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자기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우리는 한 번도 우리 자신을 탐구해 본 적이 없다.
― F. 니체, 《도덕의 계보학》

1. 과학적인 너무나 과학적인

틈이 벌어진 암벽 사이에 핀 꽃
그 암벽에서 널 뽑아들었다.
여기 뿌리까지 널 내 손에 들고 있다.
작은 꽃 ― 하지만 내가 너의 본질을
뿌리까지 송두리째 이해할 수 있다면
하느님과 인간이 무언지 알 수 있으련만.


지난번 근본불교 세 번째 이야기에서 인용했던 시입니다. A. 테니슨의 〈암벽 사이에 핀 꽃〉이란 시로 지금은 고인이 되신 장영희 선생님이 번역하신 것이지요. 이 시에서 시인은 바위 틈 사이에 핀 작은 꽃을 뽑아들고 뿌리부터 세밀하게 살핍니다. 모양이며 색깔, 그리고 향기도 맡아 봅니다. 이렇게 모양과 색깔, 냄새 따위를 종합하여 ‘이것은 꽃이다’거나, 혹은 ‘이 꽃은 장미이다’라는 판단을 내립니다. 여기에서 꽃은 인식대상이고 모양, 색깔, 냄새 등은 우리들의 감각기관에 수용된 감각자료(sense data)입니다. 감각기관에 수용되는 과정을 ‘경험(經驗)’이라고 하며, 우리는 경험을 통해 얻어진 감각자료들을 종합하여 판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대부분의 지식은 이렇게 형성된 것들입니다.

경험론은 인식대상에 인식을 가능케 하는 요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사실로 전제합니다. 즉 인간은 인식대상, 예컨대 ‘꽃’이라는 사물에는 모양이나 색깔, 향기 등 감각되는 요소들이 ‘실재’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실재하는 요소들을 감각기관을 통해 ‘모사(模寫)’해 냄으로써 감각자료를 얻게 되고, 이 자료들을 모아 그 사물에 대해 판단하는 것입니다. 자료들을 모아 판단하기 때문에 ‘종합판단’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경험론은 실재론, 모사설, 종합판단 등의 개념으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한 가지를 덧붙인다면 경험론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논리가 귀납법(歸納法)인데, 귀납이란, 개별 사례들을 모아 하나의 일반 원칙을 찾아내는 과정을 말합니다. 예컨대 까마귀가 까맣다는 사실들을 모아 ‘까마귀는 까맣다’라는 판단을 일반명제로 확정하는 방법이지요.

경험론은 우리들의 상식과 가장 잘 부합합니다. 한편 경험 중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 관찰하고 때론 실험도 하면서 일반원리를 귀납하는 과정을 우리는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부릅니다. 그러므로 과학적 진리란 관찰과 실험이라는 특별한 경험과 귀납법이라는 방법론이 적용되어 도출된 지식을 가리키며, 본질상 경험을 통해 상식을 얻는 과정과 다르지 않습니다.

2. 나는 가설을 만들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과학적이란 말은 곧 진리라는 의미로, 반대로 비과학적이란 말은 미신이거나 어떤 진리성도 가지지 못한 걸로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과학적이란 말이 진리를 담보할 수 있을까요? 과학적 진리가 얻어지는 과정에서 실재론, 모사설, 종합판단, 귀납법 등의 전제와 방법이 사용되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과정을 하나하나 복기해볼까 합니다. 먼저 모사에 의해 얻은 지식이 진리인지 여부를 확인하려면, 인식대상인 사물과 인간의 의식 속에 모사된 관념이 일치해야만 합니다. 예컨대 꽃이라는 사물의 모양, 색깔, 향기 등과 같은 요소와 그것이 모사된 인간의 의식 속의 모양의 관념, 색깔의 관념, 향기의 관념이 일치하면 ‘이것은 꽃이다’라는 판단이 진리인 것으로 확정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게 과연 진리인지 검증하기 위해 우리는 다시 꽃을 지각하고 꽃의 여러 요소들을 모사해 냅니다. 이런 모사를 통해 다시 인간의 의식 속에 크기, 모양, 색깔 등의 관념이 형성되고, 이 관념을 종합하여 꽃여부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과정을 거쳐 조금 전의 판단이 옳은지 여부를 확정한다면, 이 판단은 종전의 관념과 새로운 관념의 일치 여부로 확정짓는 것입니다. 즉 ‘사물과 관념의 일치’라는 모사설은 결국은 ‘관념과 관념의 일치’에 다름 아닌 게 되어 버리고 맙니다.

