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은 다른 사람의 마음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불행은 영혼의 외투 혹은 오막살이에 불과한 육체의 조절되지 않은 기질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불행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불행이 존재할 수 있다는 당신의 확신으로부터 온다. 그러므로 그러한 확신을 거부하라. 그러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될 것이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내일이 밝아 오면 배트맨은 자수하고 감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오늘밤은 사랑하는 여인과 상당기간 헤어져야 하는 마지막 밤입니다. 이런 밤에 배트맨은 가벼운 키스만으로 마음 깊이 사랑하는 여인 레이첼을 보냅니다. 고담시에 평화가 찾아오는 날, 그리하여 더 이상 배트맨으로 살지 않고 브루스 웨인으로 살게 되는 날까지 배트맨은 레이첼과의 우정을 지켜갑니다. 사랑이 아닌 우정을 말입니다.
영화 《다크나이트》의 주인공 배트맨이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의 나르치스를 대변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 많습니다. 배트맨은 나르치스만큼 명료하지 않습니다. 지성적이라고 하기에는 사랑에 대한 갈망도 강렬하고, 그렇다고해서 감성적이라고 하기에는 자기 통제력 또한 너무도 강합니다.
어찌 보면 ‘지’와 ‘사랑’을 양 손에 하나씩 들고서 어찌할 줄 모르는 사내가 배트맨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리즈를 관통하는 배트맨은 불안해하고 갈등하는 존재입니다. 특히 팀 버튼 감독이 만든 배트맨 시리즈에는 이런 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요. 사랑하는 여인을 만났으면서도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는 존재가 배트맨입니다. 그렇다고해서 나르치스처럼 이성적인 것도 아닙니다. 물론 악과 싸울만큼 충분히 지성적이지만, 한낮의 태양 아래 모든 사물이 분명히 드러나는 것처럼 명료한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배트맨의 이성은 아폴론적인 건 아닙니다.
태양과 학문의 신 아폴론의 세계에 속하지 못하는 만큼이나 모호하지요. 배트맨의 이성은 욕망을 억제하고 감성을 통제하는 방향으로 작동합니다. 이런 점에서 배트맨은 디오니소스의 세계에도 속하지 못합니다. 다만 금욕적일 정도로 자기통제력이 강하다는 점에서 배트맨은 나르치스 쪽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이런 배트맨에 비해 조커는 매우 분명한 특징을 지닙니다.
“내가 왜 칼을 쓰는지 궁금하지 않아? 총은 너무 빨라서 세세한 감정들을 느낄 수가 없거든.”
아주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이면서, 그런 감성의 세세한 변화를 즐기는 존재가 조커이지요. 이런 측면에서 조커는 분명 골드문트의 세계에 속합니다. 물론 범죄를 구상하고 실행에 옮기는 데에 있어서 조커는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지극히 이성적입니다. 여기에서 이성적이란 말은 냉정하며 치밀하게 사고한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이성은 감성의 노예이며 또한 그렇게 되어야 한다.”
영국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 : 1711~1776)의 말처럼 조커의 이성은 감성에 봉사하는 충실한 노예일 뿐입니다. 그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는 주인은 감성이며 조커는 지독히도 감성적인 인간입니다.
2. 거 봐요! 부러졌잖아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극단으로 몰고 가면 어떤 인물이 만들어질까요? 매우 이성적인 인간과 지독히도 감성적인 인간이 자신의 특성을 극단으로 끌고 간다면 말이지요? 영화 《다크나이트》의 두 주인공인 배트맨과 조커는 각각 이성적 인간형과 감성적 인간형의 극단에서 만날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배트맨의 감정에 대한 통제력은 육체적 고통에 대해서 무감각적일 정도로 강합니다. 범죄와의 전쟁을 치른 후, 상처난 부위를 배트맨은 자기 손으로 꿰맵니다. 아무런 표정도 없이요.
스토아학파의 노예철학자 에픽테토스가 그랬지요. 에픽테토스가 고통에 대해 초연하다는 말은 들은 주인이 그의 팔을 비틀었습니다. 에픽테토스는 아픈 표정도 없이, “주인님! 그렇게 비틀면 팔이 부러집니다.”라고 말합니다. 주인은 더욱 비틀었고 결국 팔이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에픽테토스는, “거봐요, 주인님! 결국 부러졌잖아요.”라고 하였다지요. 감정과 감정이 일으키는 욕망에 대하여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이 보여주는 경지는 상식의 눈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건 차원을 달리하는 거고, 특별한 수양이나 정신적 경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의 금욕주의는 욕망과의 투쟁이 아니라 욕망 자체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배트맨에게 이런 정신적 경지는 당연히 없습니다. 배트맨의 금욕은 어린 시절 눈앞에서 부모가 살해되는 장면을 목도한 트라우마에서 나옵니다. 너무도 깊은 상처가 그의 전 생애를 지배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미인들을 대동하고 파티장에 나타난다든가 하는 방탕한 부자집 도련님 모습은 거짓입니다. 마치 가면과 망토 속에 자신을 숨기듯 배트맨은 가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의 상처와 그로 인해 거짓된 삶을 살아간다는 점에서는 조커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커 또한 짙은 화장 속에 자기 자신을 감추고 순간적인 쾌락을 극한으로 밀고 가지요. 조커가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는 이유는 단지 배트맨과 놀기 위해서입니다. 조커는 배트맨의 행동을 예측하고, 자신이 만들어 놓은 덫에 배트맨이 걸려들 때 쾌락의 극치를 느낍니다.
