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을 하면 날로 더해 가지만, 도를 하면 날로 덜어진다.
덜고 덜어 무위에까지 이르면 하지 않아도 되지 않는 게 없다.
― 노자, 《도덕경》

1. 신의 눈으로 본 세계

“그는 심지어 사파리를 떠날 때도 그라모폰(축음기)을 갖고 갔다. 세 자루의 소총과 한달치 식량, 그리고 모차르트… 우리들의 우정은 선물과 함께 시작되었지. 그 후, ‘챠보’로 가기 얼마 전 그는 나에게 또 다른 놀라운 선물을 주었다. 신의 눈으로 본 세계! 그리곤 생각했지 ‘이제야 알 것 같아. 신이 의도한 바를…’.”

영화 《아웃오브아프리카》는 이런 멘트로 시작합니다. 카렌(메릴 스트립 분)은 답답한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 친구 브릭센 남작과 결혼을 약속하고 아프리카로 건너갑니다. 케냐 도착 한 시간만에 결혼식을 올리고, 이들 신혼부부는 농장운영문제로 말다툼을 벌입니다. 이튿날 날이 새기도 전에 브릭센 남작은 사냥을 떠나고, 홀로 남은 카렌. 외로움이 아프리카에 남겨진 그녀의 숙명임을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카메라는 곳곳에서 카렌의 홀로됨을 집요하게 담아냅니다.

본래 막대한 유산의 상속녀였던 카렌은 많은 소유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외로움의 대가인 듯 그녀의 주위는 진귀한 물건으로 가득 차 있지요. 뻐꾹 시계, 크리스탈 잔 등등…

▲ 영화 《아웃오브아프리카》의 한 장면. 데니스가 모는 경비행기에서 아프리카를 내려다보는 장면이다.
이런 카렌에게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한 남자가 나타납니다. 제국주의와 인종차별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시절, 일체의 구속을 거부하며 아프리카 원주민들과 친구하는 데니스(로버트 레드포드 분). 그와 그녀는 사는 방식은 너무도 달랐지만, 운명인 듯 둘은 가까워집니다. 그리고 선물. 만년필은 그의 우정의 선물이었고, 비행기에서 보여준 광활하고 장엄한 아프리카의 풍광은 사랑의 선물이었습니다. 푸른 초원과, 초원을 가로지르는 강, 그 위에서 노는 홍학 떼… 너무도 아름다운 이 모든 게 신의 눈으로 본 세계일까요? 신의 눈높이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걸까요?

하지만 이건 데니스가 준 선물입니다. 신이 의도한 세계를 볼 수 있는 기회는 오직 신만이 줄 수 있는 선물이겠지요. 인간이 주고받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2. 깨달음은 아프리카로부터 온다.《아웃오브아프리카》

“나의 키큐유, 나의 리모지, 나의 농장.......엄청나게 소유하고 계시네요?”
“나는 그것들을 얻기 위해 충분한 대가를 치렀어요.”
“정확히 소유라는 게 뭐죠? 우린 소유자가 아니요. 스쳐지나갈 뿐이지.”

카렌과 데니스가 나눈 대화입니다. 소유욕이 강한 카렌은 이제 한 남자마저도 온전히 소유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본래 바람처럼 자유로운 남자 데니스에게 이런 카렌의 소유욕은 견디기 힘든 구속입니다. 결국 그는 떠나고, 그녀는 다시 홀로 됩니다.

커피농사는 대풍년이었습니다. 창고 가득 커피가 채워졌지요. 그리고 그날 밤의 화재. 신은 최고의 수확을 주시고 그 기쁨을 채 누릴 새도 없이 다 가져갑니다. 결국 농장과 카렌의 물건들은 처분됩니다. 텅 빈 저택 안에서 달랑 상자 몇 개 놓고 카렌은 초라한 저녁을 먹습니다. 집안으로 들어오던 데니스는 휑한 주위를 둘러보며 말하지요.

“난 당신의 물건들을 좋아했는데.”
“전 그것들 없이 사는 걸 좋아하기 시작했어요.”
“………”
“당신이 옳았어요. 농장은 결코 소유할 수 없어요.”

소유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진정한 자유와 사랑을 깨닫게 된 카렌. 그녀는 하인의 손에 끼워준 흰 장갑을 벗겨줍니다. 피부색에 둘러 쳐진 인종차별의 장벽을 무너지는 순간이지요.

