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학자 조성택 고려대 교수가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초청을 받아, 7월 26일부터 8월 23일까지 매주 토요일 오후 3시 서울역사박물관 강당에서 ‘불교의 역사적 이해’를 주제로 강연을 펼친다. 강좌는 ‘역사적 붓다’(7월 26일), ‘붓다’(8월 2일), ‘무불(無佛)시대의 붓다들’(8월 9일), ‘경쟁하는 붓다들-미륵과 아미타불’(8월 16일), 종합토론 및 질의응답(8월 23일) 등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이중 7월 26일 강좌를 요약했다.

신비적인 불교 이해는 기복적이고 무속적이며 출가자의 오만으로 문제될 수 있습니다. 종교는 비상식적이지 않습니다. 우리 생활에 맞닿아 있습니다. 육체를 단련하듯 마음을 닦아가는 것이 불교의 강점입니다. 수행의 결여로 인해 범부우치(凡夫愚癡)를 대량생산하면서 종교는 현재 기업화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타종교 혹은 사회의 다른 부분과 소통이 불가능해졌습니다. 이런 문제들은 구체적인 판단이 어렵습니다. 불교를 해석하는 합리적 이해 방식도 문제가 많습니다. 이번 강연에서 지적하는 것이 바로 현대의 이성적 이해가 지닌 문제점입니다.

붓다를 철학가 혹은 사상가로 이해하는 합리적 사유방식이 있습니다. 신화적 요소를 배제한 합리성이나 이성의 지나친 강조로 불교의 본질을 놓쳤다고 볼 수 있죠. 철학으로 이해한 불교는 종교의 초월성을 간과할 우려가 있습니다. 현실에서 이성적 불교의 폐해가 신비적 불교에 비해 적다해도 말입니다.

불교를 이성으로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 20세기 초로, 발원지는 근대 유럽입니다. 중세 권위적 종교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이성과 지적 활동을 펼친 때입니다. 사회ㆍ인간ㆍ우주에 대한 이성적 사유가 힘으로 통했죠. 당시 서구의 갈등은 기독교였습니다. 과학이 발전하고 불교를 발견하면서 근대의 이성으로 이해하려는 방식이 시도됐습니다. 현대는 수행을 통해 의식의 변화를 추구하는 ‘재가지식인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존 종교 권위자가 지닌 지위는 유지하기 어렵게 됐고 사회인들이 전문 지식인으로 등장하면서 스스로 경전을 읽고 자가 수행을 합니다. 이것이 이성적 불교의 이해를 위한 역사적 배경입니다.

사상으로서 불교의 특징

불교는 철학인가, 종교인가. 유일신의 유무(有無) 관점에서, 불교는 종교가 아닌 것으로 여겼습니다. 절대자에 의한 믿음 구현[기독교적 입장] 측면에서 본다면 불교는 종교가 아닌 철학입니다. 그러나 철학 역시 이성으로 입증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불교는 철학도 아닙니다. 이런 논의는 1920~1930년대 한국에 뿌리 내리기 시작한 기독교와 불교가 충돌했던 실제상황입니다.

불교는 왜 서양 철학 입장에서 소통이 어려운가. 불교는 일상적 견해라든지 이성적 사고에 있어 명상에 기만을 두고 있습니다. 논리적인 사회 활동에서 불교는 삼매 체험에 기반을 둔 사상적 측면을 특징으로 합니다. 체험이 일상의 경험보다 인식론적으로 더 타당하고 유용하다는 결론입니다. 인식의 순간에 오늘 내가 생각한 진리는 내일의 수행에 의해 오늘의 내가 부정당하는 실제를 경험한다는 것이죠. 나의 진리가 나보다 경지 높은 이에 의해 부정당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불교가 여기서 출발한다고 봅니다. 붓다의 입장에서 본 승의제인 궁극의 진리가 있고 일상의 속제라는 두 가지 진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궁극의 진리와 일상의 진리 사이에는 나의 수행정도와 경지에 의한 무한하고 다양한 스펙트럼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붓다는 누구인가?

현대 불교학의 입장에서 초기 붓다는 인간 혹은 스승이었습니다. 대승불교에 들어 신으로 다시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 비판적 입장입니다. 19세기 유럽에서 붓다는 관심의 인물로 등장했죠. 붓다는 당시 영국의 입장에서 종교 개혁가인 마틴 루터(Martin Luther)에 견주어졌습니다. 영국 산업혁명 이후에는 붓다의 삶은 인류 최초의 막시스트로 비춰졌습니다. 차가운 가슴을 지닌 냉철한 지성인 즉 번뇌의 정열을 식힌 붓다는 또한 완벽한 빅토리안 신사였습니다. 그야말로 붓다의 재구성이죠. 붓다는 ‘세상에 태어나고 세상에 살았지만 세상을 극복한 뒤에 세상에 더럽혀지지 않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붓다는 뭐냐? 결국은 깨달음의 경험에 의해 의식이 변화한 존재입니다. 신과 인간의 대립적인 존재 구조가 아닙니다. 불교의 왜곡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일상적 경험이 아닌 선정 경험의 체험이 불교이듯 의식의 변화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붓다는 해석될 수 없습니다.

불교 경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모든 것은 고통’일까요? 불교 경전의 핵심인 사성제중 고성제는 붓다 당시의 사회와 종교적인 분위기를 반영합니다. 오음(五陰)은 인간 존재라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찰라 생멸하는 존재를 연속적인 존재로 이해하는 고통입니다. 이 언명은 이성적인 사유가 아닌 명상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회고적 진리’입니다. 깨달음을 얻은 후 이전 삶을 되돌아 볼 때 비로소 알게 되는 진리입니다. 이는 고성제가 아직 깨닫지 못한 자에게 있어 이성적 사유로 판단해야 할 논리적 명제가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어져야 하는 진리임을 의미합니다. 불교경전은 ‘방법론적 불가지론’의 방식으로 읽혀야 합니다. 현존하는 불교경전들의 역사적 기록이 믿을 수 없는 것임을 감안한다면 교리를 통해 초기불교를 재구성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깨달음의 세계를 표현하는 이기를 내가 지닌 이성과 관련 맺을 때 우리는 담론을 형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편집실/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