法會因由分 第一
如是我聞하사오니 一時에 佛이 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하사 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으로 俱하사 爾時에 世尊이 食時에 着衣持鉢하시고 入舍衛大城하사 乞食하실세 於其城中에 次第乞已하시고 還至本處하사 飯食訖하시고 收衣鉢하시고 洗足已하시고 敷座而坐하시다.

한문번역본 『금강경』을 의지한 한글번역 요지는

천축삼장 구마라습 역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성의 기수급고독원에서 일천이백 오십 명의 비구와 함께 머물고 계셨다. 그때 걸식할 시간이 되자 부처님께서는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들고 사위성 시가로 들어가 차례로 한 집 한 집 다니시며 음식을 얻으셨다. 그리고서 사원으로 돌아 와서 공양을 하시고는 가사를 벗고 발우를 치운 뒤 발을 씨고 자리를 펴서 앉으셨다.

범어 원본을 의지한 한글번역
존경스러운 신성한 지혜의 완성에 대하여 예경하옵니다.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어느 때 스승님(부처님)께서는 1천 2백 5십 명이나 되는 많은 수행하는 사람들과 슈라-바스티 도성[사위성] 밖에 있는 제-타 숲속의 외로운 이들을 돕는 장자의 동산에 머물고 계시었다.
그때에 스승님께서는 아침 시간에 5조의 하의는 입으시고 발우와 9조의 상의를 가지시고 슈라-바스티의 시가에 나가서 공양 베푸는 것을 받으시면서 걸어 다니셨다. 스승님은 이렇게 거리에서 공양하실 것을 얻기 위하여 걸으시고, 공양을 마치시자 처소로 돌아오시어 발우와 9조의 상의를 치우신 다음에 두 발을 씻고 마련된 자리에 가부좌로 몸을 바로 세우고 마음을 모아서 앉으셨다. 이때에 여러 수행승들은 스승님이 계시는 곳으로 가까이 가서 그 분의 두 발에 머리를 대고 인사드린 다음에 오른쪽 어깨를 보이면서 스승님의 주위를 세 번 졸고는 그 곁에 모여 앉았다.

[주석]
姚秦(요진) - 중국의 북방에 있는 종족들이 세력이 강대해짐에 연합하여 침입해서 중원을 점령하여 중국에 여러 국가를 세운 5호16국 시대에 전진(前秦)의 부견왕(符堅王)이 중국의 중심지방인 장안(長安 : 현재의 西安)에 건국하였다가 그 옆에 건국하여 있던 북방 강족(羌族)의 왕인 후진 요장(後秦 姚萇)이 전진에 침입하여 전진과 부견을 치고 요진(姚秦)이라 하였으니 A.D.384~417년까지 번성하였다.

구마라지-바(Kumārajiva 鳩摩羅什 A.D.344~423) - 중앙아시아 실코로-드의 중간에 있는 구차[Kucha : 한대(B.C.206~A.D.220)에는 서역국가 구자(龜玆)의 땅이었고, 원대(1279~1368)에는 고차(苦叉)·고철(庫徹)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으며, 청대(1644~1911)에 이르러 ‘쿠처’라는 이름으로 불림) 출신. 천축(天竺)의 계빈국(罽賓國)에 유학하여 고향 구차국에 돌아가 대승불교를 선양하다가401년부터 중국의 요진왕에게 영입되어 장안에 있으면서 입적할 때까지 12년 동안 역경사업에 진력하여 3백여 권의 범어경전을 한역하여 후세의 현장삼장과 함께 중국의 2대 역경삼장으로 꼽힌다.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 Jetavana nāthapindadasya ārāma) - (범)프라세나짓 Prasenajit (파)파-세나디 Pasenādi 波斯匿王)의 제다(Jeta 祇多) 왕자의 소유인 동산을 수닷타(Sudatta 須達多) 장자가 그 땅을 구입하여 사원을 건립하여 불교교단에 시주한 정사가 기수급고독원정사이며 간략히 기원정사라 한다.

스승(bhagavan 師) - 인도에서는 제자들이 그의 스승을 부를 때 이렇게 불었으므로『금강경』에서의 번역도 부처님과 회화하는 부분에서는 다 스승[師]이라고 하였고, 신격화하여 부를 때만 세존(世尊)이라고 하였다.
수행하는 사람들(bodhisattva 菩薩 大士 開士) - 구도자(求道者)를 말함.

