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신문에서 크게 성공한 사람이 쓴 칼럼 한 편을 읽었다. 그는 칼럼에서 햇빛과 바람에서 삶의 의욕을 되찾는다고 특별한 고백을 했다. 아침마다 차를 탈 때 시동을 걸어놓고 엔진이 충분히 돌 때를 기다리는 동안 창문을 열어놓으면 따뜻한 햇살이 들어오고, 부드러운 바람이 들어오는데 그들을 느끼는 동안 불편하던 마음이 잠시 가라앉는 경험을 한다고 말했다.

좀 충격이었다. 크게 성공한 만큼 큰 기쁨들이 도처에 널려있을 것 같은데 기껏 바람과 햇빛에서 행복을 얻는다니…. 그런데 이 영화 <아들의 방>의 조반니를 보면서 성공한 사람의 고백을 이해하게 됐다. 성공한 사람 또한 사회적 자아로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는데 사회적 자아는 결코 인간에게 제대로 된 행복감을 주지 못한다는 근원적 이유 때문이었다.

영화 <아들의 방>(이탈리아, 2001)은, 인간은 죽음을 가진 존재라는 걸 의식하면서 오히려 삶을 되찾아가는 영화다. 사회적 가치관과 타인의 시선에 집착하던 남자가 인간은 죽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절실하게 깨달으면서 삶에 대한 가치관을 전면 수정하고, 자유롭고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삶을 찾아간다는 그런 내용의 영화다.

2001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이 영화 <아들의 방>은 로베르토 베니니와 함께 이탈리아의 대표적 감독인 난니 모레티가 만든 작품으로 또한 그가 주인공 ‘조반니’ 역을 맡았다. 처음엔 주인공이 감독 자신인줄 모르고, ‘정말 지적인 느낌의 배우’라고만 생각했다.

주인공 조반니는 사는 게 몹시 지겨운 남자다. 그래서 그는 지겨운 삶을 극복하기 위해 운동에 매달린다. 그의 신발장은 여러 종류의 운동화로 가득 차 있다. 테니스화, 조깅화, 농구화, 축구화 등. 그는 운동을 하면서 지겹고 재미없는 일상을 이겨내는 것이다.

정신상담의인 그는 자기 일에서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즉 환자들과의 상담에서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성취감이나 만족감도 얻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일을 그만두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왜냐면 그는 사회의 시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정신상담의라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장을 버리고 직업도 없는 남자라는 다소 냉소적인 대우를 선택할 그런 용기는 없었다.

영화는 아들의 죽음을 계기로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어진다. 전반부는 주로 조반니의 직장생활과 단란한 가정의 모습을 보여준다. 즉, 조반니의 사회적 페르소나를 보여준다. 그런 모습 속에서 지겨움을 낙서로 달래고, 권태에 시달리고, 감정 없이 기계적으로 사람을 대하는 조반니를 보면서 사회적 페르소나에 억눌린 개인적 자아의 모습을 엿볼 수가 있다. 그러나 후반부는, 사회적 자아가 무참하게 깨지면서 개인적 자아가 전면으로 드러난다.

아들이 죽던 날 조반니는 아들과 조깅을 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갑자기 출장 진료 요청이 들어왔다.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더 중요시 하는 조반니는 아들과의 약속을 접고 출장 진료를 가버린다. 물론 그의 내면은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자신이 좋아하는 운동을 즐기길 바랐지만 그가 더 중요시하는 건 사회적 자아기에 행복보다는 일을 선택했던 것이다.

공교롭게 그날, 아들과의 약속을 배신하고 일하러 간 그날 아들은 친구들과 스쿠버다이빙을 갔다가 목숨을 잃는다. 아들의 죽음 후 조반니는 심한 자책감에 시달린다. 자신이 아들과의 약속을 지켰으면 아들이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자책감. 그리고 모든 게 완벽했던 아들이 죽기 전의 그날로 돌아가고 싶다는 깊은 상실감 때문에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던 일조차 제대로 못하게 된다.

이렇게 아들이 죽고 나자 모든 게 변한다. 그는 직장 일을 할 수 없을 만큼 아들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직장을 그만둔다. 지혜롭고 현명하던 아내도 아들의 과거 여자 친구에게 병적으로 집착하고, 딸도 운동경기 중 상대편 선수와 싸워 퇴장 당한다.

그러나 행복은 결여의 순간에 찾아온다. 아들이 죽은 후 그는 인간이 죽을 수 있는 존재고, 누구든 죽게 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된다. 그러면서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누가 뭐래도 자기가 좋으면 된다는 아주 간단한 진리를 통렬하게 깨닫게 된다. 그래서 그간 그를 고통스럽게 했던 직장을 그만두고 겉치레로부터 해방된다. 그러면서 그는 서서히 자유로워지고 약간씩 행복한 느낌, 살아있는 느낌을 되찾아간다.

마지막 장면에서 조반니는 아들의 여자친구를 국경까지 차로 태워 준다. 아들의 여자 친구가 새로 사귄 남자 친구와 여행을 떠나는데 배웅을 나온 것이다. 이전의 그라면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다. 처녀가 집을 나와 그것도 남자와 여행을 떠나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다는, 보수적인 어른의 사고에 길들여진 예전의 그에게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죽음을 경험하면서 그에게는 새로운 가치관이 정립됐고, 더 자유로워졌기에 이런 배웅까지 나올 수가 있는 것이었다.

다른 남자와 여행을 떠나는 아들의 여자친구를 배웅하면서 그는 아침 바다를 바라보며 영화에서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사회적 자아로부터 독립한 현재에서야 비로소 진정한 자아와 마주쳤고, 그러면서 행복을 얻게 된 것이었다. 남들 눈에 좋아 보이는 삶을 지향하다가 자신의 영혼이 만족을 느끼는 삶으로 방향을 선회했는데, 그게 바로 행복의 열쇠였던 것이다.

<아들의 방>에서 조반니는, 근본자아로 살아갈 때 영혼이 만족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예전에 여기서 다뤘던 영화 <체리향기>에서 노인이 했던 말, 맛있는 체리를 먹을 때, 무더운 여름에 차가운 옹달샘을 맛볼 때, 아름다운 달빛을 구경할 때, 이런 경우 나타나는 자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근본자아는 사회적 자아와 다른 원리로 존재한다. 사회적 자아가 타인을 의식하고, 보다 많은 것을 축적해 가면서 얻어지는 자아라면, 근본자아는 현재를 받아들이고, 순간에 머물면서 얻어지는 자아다.

김은주/자유기고가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