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1868년 ~ 1933년)은 근대 서화의 대가로 다수의 사찰 편액을 남겼다. 조선과 청나라의 서화를 익히는 한편 근대 한국 묵죽(墨竹)의 새로운 화풍을 자리매김한 인물로 여러 서법에도 달통하였다. 선생은 1915년 ‘해강서화연구회(海岡書畵硏究會)’를 창설하여 근대적 교육을 통해 후학 양성에 기여하여 현대 미술의 발전에 기여한 바가 크다.


▲ 재단법인 선학원 현판.

해강의 삶과 작품

해강 김규진 선생(海岡 金圭鎭, 1868년 ~ 1933년)의 본관은 남평(南平)으로 평안남도 중화의 농가에서 1868년에 태어났다. 1906년(고종46년)에 대한제국 시종원 부경(侍從院 副卿)에 제수 받은 김기범(金起範)의 아들이다. 자는 용삼(容三), 호는 해강(海岡) 또는 무기옹(無己翁)을 즐겨 썼으며, 서화에 따라 백운거사(白雲居士), 취옹(醉翁), 만이천봉주인(萬二千峰主人), 동해어부(東海漁夫), 지공학인(至空學人), 지창노초(至窓老樵), 수정도인(守靜道人), 석전경수(石田耕叟), 청허재주인(淸虛齋主人), 삼각산인(三角山人), 포옹(圃翁), 동교(東橋) 등의 많은 별호를 사용했다.

선생은 어린 시절 외숙부인 경지당 소남(景止堂, 小南 李喜秀 : 1836년 ∼ 1909년) 선생에게서 글씨를 배웠다. ‘설경산수도(雪景山水圖)’로 유명한 소남 선생은 남종화풍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산수화와 난초 및 대나무를 표현함에 그 활달한 기세로 높은 평을 받고 있는 분이다. 소남 선생의 지도 아래 그림과 한문을 배운 다음, 해강선생은 1885년에 청나라에 건너가 진(秦), 한(漢), 송(宋), 당(唐)의 서화를 배우고 1893년에 귀국하였다. 1895년 평양에서 ‘조선국평양성도(朝鮮國平壤城圖)’를 그렸고 이어 1897년에 서울에 와서 궁내부 외사과(外事課)와 예식원(禮式院) 문서과의 관직을 얻었다.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명으로 영친왕(英親王, 懿愍皇太子, 1926년 ~ 1970년)에게 서법(書法)을 지도하는 스승 즉, 사부(師傅)가 되었는데 사부는 태자를 교육하는 시강원(侍講院)의 정 1품 벼슬에 해당한다.

이 후 황제의 명으로 일본에 건너가 사진기술을 배워 와서 우리나라 최초의 사진관인 ‘천연당(天然堂)’을 소공동(小公洞, 포덕문 밖)에 열었고 어전(御前)사진사로 활약하였다. 사진관이 위치한 천연당 건물은 민가 최초로 지어진 2층 건물인데 영친왕을 잘 가르쳐 준 답례로 그 생모인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엄비(嚴妃)께서 지어 준 건물이다.

1913년, 같은 건물 안에 최초의 근대적 화랑인 ‘고금서화관(古今書畵觀)’을 병설하여 그 곳에서 고서화(古書畵)와 아울러 자신의 작품과 여러 명숙(名叔)의 그림을 전시하고 중개하기도 하였다. 2년 후인 1915년에 ‘해강서화연구회(海岡書畵硏究會)’를 열어 학교제도와 같이 3년의 교육과정을 이수하여 졸업하게 하였다. 이는 1911년에 발족한 ‘서화미술회(書畵美術會)’에 이어 두 번째로 만들어진 근대적 미술교육기관이다.

눈에 띄는 장기로는 선생이 암벽에 쓴 대자(大字)가 있다. 1920년 외금강 구룡폭 암벽에 예서체로 새긴 ‘彌勒佛(미륵불)’[金剛山九龍瀑大刻書(금강산구룡폭대각서), 높이 64척 폭 10척]은 불교도의 부탁으로 새겨진 것이며, 해서체의 내금강 ‘法起菩薩(법기보살)’[높이 72척 폭 12척]의 대각서(大刻書) 등이 대표적인 각서(刻書)이다. 금강산 곳곳의 바위마다 글씨를 써 놓아 당시 그 솜씨에 대해서는 극찬을 받았지만 오히려 금강산 절경을 감쇄시켰다는 점에 대해 비판의 소리도 있었다. 매일신보에 금강산 스케치 연재하기도 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연재 스케치라고 한다.

