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은 일체의 집착과 의혹을 끊을 수 있는 수행이 바탕이 된 실천적 지혜를 담고 있는 경전으로, ‘Vajra-cchedika--Prajn~a--Pa-ramita--Su-tra’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이라 한다.

반야는 원시불교시대부터 부처님이 깨달은 지혜를 표시하는데 사용되었으며 동시에 부처님 제자들도 이 반야를 얻어야만 한다고 하였으므로 반야는 곧 불교의 깨달은 지혜를 표현하는 말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지혜와는 다름을 강조하여 표시하기 위해서 일부러 원래의 소리대로 ‘반야’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러면 보통의 지혜와 반야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

참으로 말로는 한마디로 설명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전자는 다분히 분석적인 것임에 대하여 후자는 종합적인 것이라 할 것이며, 또한 이론적인 것임에 대하여 직관적인 인식 그리고 그 체험을 말한다고 한다. 말하자면 이러한 같지 아니한 점에 대하여 직관적인 인식 그리고 그 체험을 말한다고 한다. 말하자면 이러한 같지 아니한 점에 대하여 누누이 밝혀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금강경』이며 또한 『반야심경』이라 하겠다.

대승불교에서는 ‘반야’가 ‘바라밀’과 밀접하게 결합되어서 거의 하나의 말처럼 이해되고 있는데, 그것은 ‘반야’가 다만 이론적으로 이해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철저하고 진실한 수행의 뒷받침을 갖춘 실천적인 지혜이기에 그렇게 되는 것이어서, 말하자면 ‘바라밀’없이는 ‘반야’가 성립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야’의 특색은 있는 그대로를 여실하게 아는 것이며, 이것을 ‘견(見)’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지(知)’하는 마음의 작용에는 주관적인 작위가 작용하기가 쉬운 것이며, 작위 함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그것은 벌써 무리하게 부자연스럽게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있게 되면 이해하는 것이 비뚤어져서 ‘반야’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견(見)’하는 것은 거울에 물건이 비치듯이 작위하는 것이 끼일 여지가 없으며, 따라서 있는 그대로를 아는 점이 엄연하므로 그래서 반야를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고도 한다. 이와 같이 ‘반야지혜’가 보통사람들에게 무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 누구라도 본래 갖추어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을 그대로 깨닫는 힘이 바로 ‘반야’이기 때문에 그런 뜻으로는 말을 아직 못하며 철이 들지 않은 어린 아이도 이것을 태어면서부터 가지고 있다 할 것이기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범부 중생들에게는 갖가지의 번뇌가 있어서 여실하게 모든 것을 보려는 ‘반야’의 작용을 방해하고 있다. 즉 우리들 마음속에는 ‘자아(自我)’와 바깥 경계[外境]에 대한 집착, 탐욕, 분노, 질투, 교만, 위선 등등의 번뇌가 있다.

이러한 번뇌들이 들어서 올바른 지혜의 활동을 방해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와 같이 번뇌가 있는 동안은 반야의 작용이 충분하게 발휘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에 의하여 번뇌의 힘을 누르고 동시에 선정을 닦아서 반야의 힘을 기르려는 것이며, 끝내는 번뇌를 남음 없이 아주 없애버리고 완전한 반야지혜인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얻기 위한 노력이 바로 바라밀의 수행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바라밀의 실천은 반야와 하나로 이어져 있는 것이므로 수행의 힘이 뒷받침하는 지혜가 ‘반야’인 것이다.

‘바라밀다(波羅蜜多)’는 인도 범어 Pa-ramita-를 중국에서 소리대로 한문으로 적은 것이다. 즉 파-라미다-를 우리는 우리의 한문 읽는 음으로 ‘바라밀다’라고 부르는 것인데. ‘바라밀다’에는 크게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최상이다’, ‘완전하다’ 등의 뜻이며, 또 하나는 건너가다[度] 그리고 저 언덕으로 이르러간다[到彼岸]의 뜻이 있다. 따라서 범어 Prajn~a- Pa-ramita- [般若波羅蜜多]는 ‘지혜의 완성’ 그리고 ‘지혜의 의하여 저 언덕(이상의 경지)에 도달한다.’의 두 가지로 해석할 수가 있다. 이것은 이상적 경지 즉 불도를 이루려는 보살 수행을 총칭하는 것이며, 이 수행법을 6종 혹은 10종으로 나누어 6바라밀, 10바라밀[六度, 十度]이라고 한다.

‘경(經)’은 범어 Su-tra를 번역한 것인데 범본의 경전 이름에는 Su-tra라는 말이 붙어 있지 않다. 그러나 어떻든 Su-tra 원래 뜻은 ‘줄[經]’ 또는 실[絲]이라는 뜻이다. 인도에서는 실에도 꽃을 많이 꿰어서 ‘꽃장식’을 만들어 이것을 머리에 얹거나 목에 걸어서 장신구로 삼는 관습이 있는데, 이러한 경우에 꽃을 실에다 꿰면 많은 꽃을 흩뜨리지 않고 모을 수가 있다.

