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당 이식1)이 젊어서부터 병이 많아 과거 공부를 접고 늘 몸조리를 하였다. 집이 지평2) 백아곡에 있으니 용문산에서 가까웠다. 일찍이 주역을 들고 용문사로 거처를 옮겨 주역의 이치를 깊이 공부하였다.

한 부목승3)이 해진 장삼을 입고 가진 것은 한 바리때뿐이니 절의 모든 중이 사람으로도 치지 않았다. 이공이 늘 밤이 깊도록 등불 앞에서 부지런히 글을 읽는데 모든 중은 다 잠이 들었으나 부목승이 홀로 자지 않고 불빛을 빌어 짚신을 삼곤 하였다.

하루는 공이 글의 뜻을 매우 힘들게 탐구하면서 밤을 지새우고 있으니 부목승이 혼잣말로 중얼거리기를, “나이 어린 서생이 감당치 못할 정신을 가지고 억지로 깊고 미묘한 주역의 뜻을 이해하려 하니 한갓 노력만 허비할 따름이라. 어찌 그만 두고 과거 공부를 하지 않느뇨?” 공이 희미하게 듣고 다음 날 그 중을 이끌어 구석진 곳에 가서 밤에 한 말에 대해 따져 물고 말하기를, “선사가 역의 뜻을 깊이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하니 배우고 싶다.”

하니, 그 중이 말하기를, “얻어먹는 보잘 것 없는 중이 무슨 지식이 있으리오. 다만 뵈오니 서생 나으리가 공부를 고생스럽게 하시니 귀한 몸이 상할까 염려되어 우연히 한 말이거니와 문자에 이르러는 본래 어두운데 하물며 주역이리이까?” 공이 말하기를, “만일 모르면 어찌 깊고 미묘하다 말했느뇨? 선사는 끝내 숨기지 말고 나를 가르치라.” 지극한 정성으로 간절히 청하니, 그 중이 말하기를, “그대는 모름지기 글에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에 쪽지를 붙이고 내가 한가할 때를 기다리라.”

공이 크게 기뻐하며 글에서 이해가 안 가는 곳마다 표를 붙여 모든 중이 잠든 때를 타 나무가 무성한 데에서 만나 조용히 물어 보았다. 그 중이 미묘한 이치를 분석하니 구름을 헤치고 맑은 하늘을 보는 것 같았다. 이러므로 공이 늘 그 부목승을 엄한 스승으로 대접하지만 여러 중들이 있는 데서는 막연히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로 대하였다.

공이 절을 떠나게 되니 그 중이 문에 나와 하직하고 이듬해 정월에 서울에서 찾아뵙겠다고 약속하였다. 과연 그 달에 중이 찾아오니 공이 집안에 맞아들여 3일을 머물게 하니 그 중이 공의 평생 운세를 점치고 또 말하기를, “병자년 중에 큰 전쟁이 일어날 것이니 반드시 영춘 땅으로 피해야 화를 면할 수 있으리라. 또 아무 해에 공을 서관4)에서 만날 것이니 기억하라.” 하고, 드디어 헤어졌다.

후에 병자호란을 당하여 공이 모친을 모시고 영춘으로 가서 편안히 지냈다. 그 후 재상에 올라 서관에 사신으로 가서 묘향산을 유람할 때 중들이 가마를 메었는데 그 앞의 한 사람이 곧 그 중이다. 안색이 건강하여 용문사에 있을 때와 같았다. 공이 매우 반기며 절에 들어가 별도로 방 하나를 청소하고 맞아 들였다. 손을 잡고 그 동안의 안부를 물으며 지극히 즐거워하였다. 음식을 잘 마련하여 대접하고 3일을 나란히 누워 자며 서로 마음을 터놓고 얘기하는데 위로 나라의 일이며 아래로 집안일을 빠짐없이 논하였다. 공이 또한 깊은 도를 듣고 서로 이별한 후 다시 만나지 못하였다.5) (『청구야담』6) 10권, <택당우승담역리>)

박상란/한국불교선리연구원 상임연구원

각주)---------------------
1) 이식(李 植) : 1584~1647.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여고(汝固), 호는 택당(澤堂). 본관은 덕수(德水). 시호는 문 정(文靖).
2) 지평(砥平) : 지금의 경기도 양평군(楊平郡) 양동면(楊東面).
3) 부목승 : 불목하니. 절에서 밥 짓고 물 긷는 일을 맡아서 하는 사람.
4) 서관(西關) : 서도(西道). 황해도, 평안남북도 지방의 통칭.
5) 학산한언, 335화와 같음. 동야(45화)의 앞부분과 같음.
6) 『청구야담(靑邱野談)』 : 조선 후기 야담집. 작자·연대 미상.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