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들은 대부분 ‘아상(我相)’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상구보리(上求菩提), 즉 지혜의 개발에 집중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경향은 일반인의 눈에는 탐탁찮게 보이는 구석이 있습니다. 산중에서 혼자서 깨닫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는 의구심을 일으키는 것이지요. 즉 참여적인 불교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대가 반영된 영화가 임권택 감독의 두 번째 불교영화 <아제아제 바라아제>입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는 임권택 감독이 <만다라>에 이어 만든 불교적 영화입니다. 임감독은 <만다라>에서는 선방 수좌를 주인공으로 해서 ‘상구보리’의 수행세계를 다뤘습니다. 반면에 이번 영화 <아제아제 바라아제>에서는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수행세계에 대해서 말하고자 했습니다.

소승불교와 대승불교, 공평하게 둘 다 다뤘지만 감독의 시선은 사실 대승불교에 더 가깝습니다. 앞의 영화보다 이번 영화에서 그는 훨씬 명백한 결과를 보여주는 편입니다. <만다라>에 나오는 수좌는 기껏 도달한 경지가 모성에 대한 애증을 극복한 정도인데 반해 <아제아제 바라아제>의 청하스님은 ‘아상’을 극복한 상태를 보여주었습니다. 청하스님이라는 캐릭터에는 감독이 지향하는 수행자상이 표현된 것입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에서 보여준 대승적 인물은 꽤 감동적이었습니다. 대승불교의 보살사상에 제대로 부합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자신의 삶을 진흙탕 속으로 마구 내팽개치는 부분이 좋았습니다. 자기 삶에 대한 개인적 욕망을 포기한 모습인데 완성도 높게 표현됐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불교영화를 봐왔지만 가장 형상화가 잘 된 캐릭터였습니다.

대승적 인물 청하스님이 애초부터 대승의 길을 걸은 것은 아닙니다. 원래는 영화에 나오는 다른 스님들처럼 수행에 전념하는 스님이고 싶었습니다. 개인의 깨달음에 치중하던 스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죽고 싶어 하는 남자를 살려준 게 계기가 돼 다른 삶을 살게 됐습니다.

박현우라는 남자 때문에 결국 출문 당하고 남자와 함께 광산촌으로 가서 살림을 차리고 삽니다. 남자가 스님에게 요구한 것은 죽고 싶어 하는 자신을 살려냈으니 자신의 나머지 삶을 책임지라는 것이었습니다. 스님은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그의 삶에 끼어들게 됐지만 그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삶에서 자신 또한 기쁨을 찾았습니다. 자신을 버림으로써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삶에서 스님은 많은 깨달음을 얻었던 것입니다.

청하스님도 사실은 두려웠습니다. 박현우라는 남자의 출현으로 자신의 삶이 실타래처럼 꼬여드는 것에 강한 저항감을 느꼈습니다. 절에서 출문당한 후 남자와 함께 버스를 타고 정처 없이 떠나다가 갑자기 버스에서 뛰어내려 통곡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은 그녀의 저항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그녀의 꿈은 절에서 살면서 부처 되는 길을 가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 길을 착실하게 걸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게 된 것입니다. 이런 순간 그녀는 몹시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박현우와 더불어 살림을 차리고 살면서 또 다른 자아에 눈을 뜨게 됐습니다. 자신을 향해있던 자아에서 타인을 바라보는 자아로. 자신의 욕구를 점점 잃어간 자리에 타인의 행복이나 욕구가 자리하게 된 것입니다. 대승불교의 지향점입니다. 자신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는 것.

첫 번째 남편인 박현우가 막장에서 목숨을 잃은 후 그녀는 이번에는 다리를 잃은 남자의 아내로 한 세월을 살았습니다. 그녀의 자아가 더욱 아상을 떠났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었습니다. 여자로서의 인생이나 출가자로서의 품위 이런 걸 모두 극복했음을 알게 하는 선택이었습니다.

