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림없이 죽음에 대한 인식과 삶의 고통과 비참함에 대한 고려야말로 세계에 대해 철학적으로 사색하게 하고 그것을 형이상학적으로 설명하게 하는 가장 강한 자극이다.
―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1. 언표될 수 없는 대답에 대해서는 물음도 언표될 수 없다

한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강의 3분의 1쯤 왔을 때 철학자가 사공에게 물었습니다.

철학자 : “그대는 신을 아는가?”
뱃사공 : “모릅니다.”
철학자 : “음! 그대는 인생의 절반을 헛살고 있군.”

배가 강 한 가운데를 지날 때쯤 다시 철학자가 물었습니다.

철학자 : “그대는 신을 아는가?”
뱃사공 : “모릅니다.”
철학자 : “그래! 그대는 그나마 절반의 인생조차 반도 제대로 못 살고 있군.”

순간 갑자기 돌풍이 불며 배가 뒤집혔습니다. 사공은 헤엄쳐 강가로 나왔습니다. 하지만 철학자는 헤엄칠 줄 몰랐기 때문에 물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었지요. 뱃사공이 철학자를 향해 말했습니다.

“나는 신도 모르고 철학도 모르오. 하지만 그대는 모든 걸 다 알면서도 그저 헤엄칠 줄 몰라 인생을 그만 종치려하고 있구려!”

이 우화가 수영 얘기는 아닐 겁니다. 철학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들의 공허함을 비꼬고 싶은 거겠지요. 전통적으로 철학이 제기하는 주요한 과제가 있습니다. ‘만물의 근원자’, ‘궁극적 존재’, ‘제1원리’, ‘신’, ‘삶의 본질’ 등과 같은 개념들은 철학 중에서도 형이상학의 주요 과제이며, 철학이 존재해야하는 이유를 보장하는 것들이지요.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탈레스부터 이 문제는 간단없이 제기되었고, 그 해답은 여전히 모색중입니다. 아직까지도 답이 안 나왔냐구요? 그렇습니다. 답이 나왔다면 더 이상 질문을 던지지 않을 것입니다.

“언표될 수 없는 대답에 대해서는 물음도 언표될 수 없다.”

말로 질문이 가능하다면 대답도 말로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말로 대답할 수 없다면 질문도 말로 할 수 없는 것이지요. “의심이란 오직 물음이 존립하는 곳에서만 존립할 수 있고, 물음이란 대답이 존립할 수 있는 곳에서만 존립할 수 있으며, 또 대답이란 어떤 것이 말해질 수 있는 곳에서만 존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이니 삶의 본질이니 하는 형이상학적 과제들에 대한 질문이 존재한다는 얘기는 곧 대답도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수천 년간 여전히 같은 질문이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혹시 이런 질문은 말로 행해지고 말로 대답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은 아닐까요? 이렇게 생각한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철학사에 등장하는 무수히 많은 형이상학적 개념들은 본래 대답할 수 없는 것들인데 질문으로 던져졌다고 합니다.

2. 당신이라면 이래도 살겠어요?

▲ 영화 《밀양》 포스터. 포스터는 신애의 절망과 햇살을 대비하며 보여주고 있다.
서른 세 살. 남편을 잃은 그녀는 아들 준과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가고 있다. 이미 그녀는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피아니스트의 희망도 남편에 대한 꿈도... 이 작은 도시에서 그 만큼 작은 피아노 학원을 연 후, 그녀는 새 시작을 기약한다. 그러나 관객은 이내 곧 연약한 애벌레처럼 웅크린 그녀의 등에서 새어 나오는 울음소리를 듣게 된다. 그리고 그녀가 던지는 질문에 부딪히게 된다. “당신이라면 이래도 살겠어요?...”

죽은 남편의 고향 밀양에서 신애(그녀)는 마지막 의지였던 아들까지 잃습니다. 아들 준은 유괴되었다가 시체로 발견되지요. 그 참혹함 앞에서 신애는 망연할 뿐입니다. 그런 신애에게 교회는 또 다른 의지처가 되어줍니다. 신앙은 구원의 빛이었지요. 하나님 앞에서 평화를 찾아가지만, 그러나 궁극적인 평화는 오지 않습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또래 아이들을 보거나, 해가 서쪽으로 기울라 치면 문득 문득 떠오르는 아들 생각은 이 생이 다하여야만 멈출 수 있는 것일 겁니다. 신애가 그 고통에서 벗어나 진정한 평화를 찾는 길은 오직 살인자 박도섭을 용서하는 길 뿐입니다. 용기를 내어 박도섭을 용서하러 그가 수감되어 있는 교도소를 찾아갔는데……

신애의 절망은 박도섭을 용서하고 싶어도 용서할 수 없는 데서 극한으로 치달립니다. 왜냐하면 박도섭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정작 신애가 나설 자리는 없었던 것이지요. 결국 신애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죽음뿐입니다. 그래서 던져지는 질문입니다. “당신이라면 이래도 살겠어요?”
본래 이 영화의 원작인 이청준의 《벌레이야기》는 용서를 주제로 신과 인간의 관계를 다루는 것입니다. 용서가 인간이 존엄할 수 있는 권리일진대, 이를 신이 박탈한다면 인간이 과연 존엄할 수 있느냐고, 그런 인간은 벌레와 다를 게 무엇이냐고 묻는 것이지요. 원작에서 신애 ― 원작에서는 신애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고 알암이 엄마, 혹은 그냥 아내로 나온다. ― 는 박도섭이 사형당한 이틀 후에 자살합니다. 한 아이의 엄마로, 한 남자의 아내로 이름조차 잃어버린 한 여자는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고 죽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신애를 살립니다. 살아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줍니다. 그러기까지 극한에 다다른 고통을 보여줍니다. 그 고통의 끝자리에서 신애는 스스로 팔목을 긋지요. 그리고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팔을 들고 어두운 거리에 나서서 신애는 말합니다. “살려주세요!”

