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붓으로 한 자 한 자 정성을 다해 부처님 말씀을 종이에 옮겨 적는 사경(寫經)과 그 내용을 압축해 섬세하고 정교하게 그린 사경변상도(寫經變相圖)는 신심(信心)과 예심(藝心)의 ‘극치’다. 그리고 한국사경연구회 김경호(서예가·사진) 회장은 그 정점에 서 있는 인물이다.
전통사경을 완벽하게 복원했을 뿐 아니라 전통사경에서 미흡했다고 평가되는 부분까지 사경이 갖춰야 할 진면목을 밝혀내며 사경의 영역을 확장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전통사경 1인자’로 불리는 김 회장이지만, 한국사경연구회 사무실에서 만난 그에게서 초심자의 불같은 열정과 끈기가 느껴졌다.

김 회장은 “사경(변상도)은 신앙이라는 용광로에 학문·미술·역사·서예 등을 융합한 예술”이라고 말한다. 사경(변상도)을 하려면 서예를 비롯해 회화와 공예적인 요소까지 아울러야 하고, 경전을 해독하고 표현하는 방법에 관한 연구도 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어떤 예술보다도 종합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돈황학’이나 ‘대장경학’처럼, 사경(변상도) 역시 ‘사경학’으로 특화시켜, 그것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 방법을 정립·재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가 붓을 잡기 시작한 것은 다섯 살 안팎. 전북 김제 지역 향교의 전교(典校)를 지낸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붓글씨를 시작한 것이다. 학교를 다닐 때에는 스스로 구양순·황희지의 글씨를 익히며,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서예대회의 상을 휩쓸었다. 그렇게 40여 년이 되도록 붓을 놓지 않은 채 한 길만을 걸어온 결과, 그는 지금 ‘사경(변상도) 1인자’가 되었다. ‘외길’이라는 그의 호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에 다가가는 수행’이자, ‘가장 소중한 전통문화’라는 고집으로 수많은 역경을 이겨낸 것이다.

김 회장이 사경을 ‘가장 소중한 문화 자산’으로 여기는 것은, “(사경이)고려시대에는 가장 뛰어난 예술작품으로 승화됐다.”는 그의 말로도 알 수 있다. 그에 따르면, 고려시대(약 500년)에만 금자대장경, 은자대장경. 목판대장경 등을 포함해 무려 10회 이상 대장경을 만들어졌던 ‘사경의 시대’였다. ‘고려청자’에 비견할 정도로 대표적인 예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경은 조선시대에 억불정책으로 퇴색되기 시작했고, 현대에 이르러 그 맥조차도 끊길 위기에 처했다. 그가 ‘사경’에 매달리기 시작한 게 그 즈음이다.

김 회장은 우선 고려사경의 진면목을 알리기 위해 두 팔을 걷어붙였다. 언론매체와 방송 등을 통해 사경의 중요성을 수없이 역설했다. ‘사경의 기법’, ‘사경서체’, ‘또 다른 수행-사경’ 등을 주제로 책을 펴내는 한편, 문화센터와 대학사회교육원 등에서 강의도 했다. 연세대 사회교육원에서 1999년 서예 지도자 과정을

신설했을 때, 그는 첫 지도교수로 활동했다. 또한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교육원·포교원 등에서 ‘사경수행법 연구 및 조사집필 자문위원’을 맡기도 했다. 특히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개인전과 단체전 등 수십여 차례의 전시를 통해 고려사경의 우수성을 국내·외에 꾸준히 알렸다.

사경(변상도)의 가치를 알리기 위한 특별한 노력만큼이나, 김 회장의 사경 과정 역시 엄격하다. 국내 전통사경의 복원을 넘어 세계 속으로 나아가려고 하다 보니 작업 과정 자체가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 그는 사경을 위한 첫 번째 준비로 먼저 사경지를 선택하여 도침과 포수를 한다. 먹이나 금·은니 같은 재료의 사용에 있어서도 최상의 품질만 사용한다. 사슴뿔에서 추출한 녹교를 끊인 후 3일 이상 쓰지 않고, 금니와 은니는 100% 순도를 유지하기 위해 섬세히 정제하여 사용한다. 최상의 재료를 만든 후에야 작업을 시작하는 것이다.

“사경이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불과 20여년 전입니다. 지금은 사경인구가 많이 늘어 150만명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故 장충식 교수님의 역할이 정말 컸습니다. 제가 은사로 모셨는데, 그분의 격려가 없었다면 도중하차했을 겁니다. 2005년 은사님이 돌아가실 때 백아절현(伯牙絶絃)의 심정으로 사경을 그만두려고 했거든요.”

불교미술사학자로 이름을 떨쳤던 고 장충식 교수는 생전에 김 회장의 사경을 보고 “고려시대의 그것보다 훨씬 정교하다.”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또 한글 궁서체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꽃뜰 이미경 선생은 “한글 궁체를 발전시키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했으며, 문화재위원과 여러 미술사학자들로부터 “인간문화재의 경지를 넘어섰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김 회장의 작품이 많은 이로부터 인정받는 것은 사경에 대한 그의 정성과 애정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경을 할 때면 그는 먼저 몸과 주변을 청결히 하고, 마음을 바로 잡기 위해 참선과 간경(看經)을 한다. 그리고 여러 절차를 걸쳐 글을 쓸 때는 한 글자 한 글자에 모든 정성을 기울여 오직 일심(一心)으로 써내려 간다. 한 순간이라도 삿된 생각을 하거나 마음이 흐트러지면 자칫 실수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경은 때때로 초인적인 인내를 요구하기도 한다. 지난 96년 가로 16m×세로 3m의 규모의 한지에 『금강경』을 사경할 때는 숱한 밤샘 작업으로 인해 두 달만에 몸무게가 12㎏이나 빠지기도 했다.

김 회장의 사경이 남다를 수 있는 것은 또다른 이유는 사경과 서체에 대한 탄탄한 이론으로부터 기인한다. 비록 그가 특정 스승으로부터 서예나 사경기법을 배우지는 않았지만 사경에 있어 독보적인 존재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폭넓은 자료 수집과 옛 문헌에 대한 꼼꼼한 분석을 통해 자신의 서체로 체득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은 한중일 서체와 사경 자료가 그의 작업실을 빼곡이 채우고 있으며, 슬라이드 자료도 현재 2000여 점이 훨씬 넘는다.

지금도 사경 재료를 만들기 위해 며칠씩 작업실에 ‘폐인’ 한 채 ‘준비 작업’만 매달리는 김 회장은 “힘들지만,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사경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참된 삶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즐겁습니다.”라며 “제가 더욱 노력해 우리나라의 사경 문화가 세계 속에 우뚝 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면, 저의 삶은 고(苦) 아닌 감(甘)이지 않겠습니까?”라고 반문했다.

또한 “세상 모든 일에 전문가가 있듯이 사경수행 역시 전문 지도자가 필요합니다.”라고 지적한 김 회장은 “불교경전·불교사·서예·한문·역사·미술사 등에 대한 깊은 연구, 기법에 대한 숙련, 진리에 대한 예경심과 깊은 신심, 모든 중생을 위한 크고 높은 서원, 그리고 부처님 혜명의 증득과 실천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전 과정을 구비한 사경수행 전문가가 양성되어야 하는 것입니다.”라며 “1700년이란 장구한 역사를 가진 우리의 사경이 한 차원 높은 수행과 문화로 발전시켜야 할 시점이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오종욱/본지 편집실장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