종합판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컨대 꽃의 모양을 모사하여 모양의 관념을 만들고, 다음에 색깔을 모사하여 색깔의 관념을 만들고, 같은 방법으로 여러 요소들에 대한 관념을 형성하여 이들 관념을 종합하여 판단합니다. 이 경우 모양 다음에 색깔의 관념이 형성된다고 보면, 그 때는 이미 꽃의 모양이 변해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는 끊임없이 변화유전하니까요. 이른바 제행무상(諸行無常)이지요. 따라서 하나의 종합판단은 이미 지나간, 변하기 이전의 관념들로 이루어진 판단인 것이지요.

귀납법은 말할 것도 없지요. ‘까마귀는 까맣다’라는 명제는 단 한 마리의 흰 까마귀가 발견되는 순간 붕괴되고 맙니다. 귀납법은 애초부터 경험을 통해 얻은 부분적이고 특수한 사례를 근거로 전체에 적용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귀납에서 얻어진 결론은 필연적인 게 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귀납법에 의한 결론은 단지 가설에 지나지 않거나, 개연성만을 갖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런 문제에 천착했던 철학자가 바로 흄(David Hume, 1711~1776)입니다. 그는 인간의 사물 인식은 여러 관념들의 조합, 마치 관념들이 다발처럼 엮어져서 ― 이를 그는 ‘관념연합’이라고 불렀습니다. ―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관념이지 결코 사실이 아닙니다. 흄은 인간은 동일한 경험을 되풀이하다 보니까 마치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믿는 것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어제도 태양은 동쪽에서 떴고, 그제도 그랬고, 백만년 전이나 천만년 전이나 동쪽에서 떴기 때문에, 내일도 태양은 동쪽에서 뜬다고 믿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태양은 동쪽에서 뜬다’는 인식은 그 어떤 진리성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이처럼 인간이 진리라고 믿는 것은 단지 믿음에 불과하다고 해서, 이를 ‘믿음지’, 혹은 ‘신념지’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흄의 이런 주장은 당시 학자들에겐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흄의 주장대로라면 그때까지의 모든 과학적 성과가 일순간에 붕괴되게 되었으니 말이지요. 특히나 당시는 뉴턴 물리학이 전 유럽을 풍미하며 인간이성에 대한 확신과 찬미가 울려 퍼지던 때였습니다.

“나는 가설을 만들지 않는다.”

흔히 《프린키피아》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에서 한 뉴턴의 이 말은 현상의 배후에 있는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사변(思辨), 즉 형이상학에 의해서가 아니라 실험과 관찰이라는 과학적 방법을 통해 자연현상을 파악해야 한다는 선언이지만, 동시에 과학으로 이 우주의 모든 현상을 알 수 있다는 강렬한 확신의 표현이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즈음에 던져진 흄의 회의론은 한참 잔치 분위기가 무르익은 시점에 찬물이 끼얹어지는 것과 다름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흄은 잔치 분위기를 깨려던 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단지 경험론, 나아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일체의 독단을 경계하려는 거였습니다.

3. 무엇이 존재하고 어떻게 인식하나

불교에서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이라는 다섯 감각기관에 의(意)를 합쳐 육근(六根)이라고 하고, 이들을 통해 수용되어 우리의 의식 속에 형성된 감각자료, 즉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에 법(法)을 포함하여 육경(六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육근과 육경을 합하여 십이처(十二處)라고 하여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구조를 이룹니다. 여기에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이라는 대상에 대한 관념을 육식(六識)이라 하고, 십이처에 육식을 포함하여 십팔계(十八界)를 이루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계(界)는 산스크리트어 ‘dhātu’를 번역한 것으로 요소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십팔계는 인간의 인식을 성립시키는 열여덟 가지 요소를 가리킵니다. 감각과 의식, 그리고 식별하는 작용 일체를 인식이 성립하는 요소로 보고 이들 요소가 인연에 따라 모이고 흩어지며 세계(世界)가 현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불교가 구성하는 세계는 시작부터 인간의 인식작용을 기반으로 세워집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본질적으로 인식론입니다.

