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축제는 끝났다. 그러나 여운은 길다. 건국 60주년, 현대시 100년, 만해축전 10년의 의미를 담고 설악산 만해마을에서 열린 2008 만해축전. 올해도 전국의 문학인과 예술인들이 운집한 가운데 열린 만해축전은 자유와 평화를 가르친 만해의 정신을 되새기고 세계로 전파하자는 다짐의 자리였다.
8월 11일부터 14일까지 열린[일부행사는 전후(前後)에 따로 열림] 만해축전에서는 만해대상 유심문학상 시상식을 비롯해 다양한 학술심포지엄과 시인학교, 고교생백일장, 시낭송, 공연 등이 이어지며 문학과 세상이 소통하는 길을 넓혔다. 특히 만해학술원이 주관한 ‘한국현대시 100주년 국제학술심포지움’은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위한 방법론의 모색과 만해 정신의 세계화에 대한 다양한 담론의 틀을 제공하는 자리였다.
모두 5차례로 나눠 진행된 이 심포지엄의 기조강연에 나선 이어령 前 문화부장관은 “한국시의 세계화는 불가능한 것도 어려운 것도 아니다. 우리글로 된 시를 제대로 읽는 것에서부터 번역의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역시 기조강연에 나선 김종길 고려대 명예교수도 “시를 언어적 측면과 의미의 측면에서 제대로 읽는 것에서 번역의 난제들을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만해축전의 하이라이트인 만해대상 시상식(8월 12일 오후 5시)에는 조계종 총무원장이자 만해사상실천선양회 총재인 지관 스님과 조계종 중앙종회의장 자승 스님을 비롯한 교계 중진 스님과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을 비롯한 유관기관장 등 1천여 명이 참석했다.
비가 오는 가운데 만해 평화의 종 타종을 시작으로 진행된 시상식에서는 평화부문에 로카미트라 잠부드비파회 회장, 문학부문에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 학술부문에 김태길 박사, 포교부문에 도선사주지 선묵혜자 스님과 로버트 버스웰 UCLA대 교수 등이 영예의 만해대상을 받았다.
만해축전은 지난 10년간 해마다 8월 중순에 백담사만해마을에서 열리며 국내에서 가장 크고 뜻 깊은 문학축제로 자리 잡았다. ‘유심상’과 ‘유심신인상’ ‘유심시조백일장’ 등 한국문학의 성장과 저변확대를 주도하며 문학을 통한 불교정신의 세계화를 주도해 왔다. 특히 만해대상은 그 폭을 세계의 지도자들에게로 넓혀오며 상과 수상자의 권위를 함께 높였다.
비보이(B-boy) 공연을 비롯한 젊음의 향연과 세계적 지성의 학문과 문학의 향기를 두루 통섭하는 포괄적인 문화향연으로 자리 잡은 만해축전. 만해의 자유와 평화 정신을 세계에 알리는 길은 한국불교를 세계에 알리고 한국불교의 정신에 세계인을 감화시키는 몸집 큰 포교사다.
무엇보다 만해축전은 종교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지 않다는데서 진정한 대승의 모습으로 어필되고 있다. 만해축전은 불교행사라는 이미지 보다는 불교의 정신을 세상으로 전파하기 위해 모든 종교를 아우르는 ‘큰 판’이라는 인식이 훨씬 두텁게 제고되어 왔다.
그래서 각종 상을 받는 사람들의 면면은 종교적 측면이 아니라 각 분야에서 인류에 기여한 공로가 우선적으로 평가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만해의 정신은 편협한 교조주의나 종파주의가 아니라 광활하고 포괄적인 인간주의였기 때문이다.
본상인 만해 대상을 받은 사람들만 봐도 그렇다. 달라이라마,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 前 대통령, 김대중 前 대통령, 세계적인 시인 월레 소잉카 등은 종교와 국가 인종을 초월해 자유와 평화에 기여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추앙받고 기려져야 한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국가원수도 김대중 前 대통령, 남바린 엥흐바야르 몽골대통령, 온딤바 가봉대통령이 포함되었으며 세계적인 학자와 예술가들이 만해대상을 받았다.
만해대상은 단순히 상을 주고받는 행위로 끝나지 않는다. 상을 주는 만해사상실천선양회의 의지가 상을 받는 거물급 수상자들을 통해 세계로 알려지고 또 수상자들의 영광이 만해정신의 깊이와 넓이의 무한성을 제고해 주는 것이다.
만해 축전은 한국문학의 성장판을 강하게 자극하는 영양제 역할도 톡톡히 해 내고 있다. 지난 10년간 만해축전에서는 모두 70건의 학술 심포지엄이 열렸다. 주제별로 나눠 보면, 문학 일반이 13건, 시조문학 관련 15건, 시문학 관련 5건, 종교와 문학 관련 11건, 문학관련 국제학술회의 6건, 만해의 문학과 사상 탐구 10건, 불교문제 5건 등의 분포를 보이고 있다.