▲ 영화 《아웃오브아프리카》 포스터
마지막 자존심까지 버려가며 카렌은 아프리카 흑인들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런 카렌 앞에 데니스가 나타나 함께 할 것을 약속합니다. 하지만 이 또한 새로운 소유가 시작되었기 때문일까요? 카렌에게로 가던 데니스는 비행기와 함께 이 세상의 구속에서 영원히 벗어납니다. 진짜 홀로 된 카렌. 하지만 그녀는 너무나도 소중한 선물, 바로 신이 주신 선물을 안고 아프리카를 떠납니다. ‘신의 눈으로 본 세계!’ 모든 걸 버린 자만이 볼 수 있고, 모든 걸 비운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세계.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침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던 세계. 바로 우리 인생의 깊은 뜻, 그 삶의 본질을 깨닫고 카렌은 아프리카를 떠납니다. 다음과 같은 인사를 남기며…

“감사합니다. 이곳에서 행복하세요. 저는 행복했습니다.”

3.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그런데 왜 신은 꼭 모든 걸 버려야만 삶의 본질을 알게 하는 걸까요? 빈털터리가 되고 난 후에라야 깨닫게 한다면 너무 잔인한 것 아닌가요?

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30이 넘도록 연애 한 번 하지 않은 친구입니다. 몇 번 소개팅을 주선했지만 그때마다 이 친구가 상대를 찼습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포기했지요. 그러던 중, 결혼식장에서 만난 신부의 한 친구에게 필이 꽂혔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 친구를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친구는 매일 아침마다 그녀의 대문에 장미 한 송이를 꽂기 시작했습니다. 꼬박 2년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단 하루도 거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딱 2년을 채우던 날, 장미 한 송이를 꽂고 돌아서는데 대문이 삐걱 열리며 그녀가 나왔더랍니다. 그리고 말했지요.

“아침이나 드시고 가실래요?”

그날부터 둘은 매일 아침을 같이 먹기로 하였습니다. 모든 일은 만사형통, 속전속결… 결혼식을 올리기까지 석 달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식장에 들어서는 신랑의 표정. 천하를 얻은 들 저보다 더 기쁠까 싶었지요. 그랬는데…. 둘은 1년 3개월 만에 이혼했습니다. 장미꽃 갖다 바친 2년도 못 채우고 말이지요. 하지만 친구 말은 지난 1년이 악몽이었다고 합니다. 둘이 소주 한잔 마시며 조용히 말했습니다.

“네가 이혼하는 건 당연하다. 네가 사랑한 여자는 너와 같이 아침을 먹던 그 여자가 아니었다. 너는 지난 30여 년간 만나길 고대하며 가꿔온 여자, 네 머릿속에 있는 여자를 사랑한 거지, 같이 살을 맞대며 살고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 너는 현실속의 여자에게 네 관념의 여자와 맞추라고 요구한 것 아니냐? 그와 맞지 않으니까 실망하고, 실망이 거듭되며 절망하고, 분노하고…. 너는 네 관념의 여자를 위해 현실 속 여자를 버린 거다. 그녀를 원망하지 마라.”

우리는 이 친구처럼 살아갑니다. 현대인의 머릿속은 온갖 관념으로 꽉 차있지요. 내가 원하는 여인상, 남성상, 성공적인 삶, 멋진 인생, 바람직한 대한민국…. 그렇게 온갖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 등등의 ‘~관’을 갖고 일상을 살아갑니다. 이런 관념들은 판단과 행동에 영향을 끼칩니다. 남녀가 사귀다 헤어지는 이유도 대개 ‘나는 이랬으면 좋겠는데, 너는 왜(내가 원하는 대로) 그렇게 못해주니?’이지요. 사람들은 이미 자신이 원하는 상대방의 모습을 머릿속에 채워놓고 상대가 거기에 맞는지 여부를 따집니다. 이게 어느 정도 일치하면 결혼하고, 살다가 아니다 싶으니까 갈등하고, 끝내 헤어지지요. 남녀관계만이 그런 게 아닙니다. 사회적·정치적 갈등의 원인도 이런 관념의 문제와 연결됩니다.