연기설(緣起說)은 존재론입니다. 인류의 정신사에서 보면 대개의 존재론, 혹은 형이상학이 지배담론의 자리를 차지하면, 인식에 있어서 강압적인 모습을 드러내곤 합니다. 기독교가 그러하고, 플라톤의 형이상학도 그랬습니다. ‘보지 않고 믿어라’, ‘안 보고 믿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라고 하는 식의 강압은 결국 믿지 않는 자에겐 지옥의 불구덩이 기다리고 있다는 협박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정신적 폭력이며, 종국에는 육체적 폭력까지 행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런 지배담론에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인식의 문제를 끄집어냅니다. 이들은 ‘어떻게 보지도 않고 믿으라고 하느냐?’ ‘분명히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는 태도를 갖고 지배담론의 형이상학에 대해 조목조목 분석하고 비판하게 되는 것이지요. 서양의 흄이나 동양의 도가사상이 대표적인 인식론 계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가 철학적으로 위대한 것은 존재론을 구성하기 이전에 인식에 있어서 충분한 분석과 반성을 거친 후에 교설체계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이 분석과 반성의 성과가 바로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입니다. 십이연기설은 십이지연기(十二支緣起)라고도 하여, 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육입(六入)·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의 열두 가지 항으로 연기법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흔히 이 교설은 생사윤회를 설명하는 이론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윤회를 십이연기로 설명하려다 보면 불합리한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억지스런 부분도 있고, 석가의 본래 교설과는 다른 부분도 생깁니다.

십이연기설을 연기법에 대한 인식론적 접근이라고 이해하면 어떨까요? 연기설이 존재론적 체계라면 십이연기설은 인식론적 이론체계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십이연기의 첫 번째 지(支)가 무명(無明), 즉 어리석음으로 시작된다는 것은 이 교설이 인식론적 반성 위에 세워졌음을 분명하게 밝히는 것입니다. 인류는 종교로, 철학으로, 그리고 과학으로 우주를 이해해 왔고 세계를 구성하여 왔습니다. 그런 정신사의 도정에서 독단이 횡행하고 폭력이 난무해 왔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우리 인간들의 생각이 만들어 낸 어리석음, 바로 무명(無明)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4. 헤픈 여자? 착한 여자?

▲ 영화 '가족의 탄생 포스터.
경석(봉태규 분)은 엄마가 한 유부남을 사랑해서 낳은 아이입니다. 또래에 비한다면 엄마는 할머니 같고 누나는 엄마 같습니다. 유치원에서도 경석은 외톨이입니다. 외롭게 성장한 경석에게 친절하며 다정다감한 채연(정유미 분)이 눈에 띄는 건 당연한 일. 하지만 채연은 모든 사람을 다 좋아합니다. 어려움에 처해 있다면 상대가 누구든 채연은 헌신적으로 도와줍니다. 하지만 채연의 이런 모습이 경석에게는 오히려 절망으로 다가옵니다. 경석은 채연이 자신에게만은 좀 더 많은 배려를 해주길 바랍니다만, 그런 바람은 번번이 실망으로 귀결되었으니까요. 결국 누나와의 저녁 약속을 펑크 낸 채연에게 경석은 선언합니다.

“우리 그만 헤어져.”
“……”
“넌 너무 헤퍼!”


경석이 채연에 대해 판단하는 과정은 과학이 지식을 얻는 과정과 동일합니다. 채연의 일거수일투족이 경석의 감각기관을 통해 모사되어 감각자료를 만들고,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 채연의 행동을 관찰하고, 이런 과정을 통해 모여진 자료를 종합하여 ‘채연은 헤픈 여자이다’라는 판단이 내려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판단은 이미 살펴본 것처럼 채연 본인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채연’이라는 사실과 ‘헤픈 여자’라는 관념의 일치여부는 확인할 수 있는 게 아님을 살펴보았습니다. 결국 채연에 대한 경석의 판단은 경석 자신이 갖고 있는 관념을 가져다가 제 멋대로 조립해서 판단한 것이지요. 저 혼자 고민하고 저 혼자 잠 못 이루다가 제풀에 나가 떨어진 것입니다. 경석 자신의 어리석음에서 만남과 헤어짐, 기쁨과 고통이 생기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과학자 한 분이 어린이들을 가득 모아 놓고 강연을 합니다. 그 분은 석양이 왜 붉게 물드는지를 알기 쉽게 설명합니다. 빛이 두꺼운 대기층을 통과할 때 생기는 산란 현상에 대하여… 한 켠에는 과학자의 강연을 열심히 듣는 똘망똘망한 어린 눈을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는 엄마들이 있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빛의 산란을 먼저 알게 합니다, 아이들은 그렇게 우주를 바라보고 세계를 그립니다. 석양의 아름다움을 몸으로 느껴보기도 전에 말이지요. 아이들에게 가하는 어른들의 지적 폭력은 아닐까요. 이게 무명(無明)으로 시작하는 현대 문명의 실상입니다.

김문갑/철학박사,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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