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緣起)를 본다면 곧 법(法)을 보는 것이요, 법을 본다면 곧 연기를 보는 것이다.
-《중아함경》


1. 우연과 필연 사이

운명은 어떠한 가정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필연입니다. 어느 누구도 피해 갈 수 없고, 어떤 예외도 끼어들 수 없습니다.

▲ 그들이 만나 가장 좋았던 시간은, 서로의 삶이 엇갈리는 순간이었다.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포스터
만약 단 한 가지만이라도 다르게 일어났더라면..... 그 운동화 끈이 끊어지지 않았더라면..... 택배트럭이 조금만 더 일찍 움직였더라면..... 그 남자가 알람에 맞춰 5분만 일찍 일어났더라면.... 택시 기사가 커피를 마시지 않았더라면..... 그 여자가 자기 코트를 잊지 않고 나와서 앞의 택시를 잡았더라면..... 데이지와 그녀의 친구가 그 길을 건너지 않고 택시가 지나갔더라면.......”

이들 중 단 한 가지만이라도 다르게 일어났더라면,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찰나의 순간들이 일련의 시리즈로 엮여 무용가 데이지의 인생을 바꿉니다. 이 또한 운명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것 아닐까요?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시간을 거슬러 사는 주인공을 통해 이미 정해진 삶의 길이만큼만 살아가야 하는 운명적 삶과 그 속에서 벌어지는 운명적인 만남, 그리고 사랑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산다는 건 그러니까 삶을 가로지르는 일련의 사건들로 이루어지지. 어느 누구도 제어할 수 없어”

삶을 가로지르는 사건들은 누구에게나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통제할 수 없기에 피할 수 없습니다. 이런 통제불능은 역설적이게도 우연히 발생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아무런 법칙도, 규칙도 없이 우연히 일어나는 사건을 누가 통제하고 제어할 수 있겠습니까.

《오이디푸스 왕》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이 신들에 의해 예정된 운명이기에 인간으로써는 통제할 수 없는 필연이라면, 이 《벤자민 버튼…》에서의 사건들은 그냥 우연히 발생합니다.

2. 약간의 일탈, 그 운명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자유

물체들이 자체의 무게로 인하여 허공을 통하여 곧장 아래로
움직이고 있을 때, 아주 불특정한 시간,
불특정의 장소에서 자기 자리로부터 조금,
단지 움직임이 조금 바뀌었다고 말할 수만 있을 정도로, 비껴났다는 것을
하지만 만일 그들이 기울어져 가 버릇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은 아래로
마치 빗방울들처럼, 깊은 허공을 통하여 떨어질 것이고,
충돌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고, 타격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기원들에게는, 그래서 자연은 아무것도 창조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시의 작가인 루크레티우스는 헬레니즘시대의 철학자 에피쿠로스를 깊이 흠모했고, 그를 따라 고대 그리스의 원자론자인 데모크리토스의 철학에 심취했습니다. 물체들이 허공을 통하여 곧장 아래로 움직인다는 말은 원자들의 움직임을 말합니다.

이런 원자들의 움직임에서 어떻게 우주 만물이 생겨나느냐가 이 시의 주제입니다. 루크레티우스의 입을 빌려 에피쿠로스는 우연히 생긴다고 말합니다. 그는 비처럼 쏟아지는 원자들 중에 어느 하나가 아주 약간 틀어져서 다른 원자들과는 달리 사선으로 내려오다 보면 다른 원자들과 충돌이 생기고, 이 충돌로부터 만물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완전 우연이지요. 언제 어디에서 왜 비껴나는지, 왜 틀어져야 하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습니다. 그건 전적으로 자유입니다. 아주 약간의 ‘비껴감’, 어느 때 어느 곳이든 조금, 단지 아주 약간의 비껴남이 모든 창조의 원동력이라는 것입니다. ‘이 현상계 모든 존재, 모든 사건은 완전한 우연, 전적인 자유의지로 생긴 것이다’라는 겁니다. 멋있지 않나요?

새 운동은 옛 〈운동으로부터〉 정해진 순서를 좇아 생겨난다면,
그리고 기원들이, 원인이 원인을 무한한 시간부터 좇게 되지 않도록,
비껴남으로써 운명의 법을 깨뜨릴
운동의 어떤 시작을 이루지 않았다면,
대체 어디에서 이 자유의지가 온 땅에 걸쳐 동물들에게 생겨나 있는 것이며,
묻노니, 대체 어디에서 운명으로부터 빼앗아낸 이 의지가 생겨나서,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쾌락이 각자를 이끄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또 마찬가지로, 정해진 시간에 공간적으로 정해진 자리에서가 아니라,
정신 자체가 이끌어간 그곳에서, 그때에 운동의 방향을 비껴 바꾸는 것일까?

약간의 ‘비껴남’은 운명의 법을 깨뜨리며 필연법칙을 무력화시킵니다. 그리하여 자유의지에 따라 각자 쾌락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게 합니다. 에피쿠로스의 사유를 따라 가노라면 우리는 운명론이 주는 삶의 중압감으로부터 해방과 자유를 느끼게 됩니다. 이런 해방과 자유는 쾌락의 원천입니다. 에피쿠로스 철학이 쾌락주의로 읽혀지는 이유 중의 하나이지요.

에피쿠로스철학은 강렬한 유혹이면서 동시에 매우 위험한 사상입니다. 그가 말하는 해방과 자유는 운명, 혹은 필연이라는 이름으로 통제되는 질서체계를 한순간에 허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의 엄숙주의와 이성주의의 필연법칙이 지배하던 서구사회에서 그의 철학은 억압되고 기피되어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에피쿠로스 철학은 그가 남긴 몇 마디 말과, 약간의 서간문, 그리고 루크레티우스가 쓴 이 책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서 매우 부분적이고 단편적으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더하여 쾌락주의자라는 과히 아름답지 못한 이름으로 덧칠되어 왔던 것입니다.

