我今淸淨水(아금청정수) 제가 지금 맑은 청정수를
奉獻三寶前(봉헌삼보전) 감로의 차로 변하게 하여
變爲甘露茶(변위감로다) 삼보 전에 받들어 올리오니
願垂哀納受(원수애납수) 원컨대 어여삐 거두어 주소서.

세상만물이 아직 잠들어 있는 이른 새벽의 대웅전. 작은 종의 마지막 울림을 받아 큰 법당의 분수승인 노전(爐殿) 스님은 목탁이나 경쇠(磬釗)를 한차례 쳐서 대중에게 예불의 시작을 알린다. 스님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고, 노전스님은 모든 대중을 대표하여 새벽예불문의 첫 구절인 다게(茶偈)를 외운다.

새벽예불에 앞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있다. 초를 밝히고 분향한 다음 맑디맑은 청정수를 부처님 전에 올리는 것이다. 곧 6종의 공양물인 향 등 꽃 차(茶) 과일 선열미(禪悅味;보통 쌀로 대신함) 가운데 하나인 차 대신에 물을 올리고 있다.

그런데 왜 차를 대신한 물을 부처님 전에 올리는 것일까. 우주의 네 가지 구성요소인 지(地) 수(水) 화(火) 풍(風) 4대(大) 가운데 하나인 물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의 근원이다. 모든 생명을 낳고 길러주는 그 물로 정성껏 달여 바치는 공양물이 차인 것이다.

따라서 청정수 공양에는 모든 진리의 근원인 법신(法身)께 생명의 물을 바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물의 덕성이 이처럼 뛰어나기에 물은 도(道)와 법(法)의 성질을 가장 잘 드러내는 상징물로 인식되어져 왔다.

『도덕경』에서는 물의 덕을 이렇게 표현했다. “가장 훌륭한 선은 물과 같다[上善若水] … 물은 이롭게 하되 다투지 않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있다. 그러므로 도(道)에 가깝다. 거처함은 땅과 같이 하고 마음은 깊은 못과 같이 하는 것이 선(善)이다.”

수행자나 불자가 물의 덕성을 살펴 그렇게 살 수만 있다면, 물처럼 걸림 없이 유유자적(悠悠自適)한 일생을 향유할 수 있으리라.

감로(甘露)

생명력의 상징으로서의 물은 흔히 ‘단 이슬(甘露)’로 비유된다. 경전에서 감로는 깨달음을 증험하는 법수로 표현된다. “모든 사물의 실상을 깨달으면 모든 자제력을 낱낱이 실현하여 뛰어난 해탈에 이르고 시방의 모든 보처(補處)로부터 성불의 약속을 받을 수 있으며, 감로의 법수(法水)가 이마에 부어질 것입니다. 감로의 법수가 이마에 부어지면 법신은 허공에 충만하고 시방세계에 안주할 것입니다.”(『화엄경』) 법수로서의 감로는 생사로부터 해탈하는 ‘불사(不死) 혹은 영생(永生)이라고도 하는데 곧 열반을 뜻한다.

차(茶)

차는 신성한 물(聖水)을 의미한다. 그래서 불·보살이나 신성한 사람(神人, 仙人)에의 공양물로 쓰인다. 신라의 “정신 효명 두 태자는 오대산에 들어가 골짜기의 물을 길어다 차를 달여 5만 진신(眞神)에게 공양했다”『삼국유사』는 기록이 있다. 중국 후한 이후 남부지방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에 보급되었다. 우리나라 차의 유입은 가락국의 허황옥에게서 유래한다는 인도 전래설이 있다. 선사들의 선시(禪詩)나 게송에서 차는 깨달음의 본질을 암시하는 초월적 경지를 상징한다. 또 언어적 표현을 초월한 경지와 그 이후의 세계에 존재할 수 있는 진실한 삶의 방법을 차와 함께 이야기한다.

계욕과 관욕

부처님오신날 불자들은 아기 부처님의 몸에 청정수를 부우며, 자신의 몸과 마음이 새롭게 태어날 것을 발원한다. 이는 계욕(계浴)과 관욕(灌浴)의 전통에서 비롯됐다. 『삼국유사』에서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은 산욕수(産浴水)에 몸을 적셔 성불한다. 이들이 산욕수에 몸을 적시는 것은 계율이라는 정화 의식의 행위이다. 즉 몸을 씻음으로써 세속의 욕망과 더러움에서 벗어나 극락에 왕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망자의 영혼을 극락으로 천도 받게 하기 위해 관욕이라는 목욕 의례를 거치게 한다. 이승의 때를 씻은 영혼만이 천도의식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젖(乳)