이 외에도 해강은 활달하고 정묘한 필치로 각지에 글씨를 남겼는데, 진주 촉석루의 현액 ‘矗石樓(촉석루, 6·25때 소실)’와 서울 종로의 ‘普信閣(보신각)’ 그리고 천산정(天山亭)과 사자루(泗疵樓)의 현판 등을 들 수 있겠다. 문경의 천산정(天山亭)은 579년에 무념(無念)대사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천주사(天柱寺) 자리에 세워진 재사(齋舍)이다. 원래의 사찰은 의병(義兵)을 숨겨주었다가 폐사되었고 소산거사(小山居士) 황범주(黃範周)에 의해 누각이 지어진 것이다. 사자루(泗疵樓)는 1824년 임천면(林川面) 관아의 정문으로 세워진 것으로 이후 송월대(送月臺)로 옮겨진 것이다.

대한제국 대동단(大同團)과 연계해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의친왕(義親王, 義王, 1877년 ~ 1955년)이 쓴 현판인 ‘사비루(泗沘樓)’가 있고, 그 옆면 백마강변 쪽에 걸려있는 ‘白馬長江(백마장강)’이 바로 해강의 글씨이다.

또한 1920년에 재건된 창덕궁(昌德宮)의 희정당(熙政堂) 응접실 벽 동편과 서편에 각각 그린 ‘해금강총석정절경(海金剛叢石亭絶景)’, ‘내금강만물초승경(內金剛萬物肖勝景)’은 풍부한 색감과 세밀한 묘사가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 밖에 주목할한 것으로, 선생의 글씨를 가운데 두고 대한제국 궁내부 주임관(奏任官)을 역임한 죽농(竹儂) 선생의 그림이 에둘러 싸고 있는 형태의 합작이 있다. 단군전(檀君殿)을 건립하기도 했던 죽농 안형환(竹儂 安涥煥, 1881년 ∼ 1950년 추정)의 그림과 합작한 이러한 작품이 송광사, 백양사, 보석사, 해인사, 마곡사, 통도사 등의 대사찰에 편액과 사액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전국 각지의 사찰에 현액된 그의 작품 수가 많은 점에 대해 당시의 31본산에 글씨를 높은 가격으로 넘겼다는 비판도 있다.

해강의 벼슬은 시종관(侍從官)을 역임하였고 저서로는 ‘서법요결(書法要訣)’, ‘해강난죽보(海岡蘭竹譜)’, ‘육체필론(六體筆論)’ 등이 있으며, 당시의 교습교본으로 활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인화, 서화, 사군자 등을 가르쳐 후진을 양성하였고 ‘해강난죽보’는 당대의 묵죽과 묵란의 화법에 큰 영향을 끼쳤다. ‘육체필론(六體筆論)’ 외에 ‘육체필론습자첩(六體筆論習字帖)’이 있는데 두 책이 같은 것인지 현재로서는 불확실하다. 1918년에는 조석진(趙錫晉), 안중식(安中植), 오세창(吳世昌) 등과 함께 ‘서화협회(書畵協會)’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지만 곧 협회를 그만 두었고, 1922년에 조선미술전람회가 열리자 서예와 사군자부의 심사위원을 역임하였다.

서화연구회에서 사사받은 제자로는 송은 이병직(松隱 李秉直, 1896년 ~ 1973년), 여성화가 혜연 방무길(惠淵 方戊吉, 1898년 ~ 1934년), 죽사 이응로(竹士 李應魯, 1904년 ~ 1989년), 설해 민택기(雪海 閔宅基, 1908년 ~ 1936년) 등이 있다. 그리고 근대 한국화의 명인이자 이론가로 명성이 높은 청강 김영기(晴江 金永基, 1911년 ~ 2003년)가 해강의 장남이 된다.

