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딸과 내 관계는, 변심한 애인과 그 애인에게 집착하는 연인의 관계와 다르지가 않습니다. 물론 딸은 변심한 역할이고, 엄마인 난 버려진 쪽입니다. 엄마를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좋은 사람으로 여겼던 마음에 성난 파도가 지나갔는지 딸은 갑자기 변심한 애인처럼 냉정해졌습니다. 살갑게 굴던 착한 딸은 멀리 떠나고 쌀쌀맞고 삐딱한 딸이 어디서 툭 떨어졌습니다. 더 참을 수 없는 건 엄마는 안중에도 없고 친구만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딸에게 철저하게 배신당한 것입니다.

상황을 받아들이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버림받았구나, 하고 딸의 변화를 깨끗하게 수용하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난 그렇게 못하고 있습니다. 변심한 애인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지는 여자처럼 구질구질하게 군다는 것입니다. 딸의 변심에 분노하고, 괘심해하고, 그러면서 상처받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 내가 건너고 있는 사막의 한 단면입니다. 사춘기 자녀를 둔 엄마의 분노와 상실감이지요.

<바그다드 카페>를 보기 전에도 어김없이 딸과 전쟁을 치른 후라 기분은 엉망이었습니다. 사실 <바그다드 카페>를 생각해낸 것도 이런 지치고 가라앉은 기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습니다. <바그다드 카페>는 몇 번씩 반복해서 보는 영화 중 하나입니다. 에너지가 떨어졌을 충전용으로 이용하는 영화지요.

역시 이 영화 <바그다드 카페>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기분이 한결 가벼워지고 행복해졌습니다. 지난 번 <체리향기>에서 죽으려다가 체리를 맛본 후 기분이 좋아져서 삶을 선택한 노인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 노인의 경우처럼 <바그다드 카페>를 본 후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딸에 대한 집착과 분노로 뭉쳐져 있던 마음이 따뜻하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누군가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으로 변했습니다. 마음이 이렇게 쉽게 바뀐 걸 보면 <바그다드 카페>는 꽤 힘이 센 영화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바뀌니까 참 행복하고 좋았습니다.

딸 때문에 괴롭다고 했는데, 딸이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딸에 대한 나의 소유욕이 원인이었고, 그 근원을 캐보면 ‘나’라는 아상이 버티고 있습니다. 내 것이 있기 위해서는 나라는 존재가 있어야 하는데, 결국 내 고통의 근원은 ‘나’에 대한 집요한 몰입이었습니다. 나에게 집중할수록 불행해지는 원리였던 것입니다. 영화는 바로 그 점을 지적해주었습니다.

독일 출신의 감독 퍼시 애들런의 <바그다드 카페>(1987)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은 이런 평번한 듯 비범한 진리입니다. 관심을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로 돌리고 행복해지라는 것입니다. 1987년에 나온 꽤 오래된 영화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영화입니다. 인생 최고의 영화라고 칭하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작품성이 탁월한 영화입니다.

특히 영화에서 좋았던 것은 오프닝입니다. 워낙 유명한 음악이라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콜링 유 calling you>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검은 정장을 입은 뚱뚱한 주인공이 커다란 가방을 끌며 모래바람 일어나는 사막을 걷는 장면이 나옵니다. 땀을 흘리면서 뜨거운 태양 아래를 걷는 야스민의 모습은 많은 걸 설명하고 있습니다.

야스민의 삶이 꽤 불편하다는 걸 보여줍니다. 뜨겁게 달궈진 모래사막을 걷는 자체만으로도 힘든데 야스민은 두꺼운 정장에 구두를 신었고, 또 뚱뚱하기까지 합니다. 거기다 어디로 갈 지도 막연합니다. 남편과 싸웠고, 남편은 매정하게 그녀를 사막 한가운데 버리고 떠났습니다. 그러니까 그녀는 방금 전에 남편한테서 버림받은 것입니다.

사막이라는 공간 자체는, 고난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야스민은 사막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인생에서 어쩌면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딸에게 버림받은 처지라 야스민의 처지에 공감이 가서 눈물 한 방울 찍어냈습니다. 아마도 나도 야스민처럼 지금 사막을 건너고 있는 모양입니다.

이 영화의 묘미는, 사막을 수월하게 건너는 방법을 가르쳐준다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일화가 있습니다. 배가 고픈 사람들에게 정말 긴 숟가락을 주었더니 천국 사람들은 상대방에게 먹여주면서 배고픔을 달래는데, 지옥 사람들은 서로 자기 입에 밥숟가락을 넣으려다가 결국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는 내용입니다. <바그다드 카페>의 주인공 야스민이 가르쳐준 방법은, 위 일화처럼 자신에게 집중돼 있던 마음을 타인에게로 돌리라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집중할수록 더 큰 함정에 빠지고 다른 이의 슬픔에 관심을 가질수록 사막을 쉽게 건널 수 있다고 일러주었습니다.

