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 <리틀 부다>(미국, 1993)에는 서양에서 뿌리 내린 불교의 모습이 엿보입니다. 서양에서의 불교는 티베트 불교에 가깝습니다. 티베트불교의 중심사상인 ‘환생’이 서양 불교인들 사이에서는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 잡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서양 불교는 이 환생 개념을 바탕으로 형성된 불교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화에서는 이러한 서양 불교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리틀 부다>는 <쿤둔>의 감독 마틴 스콜세지처럼 거장의 반열에 오른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베르톨루치는 이탈리아 영화사에서 가장 뛰어난 감독 중 한 사람입니다. 베르톨루치 최고의 작품인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는 수많은 논문의 소재가 된 영화입니다. 이렇게 논문의 소재가 될 만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은 그렇게 많지가 않습니다.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갖고 있는 몇몇 감독에게나 주어지는 영광이지요.

이 거장은 어느 때부터인가 동양에 관심을 가졌고, 그렇게 탄생한 영화가 <리틀 부다>입니다. 이 영화는 동양에 대한 호기심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첫인상이라고, 서양인의 눈에 비친 동양의 신비로움이고, 불교의 첫 모습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초심자 서양인의 눈에 비친 불교는 무엇일까요?

 

서양인은 ‘환생’에 주목했습니다. 이 환생이라는 테마는 서양인들이 만든 불교영화의 단골 소재입니다. 이 영화<리틀 부다>가 더 오래됐지만 후의 <쿤둔>도 그렇고, <티벳에서의 7년>도 그렇고, 그들은 모두 환생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만큼 관심이 많다는 뜻이겠지요. 어쩌면 ‘불교는 환생’이라는 공식을 갖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양인들이 환생에 특히 관심을 갖는 것에 대해, 서양에 전해진 불교가 달라이라마 중심의 티베트불교기 때문이라고 여길 수도 있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티베트 불교의 ‘환생’ 개념이 서양인들의 의식이나 문화, 전통과 통하는 구석이 있었으리라 여깁니다. 단지 티베트 불교가 먼저 서양에 발을 디뎠다고 티베트 불교 중심의 불교가 서양에 전개되었다기보다는 ‘환생’의 개념이 서양인의 마음을 위로하는데 도움이 됐을 것 같습니다. 실용주의적 전통을 가진 서양인들은 그게 무엇이던 삶에 도움이 되는가, 그렇지 못한가로 가치를 평가하는 편인데, 윤회나 환생의 개념은 분명 그들의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지요. 이러한 일련의 수용 배경이 영화 <리틀 부다>에 엿보이는 편입니다.

영화의 시작은 염소가 등장하는 우화입니다. 죽을 처지에 빠진 염소가 웃으면서 자신은 이제 죽으면 다음 번에는 사람으로 태어날 차례인데, 자신을 죽인 성직자는 지금 자신을 재물로 바친 악업 때문에 장차 무수한 세월 염소로 태어나 재물로 바쳐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듣고 성직자는 염소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한다는 내용입니다.

영화는 이 이야기를 통해 환생의 구조와 의미를 짚어주고 있습니다. 에피타이저에 해당하는 염소 이야기는 다음 이야기인 스승의 환생자 찾기 스토리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이 염소 이야기는 우리 불교인의 입장에서는 군소리에 지나지 않지만 환생이 새로운 개념을 처음 접한 서양인에게는 누차 설명을 덧붙여야 할 만큼 놀라운 개념이었던 모양입니다. 영화 꽤나 만들어본 거장 베르톨루치가 이런 식의 군말을 늘어놓은 것을 보면 이 환생 개념이 얼마나 서양인에게 놀라운 것인지 실감났습니다.

 

염소 우화의 바톤을 이어받아 본격적인 환생자 찾기 과정이 전개됩니다. 스승의 환생자를 찾기 위해 티베트스님이 부탄에서 시애틀로 옵니다. 자신의 스승이 미국 시애틀에 사는 한 소년으로 추정되기 때문입니다. 노부 스님은 소년의 부모를 만나 당신들의 아들 제시가 자신의 스승인 도제스님의 환생자인 것 같으니 부탄으로 데려가 테스트를 거치고 싶다고 말합니다.

