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삼사라>의 가장 큰 장점은, 우리에게 익숙하지는 않지만 세계 불교에서 뚜렷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라마불교를 소개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쿤둔>과 같은 영화에서 달라이라마 이야기를 통해서 라마불교를 조금 경험하긴 했지만 이전에 우리가 경험했던 라마불교가 서양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라마불교라면 <삼사라>는 새로운 시각의 라마불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라마불교라면 티베트불교를 말하는 것인데, 이 영화를 통해 제대로 된 티베트 불교를 접할 수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산스크리트어로 '윤회'라는 의미의 <삼사라>의 또 다른 장점은, 영화의 배경이 라다크라는 것입니다. 라다크는 ‘샹그릴라’라는 별명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신비한 곳입니다. 아름다운 자연풍경과 그 자연만큼이나 순수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지상의 마지막 낙원 같은 곳이지요. 영화는 히말라야 설산과 황토 빛 벌판,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새파란 하늘과 푸른 초원, 이런 이질적인 풍경들이 어우러져 환상적인 장면을 만들어냅니다. 라다크의 빼어난 경치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거기다 주연을 제외하고 대부분 라다크 현지인을 캐스팅했는데 그들의 순수한 모습도 좋았습니다.

제6회 부산 국제 영화제 최고의 화제작이었던 <삼사라>(2001)는 독일, 이탈리아, 인도, 프랑스 등 4개국 합작영화입니다. 인도 출신의 판 나린 감독은 이 영화를 찍기 위해 무려 7년을 고생했다고 합니다. 라다크의 정치적 상황이 여의치 않아 서다 가다를 반복하는 촬영을 해야 했으며, 무엇보다도 혹독한 기후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합니다. 매우 공이 많이 들어간 영화였습니다.

<삼사라>의 주인공 타쉬는 수도승입니다. 그는 5살에 출가해서 20여년 수행자로 살아왔으며 3년 3개월 3주 3일의 고행도 마쳤습니다. 고강도의 이 고행을 마치는 날 타쉬의 모습은 인상적이었습니다. 한 번도 자르지 않았는지 허리까까지 내러온 머리카락은 마구 뒤엉켜 있고, 손톱도 길게 자라 있고, 몸은 가부좌를 튼 채 꼿꼿하게 고정돼 있는데,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 구분이 안 갈 정도의 몰골이었습니다. 꽤 깊은 삼매를 경험하지 않고는 결코 연출하기는 어려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음 장면에서 그가 보인 감정에 조금 당혹스러웠습니다. 이 정도 깊은 체험을 했으면 인간적인 감정은 어느 정도 극복됐을 거라고 여겼는데 그는 뜻밖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새해 가정집을 돌면서 축복을 내리고 액을 제거해주러 다니다가 타쉬는 자신에게 여전히 움츠리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욕망을 발견합니다. 좀 더 구체적인 장면을 든다면, 어떤 아줌마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장면이었습니다. 그 장면을 그는 무심하게 넘길 수가 없었습니다. 오랜 수행으로 자신을 정화해왔지만 그 모습에서 그의 억눌려있던 욕망이 슬며시 모습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새로운 감정에 그는 당황했습니다. 오랜 세월 그렇게 치열하게 수행했음에도 여전히 이런 감정에 끌려 다닐 수 있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웠고, 또한 절망적이기도 했습니다.

막연하게 떠돌던 욕망은 어느 농가에서 페마라는 여자를 보면서 좀 더 구체화됩니다.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한 타쉬는 보다 강한 감정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수행자로서만 살아와서 그 감정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더 끌릴 지도 모른다고, 차라리 그 세계를 경험하게 되면 더 빨리 관심을 끊게 될 것이라고. 그래서 그는 세속을 경험하기로 결론을 내립니다.

마침내 타쉬는 세속인이 되기 위해 물가에서 몸을 씻습니다. 몸을 씻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성스런 일을 하기 위해 목욕재계하는 것처럼 그의 세속 행 또한 새로운 단계로 올라가기 위한 통과의례였던 것입니다. 세속에 대한 티베트인의 관념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세속에 대해 티베트인들은 몸을 씻고 들어가야 할 성스러운 세계로 생각하고, 또한 수행의 단계로 생각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침내 타쉬는 페마와 결혼해서 아이도 낳습니다. 그들이 만들어낸 현실은 보통의 신혼부부들이 만들어가는 일상과 별로 다르지가 않습니다. 아들은 귀엽고 부인은 다정다감하면서도 현명하고, 평범한 삶입니다. 그런데 타쉬는 평범한 삶에 권태를 느낀 것인지 마을에서 품값을 받으며 노동을 파는 여자에게 홀연히 마음을 빼앗깁니다. 사랑이라는 감정보다는 처음 페마에게서 느꼈던 것처럼 욕망에 가깝습니다.

