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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반야경의 세계 ②, 반야(般若)란 무엇인가?
색즉시공의 올바른 깨달음이 궁극적인 실상의 세계
2013년 05월 08일 (수) 09:46:45 김문갑 meastree@naver.com

1. 열정적이고, 심오하며, 지배적인 천재의 전형이다.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ph Johann Wittgenstein, 1889~1951)은 1889년 오스트리아 굴지의 재벌가에서 5남 3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납니다. 아버지 칼 비트겐슈타인은 철강업으로 당대에 막대한 부를 이룬 성공한 기업가이자 음악 애호가였습니다. 어머니 레오폴디네 또한 피아니스트라는 말이 결코 어색하지 않을 만큼이나 뛰어난 음악적 소질을 지니고 있었지요. 이들 칼과 레오폴디네 부부는 그들의 부를 예술가들에게 아낌없이 투자하였습니다. 비엔나 사람들이 궁전이라고 불렀던 비트겐슈타인가(家)의 저택에는 브람스, 말러, 브루노 발터, 요하임 등이 모여 음악을 연주하곤 하였습니다.

   
▲ 클림트가 그린 마가레테의 초상, 마가레테는 프로이트의 친구로 어린 비트겐슈타인에게 가장 큰 지적 영향을 끼쳤다.
루드비히의 누나 마가레테의 초상화를 클림트가 그렸고, 루드비히 자신도 유산 중 일부를 시인 릴케 등에게 기부하였을 정도로 이 집안은 예술적 향취가 물씬 풍기는 곳이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8남매들은 한결같이 예술적 재능이 뛰어났습니다. 큰 누나 헤르미네는 뛰어난 화가로 인정받았고, 큰형 한스는 4살 때 이미 작곡을 할 정도였습니다. 둘째 쿠르트는 첼로, 넷째 파울은 피아노 연주에 재능을 보였지요. 파울은 1차 세계대전에서 오른팔을 잃게 되는데, 라벨의 《왼손을 위한 협주곡》은 바로 그를 위해 작곡된 곡입니다. 막내인 루드비히도 교사가 되기 위해 30대에 배운 클라리넷 연주에 탁월한 재능을 나타내었으며, 웬만한 교향곡은 전곡을 휘파람으로 불 정도였다고 합니다.

뛰어난 재능을 갖고 태어난 천재들에게 부(富)는 축복일 듯도 한데, 비트겐슈타인가의 형제들에게는 아니었나 봅니다. 큰형 한스는 가업을 잇기 원하는 아버지와의 갈등 속에서 실종되었다가, 자살로 결론이 납니다. 그로부터 2년 후에는 연극을 하고자 했던 셋째 형 루돌프가 음독하고, 둘째 형 쿠르트 또한 1918년 1차 대전의 와중에 전선에서 스스로 생을 마칩니다. 큰형이 죽었을 때 루드비히의 나이는 13살이었으니, 어린 시절 불행했었다는 회고가 이해되기도 합니다.

어릴 적 형제들과 비교하여 특별할 게 없었던 루드비히는 평범한 소년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로부터 탁월한 통찰력과 어머니에게서 뛰어난 예술적 감수성을 받은 그는 평범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습니다. 더구나 한 가지 문제에 몰입하는 지극히 높은 강도의 집중력은 평범한 사람들이 쉽게 흉내낼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열네 살이 될 때까지 비트겐슈타인은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다기보다 자신의 주위를 천재들이 둘러싸고 있음을 느끼는 것으로 만족해 했다. 훗날 그가 새벽 3시에 피아노 소리를 듣고 깨었을 때의 상황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 보니 그의 형 한스가 자신이 작곡한 작품 중 하나를 연주하고 있었다. 한스의 집중력은 광적이었다. 그는 땀을 흘리며 완전히 열중해 있어서 비트겐슈타인이 온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는 비트겐슈타인에게 천재적인 재능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전형적인 이미지로 남았다.

통찰력과 예술적 감수성에 극도의 집중력을 갖고 태어난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의 말대로 천재의 전형입니다. 그런 그가 본격적으로 철학에 발을 딛고 써낸 책이 바로 《논리철학논고》―이하 《논고》로 약칭―입니다. 생각이 나지 않을 때는 거의 미쳐 죽어버릴 것과도 같은 광풍에 휩싸이며 사고에 사고를 거듭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군대에서 완성합니다. 포로 생활 1년을 마치고 돌아와서 이 책을 출판하고 비트겐슈타인은 철학계를 떠납니다. 왜냐하면 이 책 한권으로 모든 철학적 과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이후 그는 수도원 정원사, 초등학교 교사 등의 일을 하며 사는데, 이런 삶이 철학적 삶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는 완전한 노동자로 살고자 하였습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은 예술가들과 남은 형제자매들에게 고루 나누어 준 채 자신은 지극히 가난한 삶을 영위하였지요. 침대, 세면대, 작은 테이블과 나무 의자 하나가 전부인 하얗게 칠해진 작은 방에서, 빵과 버터와 코코아가 전부인 저녁식사를 곁들이면서 말이지요.

