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을 더 잘 알기 위해서는 어둠의 한가운데에 서야하지 않을까?
― 조르주 바타유

1. 감성적인 너무나 감성적인

아버지에 이끌려 수도원 생활을 시작한 골드문트에게 기적같은 하루가 왔습니다. 몇몇의 친구와 작당하고 수도원 밖으로 빠져 나간 날, 골드문트는 한 집시 여인을 만나고, 그녀로부터 처음으로 여자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결심합니다.

나는 가야만 한다고 느끼기에, 그리고 오늘 너무나 놀라운 일을 경험했기에 기꺼이 떠나는 거야.……한 여자에게 속한다는 것, 자기 자신을 바친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잖아!……아, 나르치스, 나는 네 곁을 떠나야만 해!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우리에게는 《지와 사랑》이란 제목으로 더 많이 알려진 작품입니다. 예전의 제목 그대로 나르치스는 지극히 이성적 인간, 골드문트는 매우 감성적 인간을 대변합니다. 출발부터 골드문트의 감성은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집시여인과 보낸 하루밤으로 그는 자신의 인생행로를 즉각 바꿉니다. 단지 느낌만으로 어렵고 힘든 길을 떠나지요. 그리하여 많은 여인들과 사랑을 나눕니다.

여자들의 사랑, 이성(異性)간의 유희, 그것이 그에겐 가장 소중했다. 그리고 그가 곧잘 슬픔과 권태에 빠져드는 성향이 생긴 것도 그 핵심을 따져보면 쾌락의 무상함과 덧없음을 경험한 데서 비롯되었다. 사랑의 쾌감은 순식간에 피어올라 황홀경에 빠지게 하고는 짧게 갈망에 불탔다가 금방 꺼지고 말았다.……그는 사랑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그런 비애와 무상함에서 느끼는 전율에 자신을 내맡길 수 있었다. 그러한 비애도 곧 사랑이요, 쾌감이었던 것이다.

해산하는 여인을 도와주며 골드문트가 문득 깨달은 것은 쾌락과 고통의 표정이 너무도 유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여인들과 쾌락을 나눌수록 그 환희의 무상함과 덧없음은 더욱 빈번해지고 절실해져 갑니다. 하지만 골드문트는 이런 무상함에서 오는 비애마저도 쾌감으로 받아들이며 사랑합니다. 골드문트는 마치 쾌락주의자(?)로 알려진 에피쿠로스의 충실한 제자라도 된 듯 고통마저도 쾌락과 섞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감성의 소유자인 골드문트가 예술에 눈을 뜨게 되는 건 숙명같은 것이겠지요.

너 같은 기질의 사람들, 그러니까 강렬하고도 섬세한 감성을 지녀서 영혼으로 느낄 줄 아는 몽상가나 시인들, 혹은 사랑에 빠진 사람들…… 그들의 삶은 충만해 있고, 사랑의 힘과 체험의 능력을 부여받은 존재들이지.…… 과일이 단물처럼 넘쳐흐르는 삶의 풍요로움, 사랑의 정원과 예술의 땅이 바로 너희들의 것이지.

그렇게 예술의 땅에 골드문트는 뿌리를 내리려 합니다. 아니 삶의 풍요로움과 사랑이 넘쳐흐르는 대지에서 영원한 자유인으로 방랑합니다. 결코 어느 곳에도 뿌리를 내릴 수는 없는……영원한 자유인! 이들이 너무나도 감성적인 인간의 전형입니다.

2. 이성적인 너무도 이성적인

너희들의 고향이 대지라면 우리들의 고향은 이념이야. 너희들이 감각의 세계에 익사할 위험이 있다면 우리는 진공 상태의 대기에서 질식할 위험에 처해 있지. 너는 예술가고 나는 사상가야. 너는 어머니의 품에 잠들어 있다면 나는 황야에서 깨어 있는 셈이지. 나에겐 태양이 비치고, 너에겐 달과 별이 비치고, 네가 소녀를 그리워한다면 나는 소년을 그리워해…

