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하여 결코 허망하지 않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 주문을 설한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1. 반야(般若)의 다양한 모습

반야(般若)는 2종반야·3종반야·5종반야로 분류됩니다. 2종반야는 공반야(共般若)와 불공반야(不共般若)를 말합니다. 이는 판교(判敎)를 위한 구분입니다. 천태종에 의하면 공반야는 성문(聲聞)·연각(緣覺), 보살(菩薩)의 삼승(三乘)이 다함께[共] 깨달을 수 있도록 설한 가르침으로, 《반야경》은 여기에 속합니다. 불공반야는 오직 일승(一乘)의 보살만을 위하여 설해진 것입니다. 이른바 원융무애(圓融无涯)한 경지는 성문이나 연각은 제대로 알 수 없고 오직 보살만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함께 할 수 없는 불공(不共)입니다. 《화엄경》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3종반야는 문자반야(文字般若)·관조반야(觀照般若)·실상반야(實相般若)를 말합니다. 여기에 경계반야(境界般若)와 권속반야(眷屬般若)를 더하면, 이게 5종반야입니다. 학자에 따라 구분과 용어가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이렇게 구분됩니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것은 우주 삼라만상의 참모습, 즉 실상(實相)입니다. 참모습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이 참모습에 대한 깨달음이 실상반야입니다. 사람들이 실상반야를 얻지 못하는 것은 이미 여러 가지 사고의 틀에 얽매어 있기 때문입니다. 관습에 얽매이고, 환경의 지배를 받고, 언어문자에 의존합니다. 삼매(三昧)는 먼저 이런 기존의 관념, 사고의 틀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른바 무념무상에 들어가는 것이지요. 이 경계에서 얻게 되는 지혜가 관조반야입니다. 관조반야란 언어문자로 분석해서는 결코 도달하지 못하는 경계임을 나타냅니다.

부처님은 처음 실상반야를 얻으시고 너무도 황홀하여 그대로 열반에 드시려고 하였습니다. 그 깨달음의 경계가 언어문자로 형용할 수 없는 것이니, 얼마나 황홀할까요? 그저 상상만으로도 환희에 젖는데…… 하지만 부처님은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중생들을 생각하셔서 열반에 드는 일은 뒤로 미루시고 깨달은 바를 전해주시고자 하십니다. 이로써 문자반야가 성립합니다. 중생을 위해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유효한 수단이 언어문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실상이니, 참모습이니, 관조니 경계니 하는 말들은 다만 하나의 방편으로 이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자반야를 방편반야라고도 합니다.

문자반야가 설해짐으로써 자연스럽게 경계반야가 드러납니다. 천태종의 오시팔교(五時八敎)에 의하면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직후 최초로 설한 시기를 화엄시(華嚴時)라고 합니다. 처음 득도하고 21일간 화엄경을 설하셨다고 하지요. 따라서 《화엄경》은 부처님 깨달음의 경계가 가장 원형대로 문자화된 것이라고 할 있습니다. 부처의 경계에서 관조되는 실상의 모습, 이게 화엄 세계입니다. 인류의 문화유산 중에 이보다 더 황홀하고 위대한 세계는 없습니다.

《반야경》은 열반에 들기 전 22년간에 걸쳐 설해집니다. 가장 긴 시간, 가장 많은 말씀이 전해진 것이지요. 이는 단 한 명의 중생이라도 남김없이 깨달음에 인도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반야부 경전은 부처님의 대승세계가 가장 잘 드러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이런 큰 자비심이 있었기 때문에 저희 같은 중생들이 잠깐 들은 말씀만으로도 삶의 경계가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반야경》에서는, 성문은 성문의 경계, 연각은 연각의 경계, 그리고 보살은 보살의 경계가 마치 거대한 교향곡처럼 다함께 펼쳐집니다. 이게 반야경의 위대함입니다.

2. 말이 씨가 된다

▲ 기형도 시인의 유고시집. 이 시집에서 마치 주문처럼 되뇌어진 시어들은 시인의 죽음을 예언하는 게 되었다.
실상과 언어의 관계는 플라톤이 《국가》에서 말한 이데아와 그림자의 관계와 흡사합니다. 동굴 속에 죄수들이 묶여 있습니다. 이들은 동굴의 한 면만을 볼 수가 있지요. 이 동굴 면에 동굴 밖의 그림자가 비춥니다. 동굴 속 죄수들은 벽에 비친 그림자를 통해 동굴 밖의 실제 세계를 상상할 뿐이지요. 이런 구도는 지난 호에 살펴본 비트겐슈타인의 세계와 그림의 관계와도 흡사합니다.