물의 생명력이 최고도로 밀도화된 것이 ‘젖(乳)’이다. 부처님은 성도하기 직전, 숲에서 고행하던 어느 날 자신의 수행방법에 회의를 느낀다. 그래서 고행과 단식을 중단하고 수자타라는 소녀에게 우유를 공양 받아 마셨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5명의 비구스님은 그가 타락했다고 하며 그의 곁을 떠나 녹야원으로 갔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그때부터 다시 입정(入定)에 들어 마침내 성도하였다. 젖은 또한 불법(佛法)에 비유되기도 했다. “부처님의 바른 법은 극히 고요해 이 세상을 밝게 비추어 주나니 마치 소화제를 먹은 것 같아서 우유처럼 몸속을 부드럽게 한다.”(『백유경』)

청정함과 생명력, 정화력, 고요함 등의 성질을 두루 갖춘 물은 흔히 샘물 또는 약수로 대표된다. 화수(井華水)의 한자를 우물 정(井)자로 쓰는 것도 이를 의미한다. 발음에서 정화(淨化)를 연상할 뿐만 아니라 의미상으로도 이를 상징한다.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아니 그칠 새, 내가 되어 바다에 가나니….”(『용비어천가』) 샘은 풍파에도 끊임없이 물을 뿜어낸다. 그래서 유구하게 흐르는 물은 마침내 크고 넓은 바다에 이른다. 여기서 샘은 인류문명의 근원과 겨레의 정신을 상징한다.

정심(井心)

금강수보살이 대일여래에게 유가행자(瑜伽行者)의 심상(心相)에 대해 물었다. 이에 60心으로 답했는데, 그 25번이 정심(井心)이다. 사람 마음의 善과 불선을 헤아리기 어려운 것을, 우물을 보기만 해서는 그 깊고 얕음을 헤아릴 수 없음에 비유한 것이다. 이때 우물은 사유의 깊음을 상징한다.

깊은 산사의 약수에서 흘러나온 시냇물은 드디어 강물을 이루며 바다로의 대장정을 떠난다. 이 강의 상징적 의미가 가장 잘 녹아있는 것이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다. ‘월인천강’이란 부처님이 백억 세계에 화신(化身)하여 중생에게 교화를 베푸는 것이 마치 달이 즈믄(千) 강에 비친 것과 같다는 뜻이다. 달은 하나이나 강에 비친 모습은 무수하다는 것은 부처와 중생에게 해당되는 비유이다. 중생은 각자 자기의 인연과 소견을 벗어날 수 없지만 완전한 것을 끊임없이 갈구하는 거울처럼 부처의 상징인 달을 받아들인다.

항하(恒河)

강물이 이런 신성함을 지녀서인지 인도에서는 갠지스 강을 항하(恒河)라고 부르며, 성지로 여기고 있다. 불경에서는 ‘무수히 많음’을 ‘항하의 모래(恒河沙)’에 비유하고, 항하를 복덕길하(福德吉河)라고 한다. 인도인들은 이곳에서 목욕을 하면 모든 죄업이 소멸된다고 믿고 있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고, 이 강가 녹야원에서 최초의 설법을 열었다. 인도에서는 ‘은하수’를 이 항하의 하상(河床)이라 부른다. 『정법염처경』에 의하면 “제석과 수라(修羅)가 싸울 때, 제석이 탄 말이 토해 낸 흰 기운이 하늘로 흘러들어 은하수가 되었다”고 한다.

구름

여행에 지친 강물이 체중을 줄여 하늘로 승천하면 구름이 되고, 다시 눈·비가 되어 내리며 윤회 아닌 윤회를 거듭한다. 끝없이 유행하는 운수(雲水)는 곧 수행과 수행의 여정을 상징한다. 그래서 수행승을 운수객(雲水客)이니 운수납자(雲水衲子)라 부른다. 경한선사의 시에서는 구름이 형체가 없고 빛깔이 희며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 모습에서 무심무아(無心無我)의 경지로 승화되어 나타난다. 구속됨이 없는 구름은 인간의 사심(邪心)과 대비되는 초월적 원리로서의 무상함과 무아심을 표상하는 의미를 갖게 된다.

비(雨)

떠도는 구름이 쉴 곳을 찾아 지상으로 내려오면 비는 깨달음의 법수(法水)가 된다. “깨달음은 산에 내린 비가 계곡에 모여 개울이 되고 강에 합류해 바다로 가는 것과 같다. 거룩한 가르침의 비는 처한 곳과 상황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똑같이 내린다. 이 비를 맞는 자는 그것을 작은 무리로 모아 조직과 생활공동체로 모아들이고 마침내 자신이 깨달음의 대양에 들어 있음을 발견한다.”(『팔리 증지부』)

박소은/ MBC 구성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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