나르치스가 골드문트에게 서로가 얼마나 완벽하게 다른지를 가르쳐주려고 한 말입니다. 나르치스는 지극히 이성적인 인간입니다. 그는 풍부한 학식과 냉철한 판단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떠한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통제력의 소유자입니다. 태양이 비친다는 말은 명료한 세계, 모든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세계를 지향하며 그런 세계에 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반대로 어둠의 혼돈속에서 꿈꾸고 사랑하며 사는 세계는 달과 별이 비치는 곳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소년을 그리워한다는 말은 동성애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남녀간의 성적 쾌락을 지양하며, 순수한 우정을 그리워한다는 말입니다. 나르치스와 같은 사람들은 일체의 감각적인 것, 그리고 욕망의 대상이나 욕망 그 자체를 제거하며 순수한 정신세계, 바로 명료한 이성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고라는 것은 끊임없는 추상의 과정이지. 감각적인 것을 제거하고 순수한 정신세계를 구축하려는 시도일세. 그런데 자네는 정말 언제 사라져버릴지 모르는 것을 소중히 여기고 다름 아닌 덧없는 것 속에 세상의 의미가 들어 있다고 당당하게 주장하거든. 자네는 덧없이 사라지는 것을 그냥 지나쳐 보지 않고 거기에 자신을 바친단 말일세. 그렇게 스스로를 바침으로써 덧없는 것이 최고의 존재로, 영원을 닮은 존재로 숭고해진다네. 우리같은 사상가들은 하느님의 존재에서 세속적인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하느님에게 가까이 다가가려고 애쓰지. 그런데 자네는 하느님의 피조물을 사랑하고 재창조함으로써 하느님에게 가까이 다가간다는 말일세.

골드문트가 불완전한 피조물에서 영원을 발견해내고 스스로를 바침으로써 숭고해진다면, 나르치스는 일체의 세속적인 것을 제거함으로써 하느님에게 가까이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골드문트가 순간적인 쾌락에 탐닉하는 일이 덧없는 순간에서 영원을 읽으려는 욕망의 발로라면, 나르치스가 엄격한 수도자의 길을 걷는 것은 일체의 세속적인 것과 그에 대한 욕망마저 통제하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골드문트가 쾌락주의자의 모습을 띠는 것이라면, 나르치스는 금욕주의자의 전형입니다. 지극히도 스토아적인 삶을 보여주는 이가 바로 나르치스입니다.

3. 감성과 이성의 변증법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나르치스에게는 골드문트의 감성이, 골드문트에게는 나르치스의 이성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런 만큼이나 이들이 서로를 지향하고 추구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인간은 자신에게 없거나 부족한 것을 욕망하기 마련이지요. 이게 골드문트가 첫 작품인 사도 요한상을 나르치스의 형상으로 만든 이유입니다. 이런 현상은 매우 냉정하고 얼핏 오만해 보이기조차 하는 나르치스도 마찬가지입니다.

방해라니? 오, 골드문트, 너만큼 나를 북돋워준 사람은 아무도 없어. 너는 나한테 힘든 문제를 안겨주긴 했지만, 나는 힘든 문제를 결코 외면하지 않아. 그런 어려운 문제들을 통해 오히려 배움을 얻었고, 더러는 어려운 문제의 극복까지도 가능했단 말이야.

어찌 안 그렇겠습니까? 골드문트를 통해 드러나는 자유롭고 뜨거운 감성의 세계는 오히려 나르치스처럼 세밀한 성격의 소유자에게는 훨씬 더 강렬한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금욕주의자일수록 욕망은 원천적인 금지이기 때문에 더 강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욕망을 통제하는 과정은 치열한 투쟁입니다.

나를 부러워할 필요 없어, 골드문트.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평화란 존재하지 않아. 물론 평화가 있긴 하지만, 우리의 마음속에 늘 깃들어서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 그런 평화란 존재하지 않는 법일세.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평화는 잠시도 마음을 늦추지 않고 끊임없이 싸워서 얻어지는 평화, 나날이 새롭게 쟁취해야만 하는 그런 평화일 뿐일세.

완벽해 보이는 나르치스조차 자신의 욕망과 치열하게 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런 나르치스의 태도는 저 스토아학파의 금욕주의자들 모습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스토아학파가 추구하는 마음의 평화, 아파테이아[apatheia, 부동심(不動心)]는 끊임없는 자신과의 투쟁에서 얻어지는 경지인 것입니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이렇게 서로를 욕망하면서, 한편으로는 자신과 싸워가며 각자 자신이 속한 세계에 우뚝 섭니다. 한 사람은 존경받는 수도원장으로써, 또 한사람은 불세출의 걸작을 남긴 예술가로써 말입니다.

