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운명, 그 피할 수 없는 삶의 굴레

서해 훼리호 침몰,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 지하철 화재 등등 참 많은 사건 사고가 있었습니다. 일본 동북부 지방에서 발생한 강진과 쓰나미로 인한 후쿠시마 원전의 폭발사고, 중국 쓰촨성 대지진 등등… 항공기 사고 기록 기구(ACRO)의 통계에 의하면 매년 수백 명이상의 사람들이 항공기 사고로 목숨을 잃습니다.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는 2000년에만 179건의 사고에 1,567이 숨졌습니다. 바다에서도 마찬가지이지요. 타이타닉호 침몰사고에선 1,517명이 배와 함께 가라앉고 705명만이 살아남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엄청난 재난 앞에서 살아남은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도대체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살아남는 걸까요?

“운명 아닌 게 없다.”

▲ 존경받던 테베의 왕 오이디푸스는 하루아침에 손가락질과 경멸의 대상이 되어 테베를 떠난다. 장님이 된 오이디푸스를 그의 딸이자 여동생인 안티고네가 인도하고 있다. ― Charles Francois Jalabeat, 〈테베를 떠나는 오이디푸스를 이끄는 안티고네〉

테베의 왕자로 태어난 오이디푸스에게는 저주스런 신탁이 내려집니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리라는 것이지요. 오이디푸스는 산속에 버려지지만, 한 목부(牧夫)에게 구해져 코린토스왕의 아들로 성장합니다.

성인이 된 오이디푸스는 우연히 테베의 삼거리에서 어떤 노인을 죽이고,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 테베의 왕이 됩니다. 당연히 왕비 이오카스테와 결혼하고 둘 사이에 아들 둘, 딸 둘을 둡니다. 그렇게 행복했던 시간이 지나고 테베엔 역병이 창궐합니다.

재난을 막기 위한 수순이 하나씩하나씩 행해지며 오이디푸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가혹한 운명을 알게 됩니다. 그리하여 아이들의 어머니이자 자신의 아내이며 동시에 생모인 왕비 이오카스테는 자결하고, 그녀의 시신 앞에서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자신의 눈을 찌르며 먼 방랑길을 떠납니다.

“어쨌든 내게 속한 운명이라면, 그것이 어디로 향하든 내버려 두시오.”

옛날 그리스 사람들 대부분은 운명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삶은 이미 정해진 길이 있고 그 길은 어느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다고 생각했지요. 운명은 신이 정해준 것이기에 필멸의 존재인 인간은 어찌할 수 없습니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이러한 그리스사람들의 운명관이 투영되어 우리 삶의 비장함을 더합니다. 이 작품에서 오이디푸스의 선택과 행위 하나하나는 일련의 사슬처럼 엮이며 운명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음이 드러납니다. 만약 오이디푸스가 자신에게 내려진 신탁을 몰랐다면 어땠을까요? 아내이자 어머니인 이오카스테는 더 이상 알려고 하지 말라고 간청하지만 오이디푸스는 비극적 종말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갑니다. 그 또한 운명이기에..... 운명은 어떠한 가정도 허용되지 않는 것입니다.

2. 필연, 인간은 어찌할 수 없는 신의 또 다른 이름

아침이면 산이와 맥이 두 풍산개와 함께 뒷산에 오릅니다. 노란 꽃, 하얀 꽃, 보라 꽃… 온갖 꽃들이 예쁘게 피어 있습니다.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소월의 노래마냥 산에는 정말 봄여름 가리지 않고 꽃이 핍니다. 그리고 새소리! 작은 새 어디에서 저토록 아름다운 소리가 나오는지… 근데 소월은 아침에는 산에 오르지 않았나 봅니다. 그랬다면 틀림없이 햇살을 노래했을 텐데요. 쭉 뻗은 낙엽송, 키 큰 소나무, 물푸레나무… 그들 사이로 아침 햇살이 스며듭니다. 햇살에 반짝이는 키 작은 도토리나무. 이 순간 숲은 황홀해집니다.

이처럼 꽃 피고 새가 우는 일들이 벌어지는 곳이 세간(世間)입니다. ‘세(世)’는 시간을 ‘간(間)’은 공간을 의미하니, 세간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사물과 사건이 생겼다 사라지는 곳입니다. 이렇게 사물과 사건들이 생멸하는 일을 현상(現象)이라 하므로 세간(世間)은 곧 현상계(現象界)입니다. 꽃도, 새들도, 숲 속 나무들도, 그리고 우리 인간들도 모두 생겼다 사라집니다. 다만 누구는 천수를 다하고 누구는 비명횡사합니다. 누구는 행복했지만 누구는 고통 속에 야위어 갑니다. 어째서 그런 걸까요? 이런 천수와 요절, 행복과 불행은 이미 정해져 있는 걸까요? 그래서 사람들은 묻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무엇이 이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걸까?”

