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는 활동적인 여성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들의 활동을 ‘치맛바람’으로 비웃는 경향이 있다. 최근까지도 『우리말 큰사전』 『엣센스』 등 대부분의 국어사전들이 치맛바람을 ‘여자들의 극성스러운 사회 활동’ ‘설치는 여인의 서슬’ 등으로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의미로 해석했다. 그러나 90년대에 이르러 ‘모성의 사회화’가 적극 대두되면서 치맛바람을 ‘여성의 세력’ 또는 ‘사회 활동을 반영하는 것’으로 정의하는 국어학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문화 여성주의

77년 가을 이화여대에 국내 처음으로 여성학 강좌가 개설된 이후 20여년동안 우리 사회에서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이 크게 변모했다. 여기에는 20세기의 가장 성공한 이데올로기로 꼽히는 여성주의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최근 여성학계는 관습이 낳아온 남성우월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문화여성주의’를 주장해 주목 받고 있다. 문화여성주의란 여성적인 것, 즉 여성의 경험과 인식 그리고 감성이 인류 전체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말한다. 이것은 남성과 여성을 달리보고 여성 권리 찾기 일변도였던 과거의 여성주의에서 많이 벗어난 셈이다.

이수자(성신여대 강사·여성학)씨는 “문화여성주의는 모성을 바탕으로 욕구충족에 치중하는 자본주의, 과학주의, 소비주의 구조를 변화시키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라고 설명한다.

젠더(Gender)의 인식

사회 발전에 기여하려는 20세기의 여성들은 대부분 권위적이고 편협한 남성중심의 가정과 사회 질서에 충돌해 왔다. 여성학자들은 ‘치맛바람’이라는 말도 이 질서의 부산물로 보고 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우리 나라는 여성의 활동을 편견과 이중적인 잣대로 재단하려는 속성이 강하다”고 반박하고 있다. 신도시에서의 교육환경 개선노력과 아파트 공사장에서의 암벽발파공사 반대를 남성들이 주도했더라면 ‘바짓바람’이란 이름으로 비아냥거릴 수 없었을 것이란 지적이다.

여성 영화인들이 98년 흥행작 ‘처녀들의 저녁식사’를 최고의 영화 2위, 최악의 영화 2위로 각각 선정한 것도 남성중심주의에 대한 일종의 비판이다. 그들은 기존 여성 접근에서 벗어난 이 영화가 생각거리를 제공해주었지만, 여성들이 결국은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남성 감독의 시선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사실 우리 나라에서 여성의 자리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조차 부족한게 현실이다. 우리 사회의 낙태 실상을 통해 골깊은 남성 선호사상을 파해쳐 큰 반향을 일으켰던 논문 ‘초음파기술이 여성들의 임신경험에 미치는 영향’(97년)에서 여성학자 서정애씨는 “우리 사회에서 아들을 못낳는다는 것은 여자 스스로 지식과 돈이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행위”라며 “선별 임신기술이 발전하면 한국의 성비는 169:1(남성:여성)에 이를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 아줌마를 가장 천덕꾸러기 계층으로 꼽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남성중심적 사회의 통념으로 아줌마의 정의는 바로 성적 긴장과 유혹을 상실한 나이든 여자이다. 그러다 보니 아줌마들은 수다, 무례, 탐욕, 억척, 무식, 극성의 대명사처럼 폄하되고 있다.

이에 대해 여성학계는 여성을 생물학적 성별인 섹스(Sex)가 아닌 젠더(Gender)로써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젠더란 사회문화적으로 형성된 성별을 뜻한다. 사회문화적으로 본 아줌마는 결코 천덕꾸러기가 아니다. 한의사 고광순씨는 “출산을 통해 생명존중사상을 갖는 여성은 사회를 살리는 원초적 힘이 된다”고 말한다. 시인 김지하씨는 “모성을 바탕으로 생명사상을 실천하는 아줌마야 말로 한국사회를 개혁시킬 주역”이라고 강조했다.

서울 구로구에 뿌리 내리고 있는 아줌마조직 ‘새날 여성회’는 그 가능성을 보여준 예이다. 93년 12월 이 지역 주부들이 만든 지역여성자치조직인 여성회는 아줌마 인형극단 표주박은 물론 무의탁노인, 소년소녀가장 돕기, 재활용운동 등을 체계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또 4년전 시작한 구시의회 방청단 활동도 새날여성회 아줌마들을 어느새 지역 정치의 무서운 감시단으로 만들었다.

낳고 기르고 지키는 ‘모성’이 하나가 돼, ‘내 아이’가 아닌 ‘우리 아이’를 길러내고 더 나아가 환경운동 공동육아조합운동 참교육운동 아나바다운동 등을 전개해 지역 공동체를 가꾸고 있는 것이다.

여성성, 21세기 원융사상

여성성의 인식은 불교계 여성불자들 사이에서도 일고 있다. 올 올1월 발간된 <여성불교>지에 따르면 여성불자 415명을 상대한 설문조사에서 ‘당신이 성불할 수 있는냐’는 질문에 63%가 ‘그렇다’고 응답한 반면 ‘아니다’라고 답변한 여성은 5%에 불과했다.

여성불자들이 ‘여성은 내세에 남성으로 태어난 뒤 성불할 수 있다’는 수동적 교리 해석에서 탈피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목소리가 실제로 교계에서 받아들여질지에 대해 많은 여성불자들이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게 현실이다. 우리 나라의 여성불자는 가부장제 사회구조와 남성중심적 종교라는 두 겹의 굴레에 쌓여, 19세기식 공양간에서만 능동적인 역할을 수행해 왔기 때문이다.

이같은 현실에서 생명을 창조하고 기르는 여성성이야 말로 유사 이래 남성중심 사회가 만들어낸 지구와 인류의 폐해를 치유할 수 있는 원융적 가치관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여성학자와 운동가들의 말은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이다.

미래학자들도 지식정보사회로 요약되는 21세기에는 좁게는 가정과 직장에서 넓게는 정치·경제·사회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이 창조될 것이며, 특히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여성의 위상은 과거와는 사뭇 다르다는게 일관된 지적이기도 하다.

21세기는 상업적 자본주의로 발생한 환경오염 빈부격차 공동체파괴 등의 문제가 가장 핵심적인 주제로 부상하는 시기로 예측되는 만큼 생산성주의를 벗어난 원융적 삶으로의 전환이 요구된다. 즉, 생명·양육·조화로 설명되는 여성성은 21세기 사회의 가치관을 결정하는 핵심적인 요소로 자리잡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세기말에 이르러 여성주의가 생태학·카오스이론 등과 더불어 밀레니엄 담론으로 꼽히는 데는 이같은 배경이 깔려 있다.

따라서 대한불교 조계종이 올 년말 종단차원의 불교여성활동단체인 ‘불교여성교육개발원’(가칭, 이하 개발원)을 설치하고, ‘맹신적 기복신앙 극복’ ‘여성차별 극복’ ‘여성인력 양성’ 등을 최우선 과제로 삼은 것은 시대적 요구를 적절히 반영한 것으로 평가된다.

또 개발원과 같은 불교계의 여성단체에 의해 깨친 여성불자들이 생명과 보살핌이 넘쳐 흐르는 공동체사회를 만드는 여성운동의 행렬에 적극 동참하고, 빈곤과 폭력의 악순환 등 우리 사회의 비관적인 현상과 맞서는 것도 불교계의 몫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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