3.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신애가 살아가야할 이유를 물었다면 그 이유가 찾아져야 대답이 되겠지요. 만약 대답하지 못한다면 그건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원작 《벌레이야기》에서 아내가 자살한 이유이지요. 아내는 답을 찾지 못합니다. 극한의 절망속에서 그냥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영화 《밀양》에서 신애는 살아납니다. 살아야할 이유를 찾은 거지요. 하지만 영화는 그 이유를 말로 하지 않습니다. 정신병원에서 퇴원하며 들른 미장원에서 원수의 딸인 정아에게 머리커트를 맡기는 걸로 용서를 표현합니다. 그리고 남은 고통의 해소는 스스로 남은 머리를 자르는 것으로 드러냅니다. 잘려진 머리카락은 바람에 날려 하수구로 들어가고 하수구에는 햇살이 비춥니다. 마치 하느님은 가장 낮은 곳에 임한다는 걸 보여주려는 듯이.... 신애는 살아야하는 이유도, 삶의 본질도, 그리고 용서도, 화해도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햇살만이 비출 뿐이지요.

“이것이, 오랫동안의 회의 끝에 삶의 뜻을 분명하게 깨달은 사람들이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 말할 수 없었던 이유가 아닐까?”

▲ 레이 몽크 지음, 남기창 옮김, 《비트겐슈타인 평전》 표지. 〈천재의 의무〉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그럴 겁니다. 진정으로 삶의 의미를 깨달은 사람들은 ― 그들은 아마도 극한의 고통이나, 직면한 죽음을 겪은 사람들입니다. ― 인생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건 말로 드러낼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지요.

“실로 언표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이것은 드러난다. 그것은 신비스러운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하여질 수 있는 것’과 ‘말하여질 수 없는 것’을 분명히 나누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말하여질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엄밀하게 말하고, ‘말하여질 수 없는 것’은 침묵하라고 합니다. ‘말하여질 수 있는 것’은 자연과학의 명제들뿐입니다. 형이상학이나 미학, 혹은 신학의 주요 명제들은 ‘말하여질 수 없는 것(What cannot be said)’들입니다. 그것들은 단지 ‘보여질 수 있는 것(What can be shown)’입니다. 그것들은 스스로 드러납니다. 그러기에 신비한 것이지요. 신비란 어떤 비의적인 것이란 의미가 아니라, 설명할 수 있는 논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삶의 문제의 해결은 이 문제의 소멸에서 발견된다.”

신애를 절망속으로 빠뜨렸던 문제는 어떤 해답이 있어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신애는 신과 싸우며 해답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애초부터 신과의 싸움은 결코 문제에 대한 답이 될 수 없는 것이지요. 그건 신이 위대하고 절대적인 존재여서가 아니라, 신이란 존재 자체가 ‘말하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은 다만 삶 속에서 ‘보여지는 것’입니다. 한 줄기 햇살이 비추듯 그렇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 삶의 문제는 자연스레 소멸되는 것이고요.

“나의 명제들은 다음과 같은 점에 의해서 하나의 주해 작업이다. 즉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만일 그가 나의 명제들을 통해 ― 나의 명제들을 딛고서 ― 나의 명제들을 넘어 올라간다면, 그는 결국 나의 명제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인식한다. (그는 말하자면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는 그 사다리를 던져 버려야 한다.) 그는 이 명제들을 극복해야 한다. 그러면 그는 세계를 올바로 본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반야(般若)’는 번역될 수 없어서 범어 프라즈나(prajna)를 그냥 소리 나는 대로 적은 것입니다. 흔히 무분별지(無分別智)라고 하는데, 이는 번역어가 아니라 설명하는 말입니다. 이 말이 번역이 안 되는 이유는 물론 적당한 한자어가 없어서이겠지만, 보다 더 근원적인 이유는 어떤 논리로 분석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어로 사고하고, 사고하여야만 분석하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지혜를 분별지(分別智, vijnana)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에 비해 반야는 무분별지(無分別智)입니다. “법의 주체적인 체험을 통하여 (…) 주객의 대립을 초월한 경지에서 감득할 수 있는 주체적인 의식”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설명해 놓으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반야는 신애가 죽음밖에는 달리 출구가 없던 그 극한의 절망 속에서 살려달라고 호소할 때 문득 찾아오는 깨달음입니다. 마치 머리카락 커트하듯 훌훌 던져버릴 때 홀연 느껴지는 어떤 것입니다. 반야는 스스로 드러날 뿐입니다.

삶의 심연을 들여다 본 적도 없이, 오도송(悟道頌)을 읊는 사람들도 꽤 있는 것 같습니다. 반야는 몇 년 참선했다고 “하늘에는 흰 구름 떠 있고 / 땅에는 붉은 꽃 피었네”하는 류(類)의 싯구나 흉내 내는 땡초들이 도달할 수 있는 경계가 아닙니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스스로 드러나는 깨달음이 아니면 결코 반야라 할 수 없습니다.

다음 회에는 비트겐슈타인의 삶을 통해 반야의 의미를 곱씹어 보려 합니다.

김문갑/철학박사,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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