심조차 일어날 수 없도록 완벽하게 짜여진 논리체계. 기존의 종교는 교묘한 교리체계를 세우고, 때론 강압적으로 때론 은밀하게 중생들의 의식을 통제합니다. 이 체계는 너무도 강고하기에 그 저항은 격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전설의 진위와는 관계없이, 여기―쿠마라지바가 한역한 《용수보살전(龍樹菩薩傳》등의 전기―에 묘사되어 있는 중관사상가들의 생애는 그 철학과 명상이 지시하는 절대의 적정(寂靜)과도 흡사하며 파란만장한 것이다. 그들의 변증은 그 변증이 전하는 공의 세계의 청명함에도 불구하고 불과 같은 치열한 논리였다. 이 세계를 꿈·환영으로 본 그들이 현실에서 발견한 것은 숲에서의 폐쇄된 생활이 아니라 추한 인간세의 악몽이었다.

꿈과 환상에서 깨어나 현실을 직시하라고 나가르주나는 말합니다. 이를 위해 환상을 심어놓는 일체의 교리에 저항하였던 것입니다. 이들이 그토록 구제하고자 했던 중생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고통스런 악몽임을 깨닫기보다는 행복한 환상 속에 머물고 싶은 중생들의 욕망 때문은 아닐런지요. 그 욕망은 《매트릭스》에서 사이퍼가 진실을 알고서도 감미로운 음악과 달콤한 스테이크를 잊지 못해 동료들을 배신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전향자들이 더 극우나 극좌가 되는 건 아닌지요.

파사현정(破邪顯正)

나가르주나를 비롯하여 이들 중관학자들은 참을 위해 일체의 거짓과 싸웠습니다. 이런 파사(破邪)는 현정(顯正)을 위한 절대적 요구였기에, 이들은 파사에 온 생을 바쳤습니다. 이들은 사상가이며 동시에 전사(戰士)였습니다. 행동하는 지성의 원형을 우리는 이들 중관학자들에게서 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치열한 저항정신은 진정 무지의 어둠 속에서 비상구조차 찾지 못하는 중생에 대한 커다란 비애[대비]의 발로였음을 기억합니다. 

김문갑/철학박사,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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