사막을 한참 헤매던 야스민은 자신 보다 더 힘든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남편을 쫓아낼 수밖에 없었던 브렌다의 처지는 야스민보다 더했습니다. 언제나 빈둥거리면서 술에 집착하는 남편은 가정에 조금도 도움이 안됐습니다. 커피점에서 커피기계가 고장난지 오래지만 술 마시는데 정신이 팔려 기계 같은 건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런 남편 때문에 브렌다는 언제나 화가 나있고, 악을 쓰면서 살아가는 사막처럼 삭막한 여인이 돼버렸습니다.

자식들도 무능한 남편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딸은 놀 궁리만 하는 바람 잔뜩 들어간 날라리고, 아들은 어디선가 아이 하나를 낳아서 데리고 들어와서는 오직 피아노 앞에만 앉아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브렌다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브렌다에겐 오직 끝없는 노동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야스민이 브렌다를 만났을 때도 브렌다는 울고 있었습니다. 그런 브렌다를 보면서 야스민은 깊은 자비심을 가졌습니다. 자기 처지도 만만찮지만 브렌다의의 아픔에 공감하면서 자신의 아픔은 잊어버린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저 여인을 도와 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저 여자를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이 되면서 오히려 자기 문제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자신도 괴롭지만 더 불행한 사람을 보자 자기 슬픔을 잊어버리게 되고 오히려 다른 사람의 슬픔에 더불어 아파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지가 관세음보살님의 동체대비(同體大悲)가 아닐까요? 타인의 고통에 가슴 아파하고 타인을 도와주고 싶어 하는 경지에서 그녀는 남편에게 버림 받은 뚱뚱한 중년 여자에서 관세음보살의 경지로 승화하게 된 것입니다.

모텔을 겸하는 바그다드 카페에서 장기 투숙하는 화가 콕스가 그린 그림 속에서 야스민은 성녀로 묘사됩니다. 머리 둘레에 빛을 발하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콕스의 눈에 야스민은 성녀였습니다. 바그다드카페에 머무는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안겨주는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습니다.

사막 한가운데 있는 바그다드카페는 인생 패잔병들의 집합소입니다. 문제 많은 브렌다 가족 말고도 장기 투숙자들과 종업원이 있습니다. 늙은 화가 콕스는 헐리우드에서 입간판을 그리다가 일자리를 잃고 이곳으로 흘러 들어왔고, 데비라는 여자는 트럭 운전사들에게 문신을 그려주며 생활하는 여자인데 화목하고 밝은 걸 못 참아 할 정도로 칙칙한 캐릭터입니다. 거기다 도대체 왜 거기 존재하는지 모를 정도로 무능한 인디언 종업원이 있습니다.

누구 하나 정상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들 사막을 건너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야스민도 그들처럼 사막을 건너는 그냥 그런 아줌마일 수 있었는데 그녀는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그들을 구제하는 쪽으로요. 그게 가능했던 것은 야스민이 자기를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뚱뚱한 아줌마 야스민을 버리자 무한한 능력이 생겨났습니다.

브렌다에 대한 연민에서 시작된 야스민의 친절은 결국 이들 모두를 구제했습니다. 화가 콕스에게는 모델이 돼 줌으로써 화가로서의 자신감을 회복하게 해주고, 피아노만 치는 아들의 음악을 이해하는 유일한 관객이 되고, 놀기만 좋아하는 딸과도 친구가 돼줌으로써 날라리 딸이 가정에 마음을 붙이게 하고, 그리고 삭막한 브렌다의 마음엔 아름다운 꽃을 피웁니다. 흉물스럽던 바그다드카페는 결국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웃고 즐기는 사막의 오아시스로 탈바꿈 됐습니다. 이 모든 게 가능했던 것은 야스민이 자신을 버리고 타인의 아픔에 공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삶은 고통이라고 하셨고, 12연기를 통하여 삶이 고통일수밖에 없는 이유를 조목조목 짚어주셨습니다. 사람들이 괴롭게 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집착이었고, 그렇게 집착하는 또 다른 이유는 어둡기 때문이었습니다. 지혜가 없기 때문이었지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딸에게 집착하는 내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야스민은 인간이 빠질 수 있는 이런 연쇄 고리를 과감히 끊어버렸습니다. 야스민은 고통 대신 행복해지는 길을 택했는데 그 방법은 자신에 대한 집착을 끊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버리자 무한한 지혜가 생겼고, 행복이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뻔히 알고 있는 사실이긴 하지만 영화에서 다시 확인하니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느낌이었습니다.

<바그다드 카페>는 훌륭한 영화였습니다. 불교의 이러한 이론을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쉬운 언어로 효과적으로 전달했습니다. 그러면서 영화 본연의 목적인 재미도 잃지 않았습니다. 적당히 흥미로운 전개와 곳곳에 뿌려진 유머는 영화의 맛을 더해주었습니다. 또한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힘이 센 영화였습니다. 지금 사막을 건너고 있는 사람에게 적극 권장합니다.

 - 김은주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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