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를 만나러 갈 때 첫 마음은 설렘이다. 약속 장소가 작업실이면 호기심은 배가 된다. 완벽한 그림이 탄생하기까지 버려지는 미완성 그림과 흐트러진 화구를 구경할 수 있다는 기대감은 화가의 속내를 엿보는 것 같은 감흥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석채화가 범해 김범수 화백(원광대 동양학대학원 회화문화재보존수복학과 주임교수)을 만난 곳도 작업실이었다.

김 화백의 작업실은 전남 장성 맥동에 있는 어느 시골 농가의 숨겨진 별채였다. 그의 손때가 묻었을 별채 앞 자그마한 정원에 놓인 디딤돌을 딛고 작업실 바깥 풍경을 흩었다. 시원하게 펼쳐진 논밭과 수림의 풍경은 소담한 맛이 있었다. 화폭 하나하나에 만물(萬物)의 오브제를 담아내는 예인(藝人)에게 그것들은 사색의 단초였을 것이다. 작업실에는 한지로 얼굴을 가린 고승들의 진영이 벽에 기댄 채 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해인사 큰 스님들의 진영을 그리고 있다”고 말했다.
한지 속 고승의 얼굴에는 옛 사진 한 장만을 관(觀)하며 걸어온 김 화백의 작업 삼매의 여정이 고스란히 담겨있을 것이다. 가장 가까운 진영의 한지를 조심스럽게 들췄다. 해인총림 율주 종진 스님이다. 다른 한지도 연달아 들추니, 지월 스님과 도견 스님의 진영이다. “앞으로 전등사 서운 스님과 성묵 스님도 그린다.”는 김 화백의 덧말처럼, 그는 이미 백양사 각진국사, 선암사 조사전 7대 조사를 비롯해 한암, 경봉, 탄성, 만암 스님 등의 진영을 다수 그렸다. 고승의 진영이야 다른 많은 화가들도 그렸지만, 그의 그림은 ‘문도회’에서 직접 모시고 있다는 점에서 각별하다.
이중 경봉 스님의 진영은 김 화백의 가치를 엿보게 한다. 그가 “큰 스님의 진영을 그려 달라”는 명진 스님(봉은사 주지)의 말을 들었을 때는 이미 동서양화 대가 7명이 큰 스님의 진영을 그린 후였다. 그러나 명진 스님을 비롯한 통도사 문도들은 큰 스님의 진면목을 담아내기에 부족함을 느꼈고, 결국 김 화백을 찾았다. 그의 경봉 스님 진영은 다른 화가들을 재치고 통도사 극락선원에 모셔져 있다.
김 화백의 그림에 주목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는 국내 유일의 회화문화재보존수복학과 주임교수로 불화 모사와 복원에 앞장서며, 고래(古來)부터 사용된 천연 안료인 석채(石彩)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몇 안 되는 화가 중에 한 명이고, ‘자신의 모든 공력을 쏟아 불화를 그렸던 고려시대 불모’의 모습을 담고자 노력하는 화가이다. 즉,‘그는 예인(藝人)의 정신과 장인(匠人)의 기술을 갖춘 화가’이고, 그를 주목하는 이유가 아닐까.
