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나이트〉는 미국적인 너무나 미국적인 영화다. 슈퍼히어로들은 기실 미국 제국주의의 초상화라 할 수 있다. 슈퍼맨이 양지의 미국을 형상화한 것이라면, 음지의 미국을 그린 것은 배트맨이다. 낮에는 자산가로 활동하다가 밤이면 정의가 기사가 돼 박쥐날개를 펼치는 배트맨의 캐릭터는 자본주의의 종주국으로서 이념적 우방국들에게 원조를 아끼지 않았던 팍스아메리카나의 모습과 고스란히 일치한다.
주지하다시피, 신자유주의는 양극체제 붕괴의 산물이다. 지구화(Globalism)의 3요소인 △양극체제의 붕괴 △금융의 달러화 △전산화(혹은 인터넷) 혁명은 전 세계가 미국에 종속됐음을 알리는 구체적인 사례에 지나지 않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가장 큰 문제는 인류의 동서(東西) 문제를 해결한 대신, 남북(南北) 문제를 더욱 고착화시켰다는 것이다. 동서로 나뉘어 이념 대립을 하던 양극체제 때는 적어도 미국은 이념적 우방에 속한 빈곤국이 적대 진영에 빼앗기지 않도록 정의의 사도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양극체제가 붕괴됨에 따라 미국은 더 이상 그럴 의무가 없어진 것이다.
게다가 시카고학파에 의해 주창된 신자유주의 이론은 아담스미스의 이론에 기초했기 때문에 성장에만 중점을 둔 나머지 분배에 대해서는 그다지 괘념치 않고 있다. 경제활동과 관련된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국영산업을 민영화하고, 자본과 상품의 국가 간 이동에 장벽을 없앤다는 게 신자유주의 경제이론의 골자인데, 이는 곧 국가 내, 국가 간 빈부격차를 심화하는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지면서 분배에 방점을 찍었던 마르크스엥겔스의 경제이론도 더불어 붕괴된 것이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낳은 또 하나의 문제는 이성주의에 대한 회의론이다. 인간 이성의 확고한 신뢰에 의해 성립한 공산주의 국가가 붕괴됐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인간 이성은 신뢰할 수 없다는 의미가 된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철저한 약육강식의 경제논리에 의해 운영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풀이할 수 있다.
<다크나이트>의 최고 미학은 인간의 이성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배트맨과 조커는 선과 악의 대립구도를 이룬다. 조커가 배트맨에게 “네가 나를 완성시켜줘”라고 말하는 것은 선은 악의 다른 얼굴이라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다. 나중 시장 후보였던 하비 덴트가 화상을 입어 얼굴의 반쪽이 흉측하게 일그러진 것도 인간 내면에 내재돼 있는 선악의 양면성을 표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된다. 영화 속 배경인 고담시가 신자유주의 체제의 풍경이라면, 과연 누가 약육강식의 경제논리 사회에서 정의의 저울을 조율할 것인가? 이미 팍스아메리카나는 하비 덴트처럼 악의 얼굴로 일그러졌는데….
확답을 내리기 힘든 질문이지만, 필자는 종교의 몫이라고 말하고 싶다. 최근 국내에 출간된 알랭 바디우의 『사도 바울(새물결)』은 사도 바울이 한편에서는 로마제국의 권력에 맞서고, 다른 한 편에서는 죽음의 길만 판각해놓은 유대신앙의 율법에 맞선다는 것을 잘 묘파해놓았다. 사도 바울이 두 지배담론에 맞서 내세운 보편주의 윤리는 바로 ‘사랑’이었다.
불교는 어떠한가? 간단히 도식화하면, 불교사상의 요체는 연기(緣起)와 무아(無我), 그리고 자비(慈悲)라고 볼 수 있다. 우주 만물은 갈대다발처럼 묶여 있어 상호연관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나라는 것은 없다. 따라서 나의 것도 없으므로 일체 집착을 갖지 말고, 타자에 대해 무한한 자비심을 가지라는 게 부처님 설법의 주된 요지이다. 이러한 불법(佛法)에 입각해 살기 위한 실천요강이 바로 계(戒)이다. 물론 구약성경의 계명처럼 맹목적인 신앙을 강제하지 않지만, 불교의 계도 때로는 진리에 상충할 때가 있다. 이는 ‘생명을 가져다주어야 할 그 계명이 나에게 오히려 죽음을 가져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라는 사도바울의 언구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라는 임제선사의 언구가 상당히 닮았다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계율이 진리에 상충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일 것이다. 전자는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설화처럼 계율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정작 가장 중요한 가치인 ‘자비’를 실천하지 못할 때이다. 후자는 계율이 시대에 맞지 않을 때이다. 중국 선불교에서 따로 청규를 정해 당대문화에 맞게 승가공동체를 꾸렸던 것은 후자의 문제점을 잘 대변해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종교(宗敎)가 사전적 의미대로 ‘으뜸 되는 가르침’이 되려면 그 시대에 필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신자유주의 체제 속에서 종교는 끊임없이 상품화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종교는 시대변화에 순응하는 게 옳은 것인가? 아니면 본래의 위치를 지키는 것이 옳은 것인가?
신자유주의에서는 문화상품이 고부가 상품으로 주목 받고 있는데, 그 문화상품 중에는 불교고유의 문화인 선수행도 포함돼 있다. 불교계 안쪽의 상황을 보자면, 2002년 템플스테이의 성공 이후 일부 지자체와 사찰들이 연계해 선문화 체험단지를 만들겠다고 밝힌 바 있으며, 불교계 바깥에서도 단학수련을 비롯해 아바타, 명상수련 등 수많은 명상상품들이 쏟아지고 있다. 이런 현상들은 어떻게 봐야 할까? 그 해결의 열쇠는 만해 한용운 스님의 『조선불교유신론』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조선불교유신론』에서 만해 스님은 선실이 늘어난 것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견지하면서 이렇게 지적했다.
“요즘의 참선하는 사람들은 참 이상하다. 옛사람들은 그 마음을 고요하게 가졌는데, 요즘 사람들은 그 처소를 고요하게 가지고 있다. 옛사람들은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는데, 요즘 사람들은 그 몸을 움직이지 않고 있다.”
만해 스님이 이렇게 비판한 까닭은 참선의 요점이 ‘적적성성(寂寂惺惺)’에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님은 굳이 선실을 만들지 말고 “물을 나르고 땔 나무를 운반함도 묘용(妙用)아님이 없고, 시냇물 소리와 산 빛도 같은 진상(眞相)임을 알라”고 일러줬다.
그런가 하면 스님은 기취생활과 개걸생활을 일삼는 승려의 생활방법과 창궐하는 염불당을 강력히 비판하면서 반드시 생산 활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님은 승가공동체가 생산 활동에 적합한 이유로 자연계와 인사계의 특색을 들었다. 자연계의 특색이라 함은 사찰이 보유한 산림이 많은 것을 일컫고, 인사계의 특색이라 함은 수십, 수백 명이 집단을 이루는 승가공동체의 특성을 말한다.
만해 스님은 불교계가 경제적으로 자립하되, 건강하게 할 것을 강조했다. 사찰불사니, 선체험이니 하는 미명 아래 만불당과 요사채가 꾸준히 늘어나고 불교계의 현실을 봤을 때 만해 한용운 스 님의 지적은 어느 부분 여전히 유효한 실정이다.
“옷 안에 있는 밝은 구슬이 고용살이하는 가난을 풀어주지 않는다면, 이는 누가 그렇게 만들고 있는 것이랴”라는 만해 스님의 탄식에 귀 기울여 할 때이다.

유응오/불교투데이 편집부장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