내 생각과 다르면 상대를 ‘꼴통’이니, ‘좌빨’이니 하며 부정합니다. 배운 게 많고 아는 게 많은 사람일수록, 그래서 지위가 더 높고, 버는 게 더 많은 사람일수록 그 정도가 더 심합니다. 파고다 공원에 매일 나오는 할아버지보다도 주요 언론사 편집위원, 그리고 국회의원이나 장차관이 갖고 있는 ‘~관’이 훨씬 더 완고합니다. 그래서 최고지도자 자리인 대통령의 역할이 중요한 겁니다. 이런 관점의 차이에서 오는 대립과 갈등을 조절하고 융화시켜야할 책임이 있는 거지요. 대통령마저 자기는 옳고, 자신의 뜻에 반대하는 의견은 다 잘못된 거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생각을 밀어붙이면 이 나라에서 발붙이지 못할 국민들이 무더기로 나오게 되는 겁니다. 이게 공자님이 ‘과감하면서 꽉 막힌 자를 미워한다’고 하신 이유입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먼저 자신을 꽉 채워 놓고 남보고 들어오라고 한들, 누구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먼저 나부터 비워야 합니다. 내 머릿속의 관념, 나의 바램, 나의 욕망부터 하나씩 지워, 얼마간의 빈 공간을 마련해 놓아야 그녀가, 그리고 그이가 들어와 쉴 수 있는 것입니다.

4. 무아(無我)의 경지에서 드러나는 세계

“학문을 하면 날로 더해 가지만, 도를 하면 날로 덜어진다. 덜고 덜어 무위에까지 이르면 하지 않아도 되지 않는 게 없다.”

이른바 노자(老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의 경지입니다. 이 무위 개념을 차용해서 불교에서는 무위법(無爲法)과 유위법(有爲法)을 말합니다. 유위는 인위·조작을 의미하니 유위법은 인위·조작을 통해 만들어 낸 세계, 즉 우리 중생들이 생각과 말과 행위로 만들어내는 세계를 가리킵니다. 바로 연기(緣起)하는 세계이며 우리들이 살고 있는 속계(俗界)이지요. 이런 일체의 인위·조작을 없앴을 때, 자연(自然), 즉 스스로 그러한, 있는 그대로의 실상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게 무위자연의 경지이고, 바로 무위법이지요.

팔정도는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념(正念), 정정진(正精進), 정정(正定), 이 여덟 가지 바른 도를 말합니다. 바로 보아야 바르게 사유할 수 있고, 바른 말을 할 수 있어야 바른 업을 쌓아 바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바른 생각으로 바르게 나아갈 수 있으며 올바른 선정에 들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게 정견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정견은 근본중의 근본입니다. 불자에게 ‘똑바로 보아라[正見]’는 명령은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지상 과제인 것입니다.

이론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똑바로 보면 ‘세계는 연기(緣起)하며, 연기하므로 무아(無我)’입니다. 이른바 ‘연기성공(緣起性空)’이지요. 하지만 이렇게 아는 것은 또 다른 증익견(增益見)에 불과합니다. 우리들의 머릿속에 불교에 대한 하나의 관념을 쌓은 것이지요. 그저 학문을 한 것에 불과합니다. ‘정견’은 먼저 나를 비워야합니다. 진정으로 무아(無我)를 실천했을 때, 드러나는 세계가 참된 연기법이고 진여성공(眞如性空)한 세계입니다.

모든 것을 잃고도 카렌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세계의 본질, 우주의 실상을, 그리고 삶의 깊은 의미와 그 속에서 피어나는 진정한 사랑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요? ‘신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그녀가 서양인이다 보니 기독교에 훈습된 문화이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카렌이 빈털터리가 되는 과정은 종래의 관념을 하나씩 비워가는 과정을 상징합니다. 서양의 기독교든 동양의 불교든, 그리고 유교나 도교든, 모든 큰 가르침은 먼저 자신을 비우라고 합니다. 그 비움의 대가는 행복이고 희열입니다. 종교적 의미를 더해 법열(法悅)이라고도 하지요. 이게 십지(十地)에서 초지(初地)를 환희지(歡喜地)라고 하는 이유입니다. 단지 내 머릿속을 오랫동안 지배해 오던 관념 하나를 내려놓는 순간부터 행복이 찾아오며, 바로 그때부터 세상은 바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김문갑 / 충남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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