이제서야 비로소 깨어 있는 눈으로 보게 되었다.……각각의 작품은 아무렇게나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작품이 하나의 정신에 의해 만들어져서 오래된 벽과 둥근 기둥 그리고 둥근 천장 사이에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며 자리잡고 있었다. 여기서 몇 백 년에 걸쳐 지어지고, 조각되고, 그려지고, 보존되고, 고안되고, 가르쳐온 것들은 하나의 줄기, 하나의 정신에서 탄생되었으며 마치 한 나무의 가지들처럼 전체가 유기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오랜 방랑과 하나의 형상을 얻기까지의 험난한 여정을 거치며 골드문트는 예술가로써 최고의 경지에 이릅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자신과는 정반대쪽에 있는 나르치스의 세계를 보게 됩니다. 그건 오랜 세월 만들어지고 가르쳐지고 보존되며 내려온 하나의 줄기, 바로 하나의 정신으로 질서지워진 세계입니다. 그건 이성이 지배하는 엄격한 규율과 강인한 자기통제의 세계이며, 또한 아버지의 세계였던 것입니다. 이제껏 골드문트가 그토록 방황하면 찾아 헤맸던 것은 어머니의 세계이고 대지의 품이었습니다. 그건 감성이고 사랑이며, 쾌락인 동시에 고통이고, 생명이면서 또한 죽음의 세계입니다. 이렇게 분분히 생멸하며 흩어지는 세계를 하나의 통일된 체계로 질서지워주는 것은 골드문트 자신이 뛰쳐나왔던 아버지의 세계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통일성의 가치에 눈을 뜨게 됩니다.

이처럼 조용한 가운데 강력한 통일성을 이루고 있는 이 세계의 한복판에서 골드문트는 자신이 너무나 왜소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요한 수도원장, 즉 친구인 나르치스가 이처럼 압도적이면서도 조용하고 다정한 질서 속에서 전체를 꾸려가고 다스리고 있는 것을 볼 때만큼 자신이 왜소하다고 느껴본 적은 없었다.

하나의 세계가 통일성을 이루고 유지하려면, 그 통일된 체제를 향한 구심력이 작용하여야 합니다. 신앙은 구심력으로 작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 중의 하나입니다. 도덕적 의무감 또한 신앙 못지않은 강한 구심력을 갖고 있고요. 법과 규율은 구심력을 약화시키거나 구심력의 작용을 방해하는 요인들을 제거하는 아주 유용한 도구입니다. 하나의 구심점을 만들고, 이를 향해 구심력이 작용하도록 모든 도구와 장치들을 개발하며, 거기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게 바로 이성입니다. 이런 이성은 때로는 스스로가 강력한 구심점이 되기도 합니다.

반대로 감성은 원심력으로 작용합니다. 사람들은 통일된 체제, 사회적 안정과 질서 속에서 때로는 숨막힐듯한 억압을 느낍니다. 구심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체제에서 일탈코자 하는 원심력 또한 강한 법입니다. 암흑시대로 불려지던 중세에 오히려 축제의 열기가 고조되었던 것은 원심력, 즉 질서체제로부터의 이탈이 허용되는 유일한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금지된 빗장이 굳건하면 할수록, 규율이 엄격하면 할수록 거의 유일한 해방구인 축제의 한마당은 더욱 더 뜨거운 열기를 뿜어낼 것입니다.

원심력은 통제보다는 자유를, 전체보다는 개인을, 통일보다는 분열을 향하는 힘입니다. 골드문트가 살았고, 추구했던 삶은 바로 개인으로써의 자유로운 삶입니다. 그 길이 험난하고, 때론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지만, 하나의 생명으로써 느끼는 자유는 이들을 상쇄하고도 남을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만큼이나 원심력이 강력하게 작용하면 할수록 그 자유로운 영혼이 누리고자 하는 생명감도 더 강렬해지는 것이지요. 이것이 골드문트가 죽음을 무릅쓰고 뤼디아를 탐하고 아그네스에게 도전하는 이유입니다.

이런 골드문트가 만약 어떤 통일된 질서체제의 구심점으로 향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는 바로 원심력의 상실이고, 곧 자유로운 영혼의 죽음입니다. 나르치스를 구심점으로 하는 통일성을 깨닫게 되는 순간 골드문트는 자신의 왜소함을 느끼게 되고, 이는 곧바로 자유로운 창작열의 상실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예술가들에게는 바로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세계가 그 질서를 오래 유지하기 위해서는 구심력과 원심력의 균형이 절대적으로 요구됩니다. 구심력이 지나치면 사람들은 해가 쨍쨍 내리 찌는 황야에 서있게 됩니다. 반대로 원심력이 너무 강하면 질서는 와해되고 사회는 혼돈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전자의 경우를 마녀사냥이 횡행하던 중세에서 볼 수 있다면, 후자는 로마시대 말기의 타락상에서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구심력과 원심력, 이성과 감성의 조화는 하나의 세계, 하나의 질서체계가 유지되기 위한 절대적인 조건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양 세력이 강력한 힘으로 서로를 압도하려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 줄다리기가 만들어 내는 결말을 어떤 것일까요? 중도사상은 그 팽팽한 긴장감 위에 펼쳐집니다.

PS. 이 글은 민음사에서 펴낸 헤르만 헤세·임홍만 옮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텍스트로 쓴 글임을 밝힙니다.

김문갑/철학박사,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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