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하면서도 순수한 감성을 갖고 있는 영화가 보고 싶었습니다. 아이들의 순수한 믿음을 다뤘던 <도둑맞은 여름>과 같은 영화에 목말랐었습니다. 이번에 만난 영화는 이런 목마름을 채워주기에 적당했습니다. 아이들이 등장하고 순수한 정서가 지배적이고, 거기다 불교적 가르침이 있고, 완벽한 불교 영화였습니다.

<컵>(1999)이라는 부탄 영화입니다. 원제는 <phorpa>이며, 영어제목은 <The cup>입니다. 제목에서 나타나듯이 축구를 소재로 한 불교영화입니다.

배경은 티베트 임시망명정부가 있는 인도 다람살라의 어느 사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어린 애들 승가학교입니다. 티베트나 부탄 등 라마불교를 믿는 나라에서는 이런 종류의 학교가 많습니다. 아이 때부터 한 곳에 모여서 착실하게 불교공부도 하고, 의식도 습득하고, 수행도 하면서 장차 훌륭한 스님으로 성장하는 것이지요. 세계에서 활동하는 티베트 스님이 많은데 다들 이런 엘리트 교육을 통해서 배출됐고, 불법포교에 한 역할을 담당한다고 봅니다.

영화는 티베트에서 니마와 팔덴이 사원으로 오면서 시작됩니다. 니마라는 소년과 팔덴이라는 청년은 중국 지배하에 있는 티베트를 탈출해서 사원으로 옵니다. 부모님이 달라이라마가 계신 곳에서 불법 배우기를 희망했기 때문에 두 소년은 위험을 무릅쓰고 티베트를 탈출하여 이곳까지 온 것입니다.

불법을 배우기 위해 도착한 학교에서 그들은 뜻밖의 상황과 마주치게 됩니다. 엄숙하고 경건하리라 예상했던 학교는 온통 축구광풍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룸메이트는 경전대신 스포츠잡지를 끼고 살고, 그것도 부족해 벽을 온통 축구 스타들로 도배했습니다. 사원은 ‘파라과이 이겨라’ ‘독일 만세’와 같은 낙서들로 얼룩져있고, 엄숙해야 할 법회시간도 별반 다르지가 않습니다. 주지스님이 의식을 진행하고 있는 가운데 뒤에 앉은 어린스님들은 축구 얘기로 수군거립니다. 팔덴과 니마가 왔을 때는 ‘98 프랑스 월드컵’ 시즌이었고, 월드컵 열기는 이곳 승가학교에도 불어 닥친 것이었습니다.

팔덴과 니마는 열심히 불법을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이걸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열혈 축구팬인 룸메이트 오기엔(재망 로도)은 팔덴을 꼬셔서 결국 마을로 내려가 월드컵 준결승전을 구경하는 위험을 감수하게 했습니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월든컵을 시청했었는데 너무 흥분한 오기엔이 떠들었고, 그래서 텔레비전도 끝까지 다 못 보고 쫓겨났는데 설상가상으로 호랑이 사감인 게코스님(오르기엔 토브기알)이 이들을 찾으러 왔습니다. 게코스님에게 끌려간 이들은 한밤중 사원을 탈출한 죄로 정말 하기 싫은 식당 당번 벌을 받게 됐습니다.

그런데도 오기엔은 결승전을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을로 또 내려갔다가는 사원에서 쫓겨날 게 뻔했습니다. 고민을 거듭하던 그는 마침내 한 가지 아이디어를 생각해냈습니다. 바로 텔레비전을 절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마을로 내려가지 않아도 되고 절에서 쫓겨날 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꽤 무모해 보이는 생각이었는데 의외로 일은 잘 풀렸습니다.

아이들에게서 압수한 축구 잡지를 꾸준히 보아오면서 그 열망을 이해했던 게코스님이 이 제안에 대해서 주지 스님과 상의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축구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주지 노스님을 설득하기 위한 게코스님의 설명은 매우 유머러스했으며, 이 영화가 갖고 있는 매력의 한 단면을 보여주었습니다.

주지스님 : 월드컵이 뭔가?
게코스님 : 공을 사이에 두고 두 나라가 싸우는 것입니다.
주지스님 : 전쟁은 언제 벌어지나?
게코스님 : 오늘 밤 자정입니다.
주지스님 : 묘한 시간에 시작하는군. 싸워서 이기면 얻는 건 무엇인가?
게코스님 : 컵입니다.
주지스님 : 부녀자를 강간하는 일도 일어나나?
게코스님 : 그런 건 없는 듯합니다.