자신에 대한 욕망을 버린 후 그녀의 외형적 삶은 파란만장했습니다. 다리 없는 남편도 죽고, 비금도라는 어촌마을에서 간호사로 일할 때는 아들 하나를 키우며 외롭게 사는 운전기사에게 연민을 느껴 그와 살림을 차리기도 합니다.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기준이 자신의 욕구가 아니고, 자신의 쓰임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를 필요로 하는 곳에 기꺼이 몸을 던지는 삶이었습니다. 중생의 요구에 귀 기울이는 관세음보살의 삶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청하스님은 자신을 바닥에 떨어뜨리면서 아상을 극복해 갔고, 마침내 보살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반면에 화두에 매달려 살았던 진성스님은 여전히 방황의 한가운데 있는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만다라>에서도 선방 수좌들은 방황을 했습니다. ‘부처가 된 후 더 큰 허무를 어떻게 견딜까’를 읊조리던 스님은 <아제아제 바라아제>에 와서는 ‘왜 부처는 태어나서 우리를 이렇게 괴롭히는가’라고 합니다. 결국 부처가 되는 일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거고, 부처 되는 길에 매달리는 사람들은 결국 시지프스처럼 허무의 극한을 맛보게 된다는 의미가 깔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처가 되기 위해 화두에 매달리는 행위 자체가 가당찮은 일이라는 뜻인 게지요.

진성스님은 청하스님과 대비점에 있는 스님입니다. 은사스님이 준 화두 '달마스님의 얼굴에는 왜 수염이 없을까'와 같은 화두에 매달려 끙끙 앓으면서 계에 매달려 사는 스님입니다. 그야말로 수행을 위한 수행을 하는 스님입니다.


청하스님과 뱃머리에서 마주쳤을 때 진성스님은 선방에서 오래 수행을 하다가 풀리지 않은 화두에 절망한 후 만행을 떠났다가 다시 토굴로 돌아가던 참이었습니다. 여전히 그의 삶은 그 어떤 결과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졌습니다.

반면에 이 남자 저 남자와 살림을 차리고 살다가 지금은 비금도에서 간호사 생활을 하고 있다는 청하스님은 한결 여유가 있어 보였습니다. 한 사람은 자신이라는 아상에 더 똘똘 뭉친 인상이고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을 점점 비워낸 모습이었습니다. 영화가 확실히 '하화중생'의 길을 지향하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이 장면만으로 두 사람의 게임은 이미 오버됐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청하스님의 완승이었습니다. 청하스님은 임권택 감독의 두 편의 불교영화에서 가장 명료하고 밝은 인물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인물들이 허망한 것에 매달려 삶을 소비하는 인상을 주는 데 반해 청하스님은 훨씬 생산적인 삶으로 묘사됐습니다. 이런 묘사가 나오는 것은, 감독은 불교의 나갈 바를 대중과 함께하는 참여적인 불교를 기대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게 일반 대중이 불교에 기대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아제아제 바라아제>는 잘 만든 영화입니다. 대승불교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담겨있고, 강수연이라는 월드스타의 연기도 뛰어났고, 그림도 좋았습니다. 그렇지만 아쉬움은 있습니다. 수행을 위한 수행을 하는 스님들이 과연 청하스님의 아버지처럼 기침이나 콜록거리면서 자기 회한에 빠진 인물이거나 진성스님처럼 아상으로 똘똘 뭉친 스님일까, 하는 회의감.

신라시대 노힐부득스님이 불쌍한 연인을 도와주면서 깨달음을 얻었는데, 여인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성불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랜 세월 수행을 해왔기에 이미 아상이 거의 극복된 상태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깨달음을 포기하면서까지 여인을 도와주었던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나를 향한 집요한 집착을 극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경지에 도달하는 방법은 앞의 청하스님처럼 '하화중생'의 길도 가능하지만 '상구보리'를 통해서도 충분히 가능한 것이고, 진정한 불교영화라면 '상구보리'를 통한 자아상을 극복한 케이스를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영화를 기다리며.

-김은주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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