부처님 계시던 시대에도 이미 문자가 있었으나, 불교의 교설을 전승해 가는 데에는 문자를 사용하지 않고 주로 입으로 전하여 머리로 암기하는 방법을 의지하였기 때문에 되도록 부처님의 교설을 간략하게 게송 즉 시의 형식 또는 짤막한 문장으로 표현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부처님의 금쪽같이 귀한 말씀을 짧은 문장 속에다 담은 것을 ‘스-트라(Su-tra)’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것을 ‘계경(契經)’이라고도 번역하는데 ‘계(契)’는 ‘맞는다’는 뜻이며 이것은 진리에 맞는 교리가 그 속에 들어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진리에 맞는다.’고 하는 점에서는 반드시 불타의 교리여야만 된다고 할 것은 없는 것이고, 제자들의 교설이라도 진리에 맞는 것이라면 ‘스-트라’ 속에다 포함시켜도 무방하다는 뜻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는 예부터 불교도들은 ‘불설(佛說)’이라던가 그것이 담긴 경전에 대한 개념이 비교적 여유 있는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교설은 이런 것이다.’하고 확정하여 놓고는 이것을 절대시 하여 그 밖의 것은 조금도 용납지 못하며 어디까지나 배척하는 그러한 편협하거나 고집스러운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던 까닭이다.

그것이 아무리 훌륭한 교설이라도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라고 하게 되면 그것은 반드시 다툼이 일어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거듭거듭 되풀이해서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금강경』이나 『반야심경』이 분량은 작은 경전이지만 대승불교사상의 앞장서는 경전이며 부처님의 그와 같은 가르침을 가장 진솔하게 후세의 우리들에게 전해 주는 경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經(경)’이라고 하는 중국의 한자 자체에도 본디 ‘날실[縱系]’이라는 뜻이 있다. 즉 ‘경위(經緯)’라고 하는 것은 베를 짜는 날실과 씨실을 말하는 것이며, 날실은 길게 처음부터 끝까지를 꿰고 있다고 해서 유교에서 성전(聖典)을 ‘경(經)’이라 하는 것이 인도 범어의 Su-tra의 뜻과 같으므로 이것을 경이라고 번역한 것은 아주 적당한 번역이라고 하겠다.

『금강경』의 갖추어진 이름은 범어로 Vajra-cchedika--Prajn~a--Pa-ramita--Su-tra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이라 한다.

이 경전은 공사상을 ‘공관(空觀)’의 입장에서 그것을 우리들의 일상생활 가운데서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하는 마음가짐을 누누이 밝히고 있어서 후세에 까지 널리 유명해진 매우 중요한 경전이지만, 그 내용과 구성형식은 아주 간소한 형태를 지니고 있으니 예를 들어서 본다면, ‘공사상’을 핵심적으로 말하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공(空)’이라는 전형적인 특수한 술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공’의 뜻을 밝히고 있다.

이 경은 대승불교의 초기에 성립된 경전이므로 경전의 형식으로 본다면 대단히 간결하고 원시적인 형태를 지니고 있다 하겠으나, 그 예로써 다른 대승경전에서는 처음에 그 자리에 참석하는 대중들에 대하여 비구, 비구니 보살 천인 아수라 등 여러 부류의 이름이 많이 나오는데, 이 『금강경』에는 그와 대조적으로 매우 간단하게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성의 기수급고 독원에서 1250인의 비구승들과 함께 머물고 계셨다.”하듯이 아주 간단하게 서술하고 있어서, 이런 것은 이전의 원시경전의 형식을 그대로 이어 받고 있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이같이 간소한 형식의 경전이지만, 그러나 우리의 일상생활 가운데 불도를 진정하게 실행하는데 있어서는 공의 사상이 뒷받침 되어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어서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 즉 불도를 구하며 중생을 교화 제도하는 원행을 실천하는 보살은 한량없는 많은 중생을 구제하지만, 그러나 자기가 중생을 구제하였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진실한 구도자라고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도자에게 있어 구제하는 자도 공한 것이며 구제되는 중생도 공한 것이며, 구제되고 구제하여 도달하는 경지도 공한 것이기 때문에 이같이 셋이 다 공한 경지 즉 ‘삼륜이 공한 경지[三輪空寂]라야 진정한 불도수행의 경지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사상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상을 지진 『금강경』은 중국, 한국, 일본 등의 불교에 커다란 영향을 준 경전이 되었다. 특히 중국선종의 육조 혜능 스님이 출가 전에 『금강경』은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應無所住而生其心].”는 말을 듣고 마음의 눈이 열려 출가하게 되었다는 인연으로 해서 선종의 세계에서는 이 경전이 존중되었다.

『금강경』은 범어 원전이 현재에 남아 있으며, 기타 티베트어 번역이나 서역지방의 여러 언어로 번역된 것이 발견되고 있고, 중국에서 한문으로, 번역된 것이 8종류가 전해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 서역지방에서 중국의 장안에 온 ‘구마라습(究摩羅什)이 A.D.401년에 번역한 것이 가장 유명하며, 한국불교에서도 전통적으로 이 번역을 의지해 왔다.

인환 스님/전 동국대 교수

※이제 앞으로 『금강경』의 범어 원전에서의 번역과 한문경전에서의 번역을 비교, 대조하면서 강설함에 있어서는 제일 먼저 범어원문을 게재할까 하다가 이 『선원(禪苑)』지가 전문적인 학술서가 아닌 일반 독자를 상대하느니 만큼 독자가 전혀 알 수 없는 범어원문 게재는 그만두고 독자들이 오랫동안 친숙한 한문원문을 먼저 게제하고 이것을 의지한 전통적인 한글번역과 범어원전의 한글 번역을 대조하여 본다면 범어원전을 의지한 한글 번역이 훨씬 그 뜻을 알기가 쉽고 분명함을 밝히면서 아울러 가능한대로 자세한 주석을 하였고, 필자의 강설을 보태기로 하였다. 『금강경』의 쉽고 바른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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