대표적인 사찰 편액(사액 및 주련을 포함하여)

현재까지 알려진 해강의 사찰 편액 및 주련의 대강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서울 선학원
- 편액 : ‘禪學院’(중앙선원)

서울 경국사
- 편액 : ‘聽聲樓’, ‘華嚴會’, ‘茶爐經卷’, ‘法華會’(관음전)
- 편액 : ‘靈山殿’(영산전)
* ‘청성루’는 창경(蒼勁)한 행초(行草)
* ‘법화회’는 원경(圓勁)한 행서(行書)
*‘다로경권’과 ‘화엄회’는 고경(古勁)한 한례(漢隷)
* ‘영산전’은 장중(莊重)하고 침착(沈着)한 예서(隷書)

강화 전등사
- 편액 : ‘傳燈寺’(대조루 전면)
* ‘전등사’는 주경(遒勁)한 해서(楷書)

금산 보석사
- 합작 편액 : ‘寶石寺’(의선당 앞에 위치한 사문)
* ‘보석사’는 고예(古隷)

서산 개심사
- 편액 : ‘象王山開心寺’(안양루)
* ‘상왕산개심사’는 전(篆)과 고전(古隷)

예산 수덕사
- 정혜사의 편액 : ‘定慧寺’(수덕사의 부속암자)
* 건실(健實)한 해서(楷書)

장성 백양사
- 합작 편액 : ‘白羊寺’
- 편액 : ‘大伽藍白羊寺’
- 편액 : ‘香積殿’
- 소액 : ‘海雲閣’
- 주련 : ‘佛身普遍諸大會 充滿法界無窮盡 寂滅無性不可取 爲救世間而出現 其衆生生不可量 現大神通悉調伏’(대웅전)
* ‘백양사’는 졸박미(拙朴美)가 있는 고예(古隷)
* ‘대가람백양사’는 해서(楷書)
* ‘향적전’은 예서(隷書)
* ‘해운각’은 초서(草書)
* 주련은 당(唐) 안진경(顔眞卿) 풍의 후실미(厚實美) 넘치는 해서(楷書)

해남 대흥사
- 합작 편액 : ‘大興寺’
* ‘대흥사’는 행초서(行草書)

승주의 송광사
- 합작 편액 : ‘松廣寺’(우화각)
* ‘송광사’는 행서(行書)

하동의 쌍계사
- 편액 : ‘三神山雙磎寺’(일주문 앞) / ‘禪宗大伽藍’(일주문 뒤)
* ‘삼신산쌍계사’는 전서(篆書)와 고례(古隷)스러운 졸박미(拙朴美)가 있는 예서(隷書)

고성 건봉사
- 편액 : ‘不二門’(불이문)

삼척 영은사
- 편액 : ‘太白山靈隱寺’
- 편액 : ‘說禪堂’(설선당)
- 대웅보전, 팔상전, 칠성각의 주련과 심검당의 편액과 사액
* ‘태백산영은사’는 전서(篆書)와 고례(古隷)
* ‘설선당’은 청인풍(淸人風)의 전서(篆書)
* ‘대웅보전, 팔상전, 칠성각의 주련과 심검당의 편액과 사액’은 비윤(肥潤)한 행서(行書)

공주 마곡사
- 합작 편액 : ‘麻谷寺’
* ‘마곡사’는 행서(行書)

양산 통도사
- 주련 : ‘初說有空人盡執 後非空有衆皆捐 龍宮滿藏藥方義 鶴樹終談理未玄’(대웅전 전면)
- 주련 : ‘佛之宗家’, ‘國之大刹’(일주문 전면)
- 합작 편액 : ‘通度寺’(종무소)
* 주련은 당(唐) 안진경(顔眞卿) 풍의 후윤(厚潤)한 해행(楷行)
* ‘통도사’는 속필(速筆)스러운 방일(放逸)의 행서(行書)

합천 해인사
- 편액 : ‘大方廣殿’(대적광전의 뒷면), ‘金剛戒壇’(대적광전의 동쪽), ‘法寶壇’(대적광전의 서쪽)
- 사액 : ‘海印寺’(관음전)
* ‘대방광전’은 古隷 * ‘금강계단’은 連綿의 行草書
* ‘법보단’은 건경(健勁)하고 활달한 해행(楷行)
* ‘해인사’는 지두화(指頭畵)처럼 손가락에 먹을 찍어 쓴 행서(行書와 戱書의 성격을 겸함)