그림자는 절대로 이데아가 아닙니다. 그렇듯이 언어문자는 결코 깨달음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선종에서는 “불립문자(不立文字)”를 말하는 것이지요. 문자는 단지 달, 즉 실상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합니다. 선가에서 말하는 지월(指月)은 보라는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고 있다는, 문자에 대한 상당한 경멸이 섞여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언어문자가 그저 하나의 방편에 불과하다면, 왜 반야라는 호칭을 붙여서 문자반야를 따로 구분할까요? 그리고 언어문자는 정말로 하나의 전달수단에 불과한 것일까요?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 시인의 《빈집》

1989년 3월 7일 새벽, 종로 3가 파고다 극장의 한 좌석에서 기형도 시인은 시신으로 발견됩니다. 전날 저녁, 그는 신문사―당시 중앙일보 편집부에서 근무 중―에서 나와 인사동에 들러 저녁을 먹으며 맥주 한 잔을 마십니다. 그리고 홀로 인사동 길을 걷다가…, 극장에 들르고…, 그리고 차가운 주검으로 화(化)했습니다.

생전에 출간을 위해 정리하던 시집은 유고집이 되어버렸고, 〈빈집〉은 자신의 죽음을 예고한 시가 되었습니다. ‘잘 있거라’, ‘잘 있거라’, ‘잘 있거라’. 그렇게 시인은 작별을 고하며 빈집에 스스로를 가두었습니다. 그리곤 마치 관(棺)에 못질을 하듯 문을 잠가 버리지요.

일단 언어화한다는 것은, 언어가 지시하는 대상을 지금 여기로 불러내는 동시에 그 대상이 실제로 그렇게 되도록 하는 ‘숨겨진 힘’을 부여하는 일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라는 우주 창조를 위한 말씀이나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은, 말이 상상이나 신념과 같은 인간 내면의 정신적인 현상을 실제 현상으로 현존케 하는 불가사의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자신의 노랫말처럼 자신의 삶이 되더라는 대중가수들의 심심찮은 고백 또한 마찬가지다. 이같은 언어의 힘을 우리는 ‘언어가 가진 주술성’이라 할 수 있겠다.

정끝별 시인의 평론처럼, 언어의 주술성으로 기형도 시인의 죽음을 이해한다면, 그는 〈빈집〉을 비롯해 자신의 유고집에서 구사한 시어(詩語)의 주술적인 힘에 이끌려 삶을 마감한 것이 됩니다.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고 마침내 죽음으로 그 예언을 실현하는 것이지요.

정신의학에서는 자살하는 많은 분들이 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고한다고 합니다. 평소의 말속에 죽음에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프로이드는 죽음의 본능을 삶의 본능인 에로스(Eros)에 대비하여 타나토스(Thanatos)라고 하였습니다. 말에 에로스나 타나토스를 담게 되면, 그 말은 그 방향으로 가고자 하는 관성을 띠게 됩니다. 말이 일정한 방향성을 띠게 되면, 가속도가 붙게 되고, 결국은 그 말을 실행에 옮기게 되지요.

이런 식으로 언어는 힘을 갖게 됩니다. 언어의 힘은 그러므로, 일정한 방향으로 반복될 때 우선적으로 나타납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 보면 부모, 특히 어머니가 평소 되풀이해서 해 주던 말이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머니가 너는 커서 뭐가 될거야라고 하면 정말로 그렇게 되는 것은 그 말이 반복을 통해 일정한 방향성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이 씨가 됩니다.

3. 그것은 마법 같은 것

‘언어의 주술성’이란 용어는 언어의 불가사의한 힘을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특정한 언어가 일정한 방향으로 반복되면 그 언어는 예언처럼 현실화되지요. 마치 주문이 외어지면 일어나는 현상과도 같은 주술성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언어의 주술성이 부정되는 사례는 우리 주변에 너무도 흔합니다. 오히려 언어의 주술적인 힘이 발휘된 사례가 예외적이지요. 주술이라는 말 자체는 결코 과학적이지 못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르네 데카르트, 그를 근대철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까닭은 그의 철학적 방법이 근대인의 사유방식을 결정하는 중요한 시발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무엇보다 진리는 분명하고 확실한 근거 위에 성립하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른바 진리의 명증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진리 아닌 것으로 간주하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런 사고가 근대의 과학과 합리주의를 꽃 피웠던 것입니다. 이러한 합리화의 과정을 막스베버라는 독일의 사회학자는 탈주술화, 혹은 탈신비화라고 하였습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합니다.