그러다가 그의 추종자들 사이에서 야기되는 문제를 해결코자 다시 철학계로 귀환합니다. 귀환 이후에는 머리가 거의 터져버릴 정도로 무자비하게 밀고 나가며 몰입한 결과물이 《철학적 탐구》―이하 《탐구》로 약칭―입니다.

비트겐슈타인 연구자들은 흔히 《논고》를 전기, 《탐구》를 후기를 대표하는 저작으로 봅니다. 그리고 양자 사이에는 상당한 간극과 모순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그렇겠지요. 아무려면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 젊은 시절의 생각과 중년 이후 그것이 같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근본까지 바뀐 것은 아닙니다.

2.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지,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다

세계는 일어나는 모든 것이다.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지,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로 끝을 맺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비트겐슈타인은 깊은 침묵에 들어갔던 것이지요. 그러다가 세월을 훌쩍 건너 뛰어 철학계로 귀환합니다. 케인즈는 이를 “신이 돌아왔다.”고 하였지요.

휘닉스 공원에서 산보하던 어느 날 드루리는 헤겔에 대해 말했다. ‘헤겔은 항상 다르게 보이는 것들이 실제로는 같다고 말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비트겐슈타인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반면에 나의 관심사는 똑같이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리어왕》에 나오는 켄트 백작의 말인 ‘나는 너에게 차이를 가르쳐 주겠다’를 책의 모토로 사용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의 관심은 삶의 환원불가능한 다양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플라톤 이래 아우구스티누스, 데카르트, 칸트, 헤겔에 이르기까지 철학은 보편타당한 그 무엇을 추구하였습니다. 때론 이데아로, 혹은 신으로, 또는 이성으로…. 어떻게 불리든 절대적이며 보편적인 그 어떤 존재만이 철학의 주제였지요. 주제가 인간일 경우에도 인간의 보편성, 즉 모든 인간의 공통점이 문제였지, 철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영희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개개인은 이 세계 속에 그저 하나의 점으로 사물화되어 존재할 뿐이었던 것이지요. 개인은 전체의 보편성으로 환원된 채, 개별적 차이는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세계를 뒤집어버립니다. 세계는 철수와 영희가 서로 좋아하고, 그러다가 헤어지고, 그렇게 엎치락뒤치락하며 만들어 가는 사실들로 구성되는 것입니다. 세계는 사물의 총체가 아니라, 사실의 총체입니다. 철수와 영희가 서로 사랑하고 헤어지는 모든 사실들은 결코 그 무엇으로도 환원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저 생생한 삶의 현실로 드러날 뿐, 어떤 보편자의 이름으로 언표되는 게 아닙니다.

   
▲ 영화 《봄날은 간다》 포스터,두 남녀의 시선은 언제나 엇갈린다.
사운드 엔지니어 상우(유지태 분)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백성희 분)와 젊은 시절 상처한 아버지(박인환 분), 고모(신신애 분)와 함께 살고 있다. 어느 겨울 그는 지방 방송국 라디오 PD 은수(이영애 분)를 만난다. 자연의 소리를 채집해 틀어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은수는 상우와 녹음 여행을 떠난다. 자연스레 가까워지는 두 사람은 어느 날, 은수의 아파트에서 밤을 보낸다. 너무 쉽게 사랑에 빠진 두 사람… 상우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에게 빨려든다.

그러나 겨울에 만난 두 사람의 관계는 봄을 지나 여름을 맞이하면서 삐걱거린다. 이혼 경험이 있는 은수는 상우에게 결혼할 생각이 없다며 부담스러운 표정을 내비친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묻는 상우에게 은수는 그저 “헤어져.”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영원히 변할 것 같지 않던 사랑이 변하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우는 어찌 할 바를 모른다. 은수를 잊지 못하는 상우는 미련과 집착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서울과 강릉을 오간다.

사랑은 변치 않는 영원한 것이라고 믿는 상우는 보편주의자입니다. 상우는 사물의 특수한 순간을 채집하여 영원 속에 넣어 두는 일을 합니다. 순간 생겼다 사라지는 소리를 테이프에 담는 게 그의 일이지요. 반면에 은수에게 사랑은 순간적인 격정입니다. 허공으로 전파를 날리면 그녀가 할 일은 끝나는 것처럼, 오늘밤 사랑하고 내일은 기약하지 않습니다.