3. 연기(緣起)이므로 공(空)이니라

“제법(諸法)이 무아(無我)라면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이 세계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삼법인(三法印)이 설해지면 이와 같은 질문이 나오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에 대한 붇다의 대답이 연기설(緣起說)입니다.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남으로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은 저것을 존재하게 하는 근거이며, 발생 원인이 됩니다. 연기설은 일단 인과율(因果律)입니다. 모든 존재는 어떤 원인의 결과로 존재합니다. 이른바 사(事)의 세계, 즉 사물(事物)이 있고, 사건(事件)이 발생하는 이 세계는 인과율이 지배하는 세계입니다. 불교는 이 인과관계를 업(業)으로 설명하지요.

세계는 존재가 지은 업의 과(果)로 존재합니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어린 동자승이 뱀과 개구리에게 행한 못된 짓과 그가 성인이 되어 저지른 사건과의 인과관계를 그립니다. 하지만 언뜻 납득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더구나 영화 《벤자민 버튼……》으로 말한다면 일련의 작은 사건들과 데이지의 교통사고 사이에 업감연기(業感緣起)를 들이대기에는 곤란한 점이 많습니다. 전생, 혹은 전생의 전생을 이야기하는 것은 더욱이나 억지스럽구요. 업감연기설은 매우 초보적인 논리입니다. 다만 내가 지은 업과 그 업에 의해 빚어지는 결과와의 필연적인 관계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겠지요.

불교 연기설은 현상론입니다. 연기설에 의한다면 이 세계는 현상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즉 어떤 원인에 의하여 결과가 발생하고 이는 또 다시 원인이 되어 다른 결과를 발생시키고, 이런 인과의 사슬이 무한히 이어지며 이 세계는 존재합니다. 이런 점이 서양 인과율과는 다른 점입니다.

서양의 인과율은 그 인과관계를 추적해 올라가다 보면 필연적으로 어떤 신적 존재, 혹은 신적 본성을 갖는 존재와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의 존재는 앞선 원인에 의해 결과로 존재하며, 앞선 원인은 그보다 더 앞선 원인에 의해 결과로 존재하고, 이렇게 앞선 원인의 원인자를 추구하다 보면 결국 더 이상 다른 원인자를 필요로 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존재하는 최초의 원인자에 이르게 됩니다.

“나는 실체(實體)란 자신 안에 있으며 자신에 의하여 생각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즉 실체는 그것의 개념을 형성하기 위하여 다른 것의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실체란 다른 어떤 것에 의존하지 않으며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즉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니 바로 신(神), 혹은 신적 속성을 갖는 존재입니다. 실체는 최초의 원인자이면서 곧 신입니다. 이는 필연적인 인과법칙을 하나의 선(線) 위에 적용시키면 반드시 그려지게 되어 있는 그림입니다. 서양의 인과율은 단선적이며 분석적입니다.

반면에 불교 연기설은 입체적입니다. 먼저 존재하기 위해서는 인(因)과 연(緣)이 필요합니다. 인이 씨앗이라면 연은 씨앗이 발아하여 자랄 수 있는 환경이며 조건입니다. 솔씨가 떨어졌다고 해서 반드시 낙락장송으로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남산 위의 저 소나무가 되기까지는 적당한 햇살과 바람과 기후조건이 맞아야 하고, 더하여 짐승이나 사람에 의해 꺾여서도 안 됩니다. 이런 모든 조건이 맞을 때 한그루의 커다란 소나무로 자라서 그 푸르름을 드리울 수 있는 것입니다. 소나무 한그루가 존재하기 위해 온 우주가 동시에 작용합니다. 그러기에 연기설은 입체적입니다.

이런 입체적 설명은 신적 속성을 갖는 실체나 최초의 원인자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입체적이라는 의미는 곧 서로가 서로에 대해 인과관계를 맺는 걸 의미합니다. 적당한 바람이 불어주어야 소나무가 잘 자랄 수 있지만, 바람 또한 소나무가 있어주어야 제때에 불 수 있는 것이지요.

소나무 밤나무가 울창하여야 숲이 만들어지고, 숲이 있어야 노루며 고라니가 뛰어 놀고, 짐승들이 풀을 뜯는 곳에 사람이 사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 세계는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존재들이 서로를 존재하게 해 주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만약 연기(緣起)를 본다면 곧 법(法)을 보는 것이요, 법을 본다면 곧 연기를 보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상의(相依)·상자(相資)하는 세계관은 불교교설의 현상론을 이루는 주요한 관념입니다. 불교 연기설은 입체적이며 전체론적입니다.

이 세계는 상의·상자하며 존재하기 때문에 이 세계 밖의 다른 세계나, 혹은 어떤 절대자를 상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현상계는 그 자체로 완전한 세계입니다. 이 세계는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존재의 선택과 결정이 모여 만들어 가는 곳입니다.

나의 선택과 결정이 이 세계를 만듭니다. 나의 선택에는 나 이외의 다른 존재를, 그것이 비록 신이라고 할지라도, 염두에 둘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유신론자의 선택이든 무신론자의 선택이든 구성원 각자의 선택과 결정이 모여 이 세계를 형성합니다.

따라서 나의 선택과 그 선택에 의해 빚어지는 현상 사이에는 필연적인 인과관계가 형성되지만, 내가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나의 자유이며 우연입니다. 운명이라 여기고 이 길을 걸어가든, 저 길로 약간 비껴가든, 그건 당신의, 나의 자유입니다.

다음 회에는 연기설의 철학적 함의를 보다 더 심층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김문갑 / 철학박사, 충남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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