석채는 인류가 가장 먼저 사용한 안료이자, 대부분 고열 고압으로 생성된 귀석(貴石)을 원료로 한다. 즉, 석채는 보석의 가루인 셈인데, 석채로 그린 그림(일명 ‘석채화’)을 ‘보석화’라고 하는 이유이다. 또한 석채화는 물리적인 충격을 받지 않는 한 영구성을 잃지 않아‘만년화’라고도 한다. 그러나 ‘귀하고’ ‘영구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안료이지만,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같은 색이라도 입자 굵기에 따라 채도와 명도가 다르고, 말라야 제대로 된 색이 나오는 탓에 ‘봉사가 그림 그리듯’ 힘든 그리기 과정을 밟아야 한다. 김 화백은 “손끝만으로 색(色)의 차이를 알아채는 감각을 익히기 전까지는 붓을 긋는 순간까지도 ‘눈뜬 봉사’와 다름없다”며 “석채를 자유자재로 다루기까지는 십여년 훌쩍 넘기는 수련을 ‘끙끙 앓으며’ 견뎌야 한다”고 말했다. 설사 ‘그 감각을 익혔다’고 할지라도 석체화 한 점을 그리기 위해서는 “수십일에서 수개월까지 하루 종일 작업에만 매달려야 하는 ‘인고(忍苦)의 중노동’을 이겨내야 한다”고 그는 덧붙였다. 그러나 결과는 남다르다. 천연색이 담긴 돌가루로 그린 석채화는 모든 것이 변해가는 이 시대에 진정한 영원성에 대한 깊은 사유를 던지고, 그림의 입체감을 극대화하여 독특한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불화는 구한말 이전까지도 석채로 그려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00년대 들어온 화학안료에 밀려 석채로 불화는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물론 석채화 기법도 중단되고 말았다. 그가 석채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중반 일본에서 경도시립예술대학을 다니면서이다. 그는 그 대학에서 석 박사 과정을 밟고 우리나라 최초로 ‘문화재보존수복’분야의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 논문은 『중앙아시아 벽화의 보존처리법에 관한 일제안-베제클릭 벽화의 현상모사를 중심으로(‘中央アジア壁?の保存?理法に?する一提案?ベゼクリク壁?の現?模?を中心に’』.
“문화는, 그것의 정신을 잇고 향유하는 사람들이 많을 때 보존될 수 있고, 그 가치도 돋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그런 생각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같은 전각이라도 그 목재가 육송이냐 미송이냐에 따라 차이가 크듯이, 석채와 화학안료의 차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선 전기까지의 불화가 찬사 받는 것은, 불화를 부탁한 사람과 그리는 사람의 ‘간절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두 사람의 마음은 예전의 마음이 아닙니다.”
김 화백이 담고 있는 ‘간절한 마음’은 바로 ‘하심하고 기도하며 고려시대의 불모(佛母)처럼 혼이 깃든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노력’을 말한다. 그리고 그 노력은 화(和)와 적(寂)이 공존하는 선경(禪境) 즉, 예술의 조형성을 넘어 깊은 명상의 그림으로 나타난다.
그는 지금도 광복 60주년이 되던 해에 일본에 강탈당한 국보급 불화인 ‘관세음보살 32응신도’를 모사 복원했던 감흥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 불화는 인종대왕(조선)의 명복을 빌기 위해 인성왕후가 발원 제작해 도갑사에 봉안한 것으로, 정유재란 때 유출되어 교토 지은원(일본 정토종 총본산)에 소장되어 있다.
“해외 유출 불화(특히 고려불화)의 반환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만큼 ‘현상 모사’로도 공유해야 한다”고 강조한 김 화백은 “국내 불화나 벽화 역시 모사품을 제작해 대체 전시하는 것으로 훼손, 도난, 소실의 위험을 줄여야 한다”고 덧붙이며, 작업실 한 쪽 벽면에 세워놓은 ‘고쟁’을 들어 협탁에 비스듬히 언져놓고 연주하기 시작했다.
좋은 작품이란 좋은 작가 뿐만 아니라 좋은 대중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문화의 소통이 일방적이 아닌 쌍방적으로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럴수록 작품 생산자와 수용자의 지적 수준은 향상은 꼭 필요하다. 이미 생산자와 수용자의 경계가 희미해졌기에 결국 좋은 작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좋은 수용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범해 김범수 화백 역시 사람들이‘석채’의 가치를 알아주고, 그것을 적극 선택하는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종욱/본지 편집실장

범해 김범수 화백은 경도시립예술대학 미술학 박사, 동 대학 대학원장상 수상, 대한민국 미술대전 특선, 현재 원광대학교 동양학대학원 교수, 문화재보존수복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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