오른쪽 어깨를 보이면서 스승님의 주위를 세 번 돌다 - 우요삼잡(右繞三匝)이라고 한다. 고대의 인도에서는 고귀한 분에게 최상의 존경을 표할 때, 오른쪽 어깨·옆구리를 예경하고자 하는 분에게 보이게 향하여 그 분의 주위를 세 번 돌아서 예배하였다. 이에 따라 불교교단에서도 부처님 당시부터 이와 같이 예경하였고, 뒤의 아시아 여러 나라의 불교승려들도 이 같은 예경을 따라 지녔다. 따라서 한국의 불교사원에서도 법당의 불상을 돌거나 또 탑돌이를 할 때에 오른쪽을 보이며 도는 것이[右繞] 정칙이다. 현대 인도의 힌두교 사원에서도 이 같은 방식으로 본존을 돌며 예경을 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강설]
부처님이 돌아가신 뒤 그 가르침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최초의 결집이 행해진 곳은 라-자가하 도성[왕사성]의 밖에 있는 칠엽굴이었으며, 이 굴은 죽림정사 뒷산의 중턱에 있다. 죽림정사는 마가타국 왕사성의 빈비사-라왕이 부처님에게 시주한 절이다. 이 절은 불교교단에서 갖게 된 최초의 절이었기에 바로 이 죽림정사를 거점으로 삼아서 불교가 각지에 전하여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마가타국의 수도 왕사성은 불교교단의 중심지였으며, 따라서 제 1회의 결집이 이곳에서 행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이 제 1회의 결집에는 5백 명의 아라한 즉 원시불교에서의 불도를 깨달은 최고의 성인들이 소집되어서 경전 결집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 결집을 위한 회의의 의장은 마하-가샤파(대가섭)이며, 경전을 편집하는 부분의 주임으로 선출된 제자가 아-난다(아난)이다. 제자들 가운데 총기가 가장 뛰어난[다문제일] 아난이야말로 부처님이 일생동안 설하신 가르침을 편집하는데 있어서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아난이라도 부처님의 설법을 모두 직접 들은 것은 아니며, 간접적으로 다른 비구들에게서 들은 것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아난이 중심이 되어서 경전을 결집함에 있어서 맨 먼저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如是我聞], 어느 때[一時] 스승님[佛]께서 어느 곳[住某處]에서 누구[輿某俱]하고 계시었다.”이렇게 말하기 시작하였다 한다. 다시 말해서 제일 먼저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하고 분명히 밝힌 다음에 부처님이 어디에 계셨고 어떤 상황이었던가를 설명하고 나서 부처님께서 어떤 법을 어떻게 설하셨는지를 말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마치 현대에서 기자들이 신문에서 사건을 보도하는 기사를 구성함에 있어서 ‘When 언제 Who 누가 Where 어디서 What 무엇이 How 어떻게’의 ‘4W 1H’ 원칙에 의지해서 기술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하겠다.
전통적인 불교교학의 해석법으로는 이 부분을 법회가 이루어지게 된 동기를 밝히는 머리말[序分] 가운데 믿음을 증명하는 첫 글[證信序]라 부르며, 이것을 6성취(六成就) 즉 ①믿음을 이루는 부분[信成就=如是] ②직접 들었음을 이루는 부분[聞成就=我聞] ③때를 이루는 부분[時成就=一時] ④설법의 주인을 이루는 부분[主成就=佛] ⑤장소를 이루는 부분[處成就=在某處] ⑥청법대중을 이루는 부분[衆成就=與大比丘衆…]의 여섯 가지 원칙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아난이 한 가지씩 기억한 것을 독송하여 그것이 틀림없을 때는 그곳에 참석한 전원이 그것을 다 함께 세 번 되풀이 하여 합창함으로서 그 경전은 확인되어서 확정지어지곤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작업이 꾸준히 계속되어서 많은 원시불교 경전들이 성립되었으나, 그렇게 해서 확인된 경이 그 당시에 문자로 기록되는 일은 없었다. 그 때에도 이미 문자가 있었으며 필기하는 도구도 다 있었지만 구태여 문자화하지를 않았던 것이다.
불교가 성립되기 이전부터 그리고 그 이후에도 인도에서는 오랫동안 전통적인 바라문교의 『리구 베다』등의 성전이 문자화되는 일이 없었다. 그 이유는 인도의 독특한 카-스트 제도 때문이었다. 사회적으로 낮은 계급의 사람들이 보면 성스러운 경전이 더럽혀진다고 생각하였던 까닭에 성전의 거룩한 진리는 가장 높은 계급의 바라문들이 자기들 머릿속에다 간직하도록 하였고, 이렇게 하면 성전이 절대로 더럽혀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불교의 경전이 초기의 시대에 문자로 이룩되지 않았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불교는 카-스트의 차별을 인정하지 않는 종교이기에 그런 이유와는 상관이 없다. 오히려 경전의 원본을 만듦으로써 그것을 보유하는 일부의 특정인들이 독점하여 권위자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경전을 교단의 전원이 기억하여 전해가도록 하였던 것이다. 또한 머릿속에 든 경전은 그 어떤 힘으로도 빼앗을 수 없으며 어떤 재난을 당하여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 『금강경』은 부처님 당시에 있어서 마가타국과 함께 불교교단과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푸라세나짓왕[바사익왕]이 다스리고 있는 고-사라국(교살라국)의 수도 슈라-바스티 시[사위성]의 제타 숲에 있는 외롭고 가난한 사람들을 잘 돕기로 이름난 수닷타라는 사업가[수달다 장자]가 부처님과 그 제자들을 위해서 지어 바친 절[기수급고독원 또는 기원정사]에서 바야흐로 설해지려는 것임을 밝히고 있으며, 이 부분을 중국 양(梁)나라 소명(昭明)태자가 나누었다고 하는 32분절에서는 ‘법회가 열리는 연유[法會因由分 第 一]이라 하였다. 이것은 본래 『금강경』의 원본에 없는 것이나 내용을 분별하기에 편리한 까닭에 예부터 중국이나 한국에서 구마라습의 번역본에다 이 32분절을 붙여서 의지하여 왔던 것이기에 이에 따라서 여기에서도 32분으로 나누어 보아 나가기로 하였다.

인환 스님/전 동국대 교수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