근대 합리화의 과정은 결과적으로 진리로 믿어 온 많은 것들을 이 세계로부터 추방해 버리는 과정과 다름없습니다. 형이상학이나 신학적 명제들은 모두 비과학, 혹은 비합리라는 판결과 함께 진리 아닌 것, 혹은 무의미한 게 되어 버렸지요. 기독교나 불교 같은 세계종교는 나름의 조직과 힘이 있어서, 과학과 대비되는 종교라는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할 수 있었지만, 그런 힘이 미약했던 전통 종교들은 모두 미신으로 전락합니다. 이렇게 근대적 사유에 의해, 많은 세계 이해가 걸러져서, 전근대, 혹은 원시라는 주홍글씨를 달고 비과학의 세계로 귀양 가게 된 거지요. 그러다가 포스트모던, 즉 근대 이후에 겨우 유배지에서 풀려납니다. 탈신비화가 근대화였다면, 탈근대화는 근대가 추방해 버린 신비를 되살리는 것입니다. 근대적 사유에서 벗어난 현대인들은 뭔가 신비롭고 마법적인 세계도 분명히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때쯤 《해리포터》 시리즈나 《반지의 제왕》이 큰 인기몰이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거의 마법 같은 것이지요.”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란 영화에서 주인공 샘이 아내가 될 여자에게 처음 손길이 닿았을 때 느꼈던 확신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 이 사람이야.’라는 느낌. 이 느낌처럼 분명한 게 또 있을까요? 이는 진실하고 결코 허망하지 않습니다. 과학이나 이성으로는 설명하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니 마법 같은 것이지요.

4.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현대인은 똑같은 줄거리, 뻔한 내용의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또 봅니다. 로맨틱 코메디, 서부영화, 슈퍼영웅 이야기…… 이른바 장르영화가 가능한 것은 많은 관객들이 보고자 하는 방향으로 줄거리가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로맨틱 코메디를 보러 간 관객은 극중 주인공의 해피엔딩을 보고 싶은 거지, 비참하고 불행한 현실을 확인하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그래서 결말을 뻔히 알면서도 또 보는 것입니다.

뻔한 내용을 알면서도 영화관을 찾는 것처럼 사람들은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잘 알면서 교회를 가고 절을 찾습니다. 종교는 영화나 드라마보다 훨씬 더 큰 구속력을 갖습니다. 대부분의 종교의식에서 행해지는, 예컨대 ‘아멘’이나,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같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주문이나, 제의(祭儀)는 매우 강력한 방향성을 갖게 됩니다. 때로는 지나쳐서 오히려 맹목적인 독단을 드러낼 정도로 그 힘은 강합니다.

그러므로 분명히 알라. 이는 크게 신비로운 주문이며, 크게 밝은 주문이며, 위가 없는 최상의 주문이며, 같이 비교할 게 없는 주문이니라. 능히 일체의 고통을 제거하나니 진실하여 결코 허망하지 않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반야바라밀다 주문을 설하시며, 말씀하셨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는 주문입니다. 뜻은 대략 “가자, 가자. 저 언덕으로 가자. 저 언덕으로 온전히 가자. 깨달음이여! 참으로 좋구나!”입니다. 저는 어렸을 적에 《중용》을 외우면 귀신이 범접하지 못한다고 아버님으로부터 들었습니다. 그때는 그냥 하시는 말씀이려니 했는데, 이제 생각해 보면 조금도 허망하지 않는 진실한 말씀이셨습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중용》에 쓰여진 문자들은 인간 본성의 지극한 덕성을 표현한 것들인데, 어찌 감히 귀신 따위가 범접할 수 있겠습니까. 《반야경》에 쓰여진 문자들 또한 반야로써 조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 지고한 경계는 결코 허망하지 않는, 진실한 것입니다.

▲ 영화 〈올드보이〉에는 무심히 던진 말 한마디가 일으킨 비극적 종말이 그려진다.
영화 〈올드보이〉는 생각 없이 툭 던진 말 한마디가 한 여자를 죽음으로 몰고, 마침내는 등장인물 모두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말 한마디로 고통을 받고,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습니다. 하물며 일정한 방향성을 갖고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언어는 그 자체가 매우 강력한 힘을 갖게 됩니다. 요즘 특정 언론이나 인터넷 매체에서 결코 진실되지도 못한 허망한 말들을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사회갈등은 증폭되고… 일본의 극우인사들이 똑같은 내용의 말을 되풀이하며 주변국 사람들의 속을 뒤집어 놓는 것과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언어의 힘이 그렇게 쓰이면 비극입니다. 말에 증오와 억지를 담으면 세상은 증오와 억지가 넘치고, 말에 사랑과 이해를 실으면 세상이 곧 사랑과 이해로 충만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바른말[正語]을 강조하셨고, 대승에 와서는 언어문자가 반야의 지위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김문갑/철학박사,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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