수자타와의 관계를 통해 타쉬는 욕망의 속성을 이해했습니다. 페마에 대한 욕망이 수자타에 대한 욕망으로 이동하는 것처럼 욕망이란 실체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지요. 타쉬가 처음 속세에 발을 들여놓은 이유는 욕망에 대해 알고자 함이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이해해야 단념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속세에 발을 들여놓았었는데, 이제 문제가 해결됐으니 더 이상 속세에 머무를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때 마침 스승의 편지가 도착합니다. 스승은 입적에 들면서 그에게 ‘천 가지 욕망을 채우는 길보다는 한 가지 욕망을 극복하는 길을 택하는 것이 낫다’는 편지를 남겼습니다. 여기서 천 가지 욕망이란 세속의 삶을 말합니다. 페마에 대한 욕망을 채우고 나니까 수자타에 대해서 마음이 생기고, 끊임없이 무언가 추구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하는 세속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한 가지 욕망이란, 3년 3달 3주 3일의 수행을 마치고 왔을 때 그를 괴롭혔던 그 애초의 욕망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미 현실에서 충분히 이 말에 공감했기에 타쉬는 스승의 편지를 통해 결정을 쉽게 내릴 수 있었습니다. 세속의 삶을 접고 승려의 길로 들어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서 타쉬는 세속으로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세속을 빠져나와 수행자의 삶으로 들어갈 때도 물가에서 몸을 씻습니다.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타쉬는 언제나 승려였습니다. 스님들이 만행을 통해 깨달음을 구하는 것처럼 그 또한 욕망의 실체를 경험하고,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세속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구도의 과정에서 세속을 경험했던 것이고, 다시 승려로 돌아왔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조신설화>의 세계관과 별반 다르지가 않습니다. 승려의 일탈을 통해 세상 삶의 무상함을 표현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영화는 반전을 보입니다. 다음 순간 느닷없이 페마를 등장시켜 타쉬를 나무라게 합니다. 자신과 아들을 버리고 떠나는 타쉬의 이기심을 들춰내고, 여자를 탐하는 것처럼 구도에 열중했다면 이미 깨달음을 얻었을 것이라고 꼬집습니다. 그러면서 바위에 새겨진 글귀를 보여줍니다. ‘한 방울의 물이 마르지 않게 하려면 바다에 보내면 된다’는 내용입니다. 영화의 도입부에도 잠시 등장했던 글귀로서 감독의 의도가 담긴 글입니다.

이 글귀는 앞의 스님의 편지와 반대되는 내용입니다. 스님의 편지가 승과 속을 갈라서 승가의 입장에서의 가치관이라면 이 글귀는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표현한 것입니다. 세속은 비록 찰라적이고 무상한 것이지만 그 안에 근원적인 것을 갖추고 있기에 근원적인 것의 일부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두 세계를 양분해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연관시켜서 이해하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삼사라>에서 보여준 세속은 따뜻하고 건강한 편이었습니다. 마을에서 만난 사람들은 오랜 시간 수행해온 타쉬 보다 훌륭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타쉬에게서 애인을 빼앗긴 남자는 처음엔 분노했지만 곧 마음을 바꾸고 타쉬와 페마의 결혼을 주선할 정도로 관대했고, 페마 또한 타쉬가 일꾼이 너무 많다고 해고하려고 하자 “왜 불쌍한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려고 하느냐”며 나무랐습니다.

또한 마을에 곡식을 수매하러 오는 장사꾼이 사람들을 속이면서 이익을 취한다는 걸 발견하고 타쉬가 불같이 화를 났을 때도 마을 사람들은 담담했습니다. 마을사람들의 생각은, 자신이 조금 손해 보더라도 상대방이 이익을 보면 누군가는 이익을 봤으니 나쁠 게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 사고를 극복한 사람들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비록 세속인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이기심을 극복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세속의 삶이, 그냥 욕망을 실현하는 그런 삶이 아니었습니다. 삶 속에서 사람들은 깨달음을 구했고, 관대함을 배우면서 점점 나은 삶으로 성장해갔으며,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삼사라, 윤회의 과정을 통해 자신을 성숙시켜갔던 것입니다. 세속은 그냥 소모적인 삶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타쉬는 선택의 갈림길에 섰습니다. 스승의 편지처럼 한 가지 욕망을 이겨내는 길, 승려의 길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아내와 아들이 있는 가정으로 돌아가 것인가? 영화는 타쉬의 선택에 대해 열린 결말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런 결론을 내린다는 건, 세속 또한 깨달음과 무관한 세계가 아니므로 타쉬가 승가로 돌아가던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던 그의 성장에는 별반 차이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삼사라>에서 보여준 세속은 전혀 비속하지 않았습니다. 티베트 불교가 보여주는 세속에 대한 긍정이 영화의 매력 같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승도 대단하게 표현하지 않고, 속도 비속하지 않게 표현하고, 두 세계가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담담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아마도 이건 라마불교의 세계관인 듯합니다. 이런 담백한 라마불교의 세계관이 뛰어난 라다크의 풍경과 조화를 이뤄 뛰어난 불교영화를 만들어냈습니다.

김은주/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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