상주 남장사
- 편액 : ‘露嶽山南長寺’(일주문)
* ‘노악산남장사’는 전(篆)과 고례(古隷)

기타
: 서울 보문사, ‘普門寺’ (隷書) / ‘大雄殿’ (楷書)
: 경주 불국사, ‘佛國寺’
: 영천 은해사, 銀海寺 합작 편액
: 문경 금룡사, 金龍寺 합작 편액
: 의성 고운사, 孤雲寺 합작 편액

 

 


화격(畵格과 서격(書格)

해강선생은 전서(篆書), 예서(隷書),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 등 각 글씨의 법도를 익혀 그 솜씨가 탁월하여 묘경(妙境)을 이루었다. 산(山)ㆍ수(水)ㆍ조(鳥) 등을 잘 그리는 한편 손수 만든 큰 붓인 장모필(長毛筆)로 쓰는 대필서(大筆書)에서 그 기량이 독보적이었다. 특히 대찰의 편액과 주련을 다수 남겼는데 서울 선학원, 강화도 전등사, 고성 건봉사, 삼척 영은사, 공주 마곡사, 금산 보석사, 예산 수덕사, 장성 백양사, 순천 송광사, 하동 쌍계사, 양산 통도사, 합천 해인사, 상주 남장사 등의 편액과 사액 등에서 해강의 글씨를 살펴 볼 수 있다.

선생의 화격(畵格)은 고아한 여백(餘白)의 균형미, 그리고 하늘로 치솟는 활달한 기상이 감흥을 일으키게 하는 기백을 지녔다고 평가되고 있다. 아울러 산수, 화조, 채색세화, 사군자에도 능하며, 자유로우면서도 다양한 형태의 묵죽도(墨竹圖)를 즐겨 그렸다. 서격(書格)에 대한 평은 고아하면서도 풍성하고 기개 있으며, 때로는 이어질 듯 섬세하면서도 실로 윤택한 품격을 지닌다[蒼勁連綿]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서예는 전서(篆書)와 고경(古勁)의 한예(漢隷)를 넘나드는 경지를 보였는데, 단순하면서도 때로는 장중(莊重)하고, 때로는 조용하면서도 두텁고 풍부한 건실함[厚實]을 살려 내었다. 그리고 해행(楷行)에도 능숙하여 튼실한 강골의 기상[健勁]을 발출해 낼 뿐만 아니라, 당나라 안진경(顔眞卿) 풍의 중후한 맛이 넘치는 해서(楷書), 그리고 유려한 청인풍(淸人風)의 전서(篆書)에도 능숙하였다.

더욱이 행초(行草)의 경우, 원만하면서도 튼실한 세련미[圓勁美]가 무척 뛰어나 씩씩하고 건실한 격조가 조화를 갖추고 있어 화단의 평가를 높이 받고 있다. 여러 서법에 능하고 흥취에 흐름을 타는 서미(書味)는 활달하면서도 고아스럽고 또한 단아한 멋으로 중국과 일본에 까지 널리 알려져 있다.

참조서적
韓國繪畵大觀, 劉復烈, 文敎院, 1969.
韓國近代美術散考, 李龜烈, 乙酉文庫, 1974.
近代 韓國畵의 흐름, 李龜烈, 미진사, 1983.
金海岡遺墨, 友一出版社, 1980.
韓國寺刹의 扁額과 柱聯, 대한불교진흥원, 2000.

참고사항 
1) 일본에 다녀 온 시기와 사진관을 차린 시기가 불확실하며, 그 기간이
1903년 혹은 1906년 등으로 구술 혹은 저서마다 다르게 서술.
: 1903년 (혹은 1906년) → 생략.
2) 아래의 작품은 본문에 게재하지 않음.
: ‘天下奇絶(내금강,:大額書)’, ‘錦繡江山(평양, 浮碧樓)’과 ‘大雄殿(평양, 永明寺)’, ‘熙政堂大造殿(서울 창덕궁)’, ‘太極殿(서울 덕수궁)’ 그리고 ‘瀟湘大竹圖’와 ‘大富貴吉祥圖’ 등 →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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