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아라한이 된 수행자들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도 인정되지 않으나, 수행 방법에 따라 심해탈 아라한과 혜해탈 아라한으로 구분됨을 전호에서 살펴보았다. 이것은 곧 아라한이 된 수행자들에게는 깨달음이란 면에서는 동일하지만, 수행의 결과로 얻어지는 신통력(초인적 능력)의 면에서는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두 아라한의 차이를 부각시켜 이종(二種)아라한이라고도 표현한다.
그러나 이 두 아라한에게는 질적인 차이는 인정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번뇌를 모두 여의고 깨달음을 성취했다는 점에서는 어떠한 차이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대가 흘러 부파불교 시대로 접어들면, 아라한에 대한 시각도 변화를 겪게 된다.
먼저 아라한에게도 과실이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한다. 즉 아라한이라고 해도 완벽한 존재가 아닌 까닭에 다섯 가지의 과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대천(大天)이라고 하는 스님이 주장한 오사(五事)이다. 이 오사는 아라한에게 다섯 가지 과실이 있을 수 있음을 밝힌 것으로 당시 불교계에 커다란 파문을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다.
이 오사가 제기된 것은 아라한에 대한 승단 내부의 인식과 사회적 인식이 부정적으로 바뀌기 시작했음을 시사한다. 수 차 언급했듯이, 아라한은 여래의 열 가지 호칭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며, 불멸후 승단의 실질적 리더 역할을 담당해 온 존재였다. 그러한 아라한이 승단 내부에서부터 부정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오사로 인해 교단은 대중부와 상좌부로 나뉘는 근본 분열이 일어나 부파불교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견해가 있을 정도로 대단히 심각한 주장이었다. 그래서 이 견해는 상좌부와 설일체유부 등 당시 가장 유력한 부파의 논서 속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차후에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이러한 아라한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아라한이라고 해서 모두 동일한 경지로 볼 수 없다는 인식으로 전환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아라한에 대한 이해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6종 아라한론과 퇴실론(退失論)이다.
6종 아라한은 아라한이 된 수행자들 사이에 차별이 존재한다는 관점이다. 이 차별은 앞서 언급한, 심해탈과 혜해탈의 차이와는 차원이 다르다. 6종 아라한론의 핵심은 아라한과를 얻은 수행자가 아라한과로부터 물러난다고 하는 이른바 아라한 퇴실론에 있다.
아라한은 모든 번뇌를 소멸시켜 더 이상 닦아야 할 것이 없기 때문에 무학(無學)이라고도 일컫는다. 그래서 아라한 이외의 성자를 닦아야 할 바가 남아 있는 성자라고 해서 유학(有學)이라고 하여 구별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라한의 경지에서 물러난다는 것은 무학의 경지에서 유학의 경지로 떨어짐을 의미한다.
6종 아라한론이나 아라한 퇴실론의 경우, 모든 부파가 인정한 설은 아니었다. 경전이나 논서를 보면, 모두 설일체유부 계통의 경전이나 논서에서만 주장되는 이론이다. 이 이론에 대해서 논쟁을 벌였던 대표적인 부파로는 상좌부를 들 수 있는데, 상좌부는 설일체유부의 퇴실론을 비판하였다.
여하튼 6종 아라한론은 설일체유부라는 독특한 부파적 배경을 갖고 있는 이론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교리적 내용은 생략하기로 한다. 그럼, 이 6종의 아라한의 내용은 무엇인지 개괄하여 소개해 본다.
첫째는 퇴법(退法) 아라한이다. 이 아라한은 아라한의 경지로부터 물러날 수 있는 아라한을 가리킨다.
둘째는 사법(思法) 아라한이다. 이 아라한은 아라한의 경지로부터 물러나는 것을 두려워해 스스로 자해, 즉 목숨을 끊어 열반에 들려고 하는 아라한을 가리킨다.
셋째는 호법(護法) 아라한이다. 이 아라한은 아라한의 경지로부터 물러나지 않도록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아라한을 가리킨다.
넷째는 안주(安住) 아라한이다. 이 아라한은 아라한의 경지에서 물러날만한 강력한 원인이 없는 한, 스스로 보호하지 않아도 아라한의 경지에서 떨어지지 않는 아라한을 가리킨다. 그러나 더욱 더 정진하지 않으면 그 이상의 경지의 아라한에 도달하지 못한다.
다섯째는 감달(堪達) 아라한이다. 이 아라한은 머지않아 부동에 통달할 수 있는 아라한을 가리킨다.
마지막 여섯째는 부동법(不動法) 아라한이다. 이 아라한은 결코 아라한의 경지에서 물러나지 않은 아라한을 가리킨다.
이상이 6종 아라한의 내용이다. 6종 아라한론은 초기불교에서는 볼 수 없는 이론이기는 하지만, 굳이 배대해 보면 마지막 부동법 아라한이 초기불교의 아라한에 해당할 것이다. 초기불교에서는 일단 아라한이 된 수행자가 다시 유학의 성자로 떨어진다는 내용이 결코 설해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부동법 아라한 이외의 아라한 가운데, 유학의 성자로 떨어진 수행자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 중현은 『순정리론』에서 “아라한이 그 과위로부터 물러난다고 해도, 그것으로 인해 다음 생을 받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아라한과로부터 물러나더라도 그대로 열반에 들지 않고, 곧바로 다시 아라한과를 성취한 뒤에 열반에 들기 때문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는 곧, 아라한의 경지에 오른 수행자는 비록 일시적으로 유학의 경지로 떨어질 가능성은 있으나, 떨어진다고 해도 바로 다시 아라한의 경지로 돌아옴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라한의 경지로부터 물러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설령 떨어짐이 있다고 해도 곧 다시 아라한의 경지를 획득한다면, 떨어진다는 것의 의미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럼에도 6종 아라한론과 퇴실론이 제기된 것은 아라한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교리적인 문제로 확대되어 일어난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아라한 퇴실론과 6종 아라한론은 아라한에 대한 명백한 인식의 변화가 반영된 이론일 뿐이지, 실제상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필원/청주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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