제시의 부모가 티베트인이라면 영광스럽게 이 사실을 받아들이겠지만 이들은 미국인입니다. 미국인에게 환생이라는 개념은 생소한 것입니다. 기독교적 환경에서 나고 자라온 이들은 사람이 죽으면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는 것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환생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죽어서 이 지구에 다시 새로운 존재로 나타난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논리였던 것입니다. 제시의 아버지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시의 아버지에게 꽤 슬픈 일이 생겼습니다. 가장 친한 친구의 죽음입니다. 친구의 죽음으로 슬픔에 빠진 아버지는 제시를 데리고 부탄에 다녀오면서 그 감정에서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부탄에 다녀오면서 그의 생각은 바뀌었습니다. 자신의 아들과 함께 다른 두 아이가 환생자 테스트를 받는 과정을 지켜보고, 노부 스님이 좌선상태에서 죽음에 드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자신의 아들 제시가 환생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친구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에서 쉽게 벗어났습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삶은 한 구간에 지나지 않기에 현재에 지나치게 집착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환생이라는 커다란 사이클에서 바라봤을 때 현재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일부이지 전체가 아니었습니다. 지금 이 몸과 육체를 중심으로 한 현재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 잠시 머무는 것이기에 마음을 온통 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집착심을 쉽게 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친구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에서도 금방 벗어나고 훨씬 행복해지는 기분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리틀 부다>의 제시의 아버지는 서양인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몸소 체험함으로써 환생이라는 개념을 믿는 게 자신의 삶에 유익하다는 걸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실용주의자 서양인들이 불교의 많은 개념 중 유독 이 환생에 집착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환생을 믿지 않는 것보다는 믿는 것이 삶을 제대로 살게 하고, 행복한 삶에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됐으니까요.

영화 <리틀부다>에는 환생담과 함께 부처님의 일대기가 같은 비중으로 표현됐습니다. 제시가 노부스님에게서 선물로 받은 책의 내용으로 나오는 싯다르타 얘기는 제시 이야기와 함께 교차 편집됐습니다. 부처님 이야기는 부처님의 일생 중 중요한 부분을 중심으로 찍었습니다.

룸비니 동산에서의 신비로운 탄생, 아시따 선인의 눈물, 생로병사를 목격한 슬픔, 왕궁 탈출, 지난한 수행, 수자타에게서 유미죽을 얻어먹는 장면, 마왕의 유혹을 뿌리치는 장면, 마침내 깨달음을 얻는 모습 등을 차례대로 보여줍니다. 너무나 잘 아는 내용이지만 뛰어난 표현력에 의해 새로운 감동을 느끼게 했습니다. 아카데미에서 9개 부문을 수상했던 영화 <마지막 황제>의 드림팀에 의해 촬영된 영화는 동양문화를 서양인의 시각에서 최대한 신비롭고 새롭게 보이려 노력했습니다.

특히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는 과정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깨달음을 얻기 전 마왕과의 일전입니다. 이제는 인간적인 모습을 거의 극복한 부처님이 우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손을 내밉니다. 물속 부처님과 물 밖의 부처님이 서로 손을 맞잡은 채 밀고 당기며 힘겨루기를 합니다. 그때 물속 부처님의 모습은 마왕의 모습으로 돌연 변합니다. 사실은 마왕이었던 것이지요. 이 설정이 참 좋았습니다. 사실 우리를 가장 속이고 괴롭히는 것은 ‘나라는 생각’이니까요.

 

부처님의 일대기가 서양인에 의해 표현됐는데 역사적 인물로서 묘사하려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도올 김용옥씨가 말했는데, 예수의 일생은 가장 신화적이면서 역사적으로 보여지기 위해 노력하는데 반해 부처님의 일생은 매우 역사적인데 이상하게 신화적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하면서 안타까워했었습니다. 그런데 서양인 베르톨루치는 역사적 인물로 부처님을 묘사했습니다. 물론 처음 일곱 걸음은 신화적 요소를 지니지만 대체로 뛰어난 한 인간을 보여주는 데 초점이 맞춰졌고, 이를 통해 불교가 사실적이고 역사적 종교로 보여줬던 것 같습니다.

김은주/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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