게코스님의 설명을 통해 어린스님들에게 무해하다고 판단한 주지스님은 마침내 텔레비전을 허락합니다. 그런데 텔레비전을 빌리기 위해서는 인도인에게 많은 돈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오기엔 일행은 다른 스님들한테서 돈을 각출해서 텔레비전을 빌리러 신나게 트랙터를 타고 갑니다. 그런데 텔레비전은 그들이 갖고 간 돈보다 50루피는 더 비쌌습니다. 돈을 더 구할 길 없어 낙심하고 있을 때 마침 니마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니마에게는 티베트에서 넘어올 때 엄마가 준 회중시계가 있었고, 축구에 도취된 일행은 니마에게서 거의 빼앗다 시피해서 회중시계를 가져가 담보로 맡기고 텔레비전을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결승전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가장 행복해야할 순간 오기엔은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손톱에 가시가 꽂힌 것 마냥 찜찜했습니다. 시계를 빼앗긴 니마의 괴로워하는 모습이 계속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축구를 보다말고 오기엔은 자기 방으로 뛰어갑니다. 엄마에게서 받은 칼과 자신이 또한 가장 아끼는 축구화를 찾아냈습니다. 이것들을 담보로 맡기고 니마의 시계를 찾아올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 게코 사감이 나타나 오기엔의 계획을 듣고는, “장사를 잘 못하는 것을 보니 장차 훌륭한 스님이 되겠다”고 흐뭇해하면서 빚진 50루피를 대신 갚아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영화는 막을 내렸습니다. 행복하고 따뜻한 결말이었습니다.

영화는 축구에 빠진 어린 스님들과 이들을 걱정하는 어른 스님들의 갈등이 주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 갈등은 티베트의 정치 현실과 스님들이 처한 사회 문화적 환경에 대한 가치관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티베트에서 망명해 늘 짐을 쌌다 풀면서 오매불망 티베트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는 주지 스님은 젊은 스님들이 걱정됐습니다. 앞에서도 나왔지만 축구라는 단어조차도 모르는 주지스님에게는 이 모든 현상이 낯설기만 했습니다. 공부하고 수행만 일삼아온 주지스님에게 지금의 스님들은 사회에 빠르게 물드는 모습이었고, 자신이 그리워하는 티베트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는 모습이었기에 이 스님들이 이끌어갈 미래의 불교와 미래의 티베트를 걱정했던 것입니다.

영화에는 이렇게 세대 간의 갈등이 약간씩 보이는 편입니다. 그렇지만 영화 말미에서 세대간 갈등은 조화롭게 마무리됩니다. 누구보다도 축구에 빠져있던 오기엔은 자신이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결승전을 마다하고 타인의 아픔에 마음 아파하고, 또한 자기 것을 모두 내놓는 희생정신을 보여줍니다. 오기엔의 모습을 통해 영화는, 비록 시간이 흘러 스님들이 현실문화를 받아들이고 적당하게 사회와 타협하지만 불교의 근본마음인 자비심과 이타심을 잃지 않으면 된다는 결론을 보여줍니다.

또한 영화는 축구열풍을 통해 성장하는 어린 스님들의 모습도 보여주었습니다. 축구에 대한 욕망으로 들끓던 오기엔은 결승전을 보면서 그 욕망으로 생겨난 고통을 체험했습니다. 욕망이 고통을 가져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고 할 때 니마는 어머니에게서 받은 가장 소중한 회중시계를 잃어야 했고, 상실감에 고통을 받아야했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오기엔은 욕망은 고통과 더불어 다닌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부처님께서는 ‘일체개고(一切皆苦)’라고 하셨습니다. ‘삶이 곧 고통’ 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우리가 사는 사바세계를 ‘욕계(欲界)’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삶을 이끌어가는 본질이 욕망이라는 것이지요. 이 말들은 결국 고통과 욕망 사이의 인과관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욕망이 있기 때문에 고통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욕망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고요. 오기엔은 축구를 통해서 단순한 이 진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축구라는 에피소드를 통해서 불교의 가장 중요한 진리를 보여준 영화였습니다. 효과적인 설법이었습니다.

영화가 이렇게 효율적인 방법으로 깨달음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영화를 만든 감독의 삶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 영화 <컵>을 만든 키엔체 노르부는 스님이면서 영화감독입니다. 스님일 때는 종사르 켄체 린포체로 불리는데, 그는 부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잠양 키엔체 왕포의 화신이라고 합니다. 라마불교에 대해서 생소한 우리나라에서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세계적으로 꽤 유명한 스님이라고 합니다. 이런 훌륭한 스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불교영화, 결과는 좋은 편이었습니다.

<컵>은 그의 처녀작이지만 아마추어적이지 않습니다. 축구에 빠진 사원이라는 단순한 에피소드에 불교적인 메시지와 티베트의 정치적 현실 등을 조화롭게 버무려 만든 영화입니다. 이 영화로 부산국제 영화제에서 국제영화평론가 협회상을, 토론토 영화제에서는 관객상을 수상했습니다. 스님이 만들었고, 실제 스님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불교영화, 기대해도 좋습니다.

김은주/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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