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에서 유래가 없이 고속 성장한 한국의 기독교는 한국 사회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점에서 당연한 결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식민지 시절부터 해방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 기독교가 한국사회에 미친 영향은 사회 전반에 걸쳐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심지어는 한국불교의 변화와 산업사회에 대한 적응 역시 기독교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 새삼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행되고 있는 현실을 목 놓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전부는 아니겠지만 일부 기독교인에 의해 자행되는 종교편향에 대한 현실을 말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안하무인의 행동에 대해 제동 장치가 사라졌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시점에서 일부 몰지각한 기독교인 들의 행태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혹자는 남북으로 갈리고 동서로 찢어지더니 급기야 종교 간의 불화가 시작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의 시선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을 생각하기에는 너무 일방적이라는 점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수업 시간에 예배를 강요하거나 불교와 유관한 사적이나 문화재를 우상이라 해서 훼손하는 것은 작은 사건에 불과하다. 교회를 투표 장소로 활용하는 것은 보다 고도의 전략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더욱 고소를 금치 못하는 것은 대통령이 특정 종교인이라 해서 특정 종교인을 정부의 요직에 앉히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은 불교계에 사람이 없어서 그렇단다. 이제 특정 종교를 믿지 않으면 고관이 될 수 없다고 인식하게 만들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난 사소한 사건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것이다. 전 국민의 머릿속에 각인 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교과서 문제나 인사 문제 등 민감한 사건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것을 단순히 특정한 개인의 성향으로 인식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분석이다. 적어도 한국 기독교가 한국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기까지 한국사회의 문화적 특성과 사회적 장단점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접근했다는 점이다. 현대식 의료나 교육, 복지 등을 통해 전통문화의 저항감을 희석시키고 오히려 동화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었다. 한국사회의 주류는 백여 년에 걸쳐 이렇게 바뀐 것이다. 미국 유학파를 중심으로 형성된 주류층은 정치, 경제를 넘어 사회 전반에 영향력과 종교적인 그룹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의 전투적인 선교의지를 이해는 하지만 그것을 찬양할 수는 없다. 그것이 다른 문화를 침탈하거나 타인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하여 종교적 우월감은 서구제국주의의 동양침탈이나 아프리카 약탈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들의 배타적 종교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사회의 안정을 도외시하거나 타인의 권리나 인격을 무시하는 행위로 드러나선 곤란하다. 선교라는 목적이 모든 수단을 정당화시켜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 아닐 수 없다.

사소한 문제에서 인사나 교과서 문제 등, 종교편향과 관련된 다양한 사건들이 우리를 슬프게 하고 있다. 다원주의적 사고를 강조하거나 사회통합을 말하며 자제를 요구하는 것은 너무나 초보적인 감성적 행위가 아닐 수 없다. 몰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고도로 계산된 사건이라면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도 교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일이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도 자행되고 있으며, 내일도 발생의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종교전쟁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유치하지만 다원주의적 사고와 한국사회의 통합, 나아가 국제적 현실 속에서 민족의 앞날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다. 내 종교가 중요한 만큼 상대의 종교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말하고자 한다. 이미 검증된 세계적인 종교를 유치하게 호도하는 것을 여전히 볼 수 있다. 불교를 믿기 때문에 지옥에 가야한다면 그것은 불교를 칭찬하는 일이다. 지옥 중생들이 우리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의적인 비방이나 선전, 혹은 폄하를 통해 종교적 파당이나 집단 이기주의를 획책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일을 넘어, 범죄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종교인들이 사회통합을 방해하고 민족의 앞날을 어둡게 만들기 때문이다. 단순히 나와 시각이 다르다는 그 하나 때문에 나와 다른 종교를, 혹은 종교인을 적으로 간주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 내부의 양심적인 분들이 기독교의 자존심을 걸고 종교편향 방지에 앞장서야 한다.

이 시점에서 불교계는 기독교 대통령의 출현을 걱정하기 전에 내부적 역량을 결집하고 부처님의 근본 사상을 통해 사회의 지남이 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사회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다종교 사회의 현실 속에서 불교의 장단점과 다른 종교의 특성을 비교 분석하고 그에 따른 신도관리체계나 승려 양성 과정을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

종단협을 중심으로 종교편향 사례를 모니터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강구할 수 있도록 전문 위원회를 만드는 것도 한 방편이다. 또한 선진국처럼 특정한 신분을 이용해 특정한 종교를 선교 내지 옹호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방지법을 제정할 필요가 있다. 공무원, 교사, 학교 등은 특히 이런 제도가 필요한 곳이다. 국무총리령이나 대통령의 훈령 등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관계 기관의 보고도 들었지만 그것은 의미가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속성상 해바라기가 되지 않을 수 없으며, 동시에 지도층들이 방관 내지 조장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그러한 것은 효과를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법적인 틀을 통해 개개인의 종교적 자유가 침해받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 본다.

그러나 제도도 중요하지만 각 종단의 내적 안정과 현대사회에 대한 적응과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현재와 같이 변화가 없다면 불교계의 앞날이 마냥 맑고 청량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사회를 움직이는 것이 사람이고, 그 다음이 조직이라 본다면 인재를 수용하고 양성하여 불교계 안팎의 동량으로 키우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 한국불교계를 대표하는 각 종단은 이런 점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여전히 종권 다툼에 골병이 들고 있기 때문에 힘을 결집할 수 없다.

오늘은 지나가고 있지만 내일은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준비하지 않는 자에게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따라서 이제는 접근하는 방식을 현대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다만 제불보살의 가피력에만 기댈 것이 아니라 사회현상을 분석하고, 대책을 수립하며, 내일을 설계한 다음 장기적인 전략에 따라 대응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즉흥적이고 주먹구구식의 접근은 이제 불교계에서 ‘Good Bye’ 했으면 좋겠다.

차차석/동방불교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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