“난 널 죽이고 싶지 않아! 너 없이 내가 뭘 하겠어? 마피아 애들이랑 놀라고? 넌 나를 완전하게 하는걸.”
배트맨과 조커는 서로를 존재하게 하는 이유입니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서로를 그리워하듯이 이들도 서로를 그리워합니다. 다만 그 그리움이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게는 각자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것이라면, 배트맨과 조커에게는 상대를 굴복시키려는 것입니다. 대사처럼 배트맨은 조커를 완전하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조커가 배트맨을 죽여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영화에서 배트맨은 조커와도 같은 악당을 제거하고 고담시를 지키는 정의의 사도입니다. 당연히 조커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모습으로 그려지지요.
하지만 이는 배트맨이 아니라 브루스 웨인의 바람일 뿐입니다. 조커 같은 악당이 사라지면 배트맨도 존재의미가 없어집니다. 따라서 배트맨은 조커가 있어주어야 합니다. 세상에 악마가 없다면 하느님이 존재하여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없다면, 그것이 전능하신 하느님이 악마를 없애지 않고 그냥 두는 이유는 아닐까요?
이렇게 배트맨과 조커는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그 필요는 극으로 치달을수록 더욱 강렬해집니다. 결국 어느 쪽이든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되면 반드시 다른 쪽도 치명상을 입어야 하는 관계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3. 비천한 쾌락을 추구하지도 말고, 의미 없는 고행에 빠지지도 말라
극단적인 선택이 너무도 많아졌습니다. 21세기 대한민국에는 뛰어 내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홀로, 때론 어린 아이들을 안고서 몸을 던집니다. 대한민국의 하늘에는 여전히 조각구름이 떠 있고 한강에는 유람선이 떠 있지만, 아파트에서, 교실에서 뛰어 내리는 사람들을 우리는 받아주지 못합니다. 그들을 받아주지 못할만큼 나라에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생각해 보면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닐터인데, 그저 안타까워만 하고 있습니다.
한동안 우유주사니 프로포플이니 하는 단어가 인구에 회자되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바람 부는 날만이 아니라 압구정동은 늘 붐빕니다. 거대한 욕망의 분출구가 되어 강남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 냅니다. 보다 더 자극적이고 보다 더 강렬한 쾌락을 위해 압구정동은 바람부는 날에도 비오는 날에도 북적댑니다.
적당한 쾌락은 삶에 활력을 주지만 극단으로 달리는 쾌락은 삶을 노예로 만듭니다. 적당한 고통은 삶의 본질에 좀더 가까이 데려다 주지만 지나친 고통은 삶을 죽음으로 이끕니다. 그래서였을까요? 부처님은 지나친 쾌락주의에도 극단적인 고행주의로도 빠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마치 거문고의 줄을 너무 팽팽하게 하거나 너무 느슨하게 하면 그 소리가 좋지 않듯이, 수행자들은 극단을 피하고 중도(中道)를 걸으라고 하셨지요.
“비천한 쾌락을 추구하지도 말고, 의미 없는 고행에 빠지지도 말라. 이 두 극단을 떠나면, 지혜를 이루고 선정에 들어, 깨달음을 얻고 열반으로 나아가는 중도(中道)가 있느니라.”
근본불교의 중도사상은 이처럼 쾌락과 고통의 양 극단을 피하고 중도를 걷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중도(中道)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中庸)과 매우 유사합니다. 물론 석가의 중도가 단순히 중간적 의미를 갖는 중용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본래 석가 출가의 이유가 생노병사의 고통으로부터의 해탈이었음을 고려하면, 쾌락과 고통의 중간지점에서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훌륭한 방법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팔정도(八正道)가 정견(正見)에서 시작해서 정정(正定)으로 마무리되는 이유이기도 한 것이고요.
다만 석가모니 당시에는 중도가 수행자들이 지켜야할 계율과도 같은 것이었다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중도는 모든 대중들이 삶에서 실천해 가야할 덕목이 되어 있습니다. 어떠한 형태로든, 극단적 사고, 극단적 행위는 몸과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고, 결국은 죽음으로 내몰며, 종국에는 모두를 비통에 잠기게 합니다. 설혹 배트맨처럼 정의의 사도가 되어도 어둠을 벗어나지 못하고, 조커처럼 극단의 쾌락을 추구하여도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극단은 본인을 불행하게 만들고 이웃을 슬프게 하는 독약입니다.
김문갑/철학박사,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