틈이 벌어진 암벽 사이에 핀 꽃
그 암벽에서 널 뽑아들었다.
여기 뿌리까지 널 내 손에 들고 있다.
작은 꽃 ― 하지만 내가 너의 본질을
뿌리까지 송두리째 이해할 수 있다면
하느님과 인간이 무언지 알 수 있으련만.

시인은 바위틈에 핀 작은 꽃을 뽑아 들고 뿌리까지 샅샅이 살핍니다. 그리하여 꽃의 본질을 알게 되면 신의 본질까지 알 수 있으리라고 기대합니다. 참 생뚱맞습니다. 꽃 피고 지는 일이야 일상사인데 왜 신이 개입하는지요?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일리가 있습니다. 노자(老子)처럼 “천하만물은 모두 유(有)에서 나오고 유(有)는 무(無)에서 나온다.”라고 하면 아무 것도 없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노자류의 설명이야말로 생뚱맞고 황당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 어떤 것도 신들의 뜻에 의해 무(無)로부터 생겨나진 않았다”는 루크레티우스와도 같은 생각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현상계와 신은 어떻게 관계되나요?

먼저 무한한 권능을 가진 신이 있어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겁니다. 기독교의 하느님이 대표적입니다. 그야말로 완벽한 창조입니다. 또 다른 경우는 미리 준비 된 질료를 이용하여 사물 내지 형상을 지닌 존재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 또한 창조적 행위이지만,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 내는 게 아니라 유(有)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 같은 신이 이 경우에 해당합니다. 데미우르고스는 무질서한 질료에 이데아를 바탕으로 혼을 불어 넣음으로써 이 세계를 영혼이 살아 숨 쉬는 이성적 공간으로 만듭니다. 카오스(무질서)로부터 코스모스(질서)를 만드는 창조신이지요. 마지막으로

▲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 1632~1677]는 많은 후원금도 철학교수직도 사양하고, 적은 돈으로 렌즈를 깎으며 평생을 경건하게 살았다. 렌즈 깎을 때 생기는 유리가루가 원인인 폐질환으로 44세에 세상을 떴다.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 1632~1677]는 많은 후원금도 철학교수직도 사양하고, 적은 돈으로 렌즈를 깎으며 평생을 경건하게 살았다. 렌즈 깎을 때 생기는 유리가루가 원인인 폐질환으로 44세에 세상을 떴다.
자연법칙이 신의 섭리로 이해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스토아학파의 로고스(logos), 동양의 주역(周易)에 나타나는 도(道)나 리(理)와 같은 개념은 이런 신적 특성을 띠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 안에 있으며, 신 없이는 아무 것도 존재할 수도 또 파악될 수도 없다.”

“변화의 도(道)를 아는 자는 신(神)이 하는 바를 아는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 생겼다 사라지는 모든 현상에 신, 혹은 신적 속성이 내재해 있거나 작용하고 있다는 생각이지요. 이런 생각은 동서양에 보편적인 사유전통이었습니다. 이런 법칙성이 신적 속성으로 이해된다면 그 속성은 필연성을 띠게 됩니다.

“사물의 본성에는 어떤 것도 우연적으로 주어진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은 일정한 방식으로 존재하고 작용하게끔 신적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

사물이 존재하고 변화해 가는 모든 과정은 신의 속성으로, 필연의 법칙으로 이해됩니다. 그 어떤 것도 우연히 존재할 수 없습니다. 꽃이 피고 새가 우는 현상에서, 우리들이 살아가며 부딪히는 모든 사건에 이르기까지 신의 주재 아닌 게 없습니다. 섭리이고 필연이기에 인간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게 운명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정말로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라면 어떻게 되나요? 오이디푸스가 한 모든 일들이 운명적으로 정해진 게 아니라, 그저 우연히 벌어진 일들이라면 꼭 스스로 눈을 파내고 고통의 방랑길을 떠나야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요? 설혹 우연이라고 하더라도 생모와 동침해서 아이까지 낳은 행위는 반드시 징벌이 따라야 하는 법이라면, 그런 법은 누가 만들었나요? 이런 의문에 대해 부처님은 어떻게 대답하실까요? 다음 회에 살펴보겠습니다. 

-김문갑 / 철학박사, 충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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