이는 만해축전이 문학의 잔치이면서 종교와 사회문제 등을 포괄적으로 통섭하고 있음을 대변한다. 이들 심포지엄 내지 학술세미나에서 발표된 논문은 무려 357편이나 된다. 해마다 두툼한 자료집이 두 권으로 나오고 있고 문학인이나 연구자들은 이 자료집을 중요하게 소장하기도 한다. 만해축전이 한국 최고의 문학 축전으로 자리 잡았음을 잘 설명하는 대목이다.
1999년의 ‘만해학 국제학술대회’는 만해학을 국제적으로 확장하는 계기가 됐다. 2005년 광복 60주년을 기념해 마련한 ‘세계평화시인대회’는 노벨문학상 수상 시인인 월레 소잉카를 비롯한 국내외의 저명 시인 500여명이 참석한 대형 축제였다. 설악산과 금강산을 오가며 열린 이 대회는 한반도의 평화가 바로 세계의 평화라는 시인들의 목소리로 메아리 쳤다.
2006년의 현대시조 100주년을 기념하는 세미나와 민족시인대회는 시조가 우리 문단에서 더 이상 소외받는 장르가 아닌 당당한 민족의 정형시로 되새겨 지는 자리였다. 올 해 10주년을 맞은 만해축전의 주요 테마는 한국문학의 세계화 문제였고 관련 세미나에서 상당한 발전 동력을 얻었다는 것이 문단과 학계의 평가다.
만해축전의 실질적인 주관 주체는 만해사상실천선양회다. 만해축전의 관계자들은 한 해의 행사가 끝나면 곧바로 다음해의 행사 준비에 들어간다. 기획과 준비 작업에 쏟아 붓는 정성이 지난 10년간의 만해축전을 만들었고 또 앞으로 더욱 탄탄하게 자리매김 해 갈 축전의 원동력이다. 지역사회의 협조와 어울림도 만해축전의 중요한 주춧돌이고 문단의 각 단체들이 화합 모드에서 이 축전에 참가하여 생산성을 길러 나가는 노력 또한 만해의 가르침에 귀의하는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만해마을은 이제 만해의 마을이 아니라 세계의 마을이다. 거기 자유와 평화를 외치는 만해의 메아리가 있는 것이다. 끝나고 잊어지는 잔치가 아니라 다음이 기다려지는 잔치, 문인들의 영원한 ‘만남의 장소’, 문학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는 희망과 도전의 기회, 한국문학의 지평을 여는 새로운 문제의식의 산실 등등으로 규명되는 만해축전은 이제 10년이라는 세월의 한 매듭을 새로운 시간으로 발전시켜 갈 것이다.

임연태/현대불교 부국장

만해 용운 스님
선학원·심우장 오가며 신간회·만당 등 활동 주도
1944년 6월 29일. 해방을 불과 1년여 남겨두고 만해 한용운(1879~1944) 스님은 파란만장한 삶을 접어야 했다. 구국의 기도로 인한 과로, 갑자기 발병한 중풍, 영양실조 등이 그 원인이었다. 위당 정인보(1892~?) 선생이 애도사에서 묘사했듯 만해는 끝이 보이지 않는 역사의 내리막길에서 홀로 매운 향내 뿜어내던 고고한 풍란이었다.
1879년 홍성에서 태어난 그는 한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다가 27세 때인 1905년 연곡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이후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임제종 운동을 전개해 전통불교를 지키려 노력했으며, 중국과 시베리아 등을 유랑하며 힘없는 민족의 서러움을 뼈 속 깊이 체험하기도 했다.
1913년 귀국 후 스님은 항일운동을 본격화하는 동시에 『불교대전(佛敎大典)』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 등 저술과 잇따른 강연회를 통해 종래의 무기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적극적인 현실참여를 주장했다. 특히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운동을 이끌었으며, 온갖 고문에도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당당히 밝힌 유일한 대표로도 유명하다.
3·1운동 이후에도 스님은 선학원과 심우장을 오가며 신간회나 항일단체인 만당 등 활동을 주도했으며, 이와 더불어 1926년 발간한 『님의 침묵』은 그 시대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 애송되고 있다.
만해 스님은 66년의 그리 길지 않은 생애 동안 수많은 발자취를 남겼다. 스님은 선의 묘리(妙理)를 꿰뚫은 선사였고, 방대한 경전을 주제별로 정리한 교학자였으며, 죽는 날까지 조국과 민족을 위해 헌신했던 독립운동가였다. 또 모국어로 깨달음의 경지를 노래한 탁월한 시인이었으며, 교양잡지 『유심』과 『불교』를 발행한 언론인으로서도 한 획을 그었다.
스님이 그렇게 다면불(多面佛)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불교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또 그것을 어떻게 이 역사와 삶의 현장에 뿌리내리게 할 것인가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을 돌아보아 조금도 부끄럽지 않을 옳은 일이라 하면 용감하게 그 일을 하여라. 비록 그 길이 가시밭이라도 참고 가거라. 그 일이 칼날에 올라서는 일이라도 피하지 말라”고 강조했던 만해 스님. 그는 중생에게 새벽을 알리는 보살로서, 고통 받는 중생을 싣고 고해를 건너는 나룻배로서 그렇게 한평생을 살았던 선지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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