상우에게서 사랑은 개별적인 사람들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영원히 변치 않는 어떤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랑에 충실하여야만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개개인이 갖는 호오(好惡)의 감정과는 무관하게 사랑은 그 자체로 숭고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이지요. 반면에 은수에게서 사랑은 한 사람과 한 사람 사이에 생겼다 사라지는 하나의 사건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구체적인 개인을 떠나 존재하는 사랑은 없습니다. 은수가 “사랑해.”라고 말할 때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좋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상우는 그 말을 “내일도 모레도 영원히 너만을 사랑할 거야.”로 이해합니다. 상우가 세계를 변치 않는 본질을 가진 사물의 집합으로 본다면, 은수는 개별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연쇄로 이해합니다. 상우의 태도가 플라톤 이래 서양철학 전통 속에 있는 것이라면 은수의 입장이 사실의 총체로 세계를 이해하는 비트겐슈타인 철학에 닿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세계를 이해합니다. 언어는 그 언어가 가리키는 대상과 대응합니다. 예컨대 ‘개(dog)’라는 이름은 네 발 달린 어떤 동물과 대응하지요. 그러므로 “한 여자가 개와 함께 공원을 달리고 있다.”라는 명제가 그려내는 사태를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명제와 사태간의 대응이론이 이른바 진리함수이론이며, 이 함수를 이용하여 인간은 세계를 그려냅니다. 바로 그림이론이지요. 이 이론에 의한다면 우리는 하나의 명제와 그 명제에 대응하는 사태의 대응여부를 경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이나 영혼, 혹은 제1원리 등과 같은 형이상학적ㆍ신학적 명제들은 그 명제와 대응하는 대상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그 진위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명제들을 비트겐슈타인은 무의미한 명제, 즉 헛소리(Nonsense)라고 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분명히 하고자 하였습니다. 말할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언표하고,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합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언표는 모두가 독단입니다. 처음부터 검증이 불가능한 주장인 것입니다. ‘신은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대표적인 독단이지요.

여기까지가 주로 《논고》를 통해 드러난 비트겐슈타인 전기철학의 개요입니다. 하지만 후기에까지 이어지며 평생을 두고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적 사색을 멈추지 않았던 것은 결국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는 논리학의 길을 걸어 윤리학의 세계로 나아간 것입니다.

3. 그들에게 전해 주시오. 나는 멋진 삶을 살았다고

세계는 사물의 총체가 아니므로 공(空)한 것입니다.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입니다. 사실들은 나와 너, 나와 그가 서로 관계를 맺으며 존재하는 것, 즉 색(色)입니다. 사실의 총체라는 말은 연기(緣起)하는 색의 총체라는 말과 같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색즉시공(色卽是空)의 세계에 대한 똑바른 깨달음이 곧 실상반야(實相般若)입니다. 문자반야(文字般若)는 실상반야에 이르기 위한 사다리입니다. 세계에 대한 그림과도 같은 것이 문자반야입니다. 우리는 지도를 들고 길을 찾아가듯이 문자라는 지도를 통해 세계의 실상에 도달합니다.

인생길 걷다 이르는 곳 무엇 같은지 아는가 人生到處知何似
눈 녹은 진흙길을 기러기 밟은 것 같지 應似飛鴻踏雪泥
진흙 위에 우연히 발자국 남기고 泥上偶然留指爪
기러기 날아가면 어디로 간지 어찌 알겠나 鴻飛那復計東西

소동파(蘇東坡)의 〈자유의 ‘민지회구’에 화답함[和子由澠池懷舊]〉이라는 시의 전반부입니다. 이 시에서 소동파는 먼저 인생은 어디를 향해 가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는 다만 눈 녹은 진흙길 위에 찍힌 기러기 발자국을 보여주지요. 기러기가 날아와 걷다가 우연히 찍힌 발자국. 이 발자국은 다만 기러기가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낼 뿐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갔는지는 말해주지 않습니다. 이제껏 살아온 인생의 자취는 그렇게 우연한 만남과 우연한 인연으로 맺어진 사실들과 대응하지요. 그런 것처럼 어디로 갈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마치 유마힐거사의 침묵처럼 묵묵히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저 말없이 오늘을 살아가는 것, 그게 경계반야(境界般若)는 아닐는지요.

1949년 10월에 전립선암 진단을 받고… 비트겐슈타인은 1951년 4월 27일까지 글을 썼습니다. 그 다음날 28일 의식을 잃고, 다시 그 다음날 29일 62세를 일기로 이 세계를 떠납니다. 의식을 잃기 전, 그를 만나기 위해 오기로 한 친구들에게 그가 전해달라고 한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에게 전해 주시오. 나는 멋진 삶을 살았다고.”

김문갑/철학박사,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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