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의 본향이라 할 불교가 2,000년도 이후 갑자기 팽창한 소위 제 3수행법과 유관 단체들의 약진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단체는 처음부터 종교라기보다는 심신요법으로서의 수행법을 상품으로 들고 나왔다. 그러나 불교는 세속과 일정한 거리를 둔 종교라는 점에서 불교수행의 상품화 문제를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수행법의 상품화와 불교의 기원
불교는 인도의 사문전통에 속한 종교이다. 부처님 당대의 사문전통의 흥기에는 정치경제적 원인이 있다. 부처님 재세 전에 아리안족들은 발전된 철기문화를 통하여 인도 북중부 지역을 개간하여 많은 잉여생산물이 발생되었다. 이런 상황은 상업의 발전과 부의 편중, 그리고 정복전쟁을 가져옴으로써,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간의 확고한 구별을 가져 왔다.
당시의 이러한 사회를 지배한 이데올로기가 바라문 사상이다. 그들은 베다의 가치를 진리로 강변하며, 특히 업사상을 통해 불평등한 사회체제를 공고히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에 대한 반작용이 사문전통이다. 사문의 일파인 소위 육사외도들은 베다의 가치를 부정하며 특히 그 중 일부는 무인론(無因論)등을 주장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당대 사회를 고착시키는 업사상에 대한 반발이었을 것이다. 사문전통의 대표격인 자이나교의 불살생 원리는 모든 것에 생명이 있다는 고대 부족사회의 물활론적 사고에 기반한 것이다. 이는 당대 적자생존의 사회체제에 대한 반발로서 고대 부족사회의 공동체적 전통으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불교는 이런 사회상황에서 바라문전통과 사문전통의 장점들을 취합한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는 당대 사회상황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사문 전통이 가진 공동체적 윤리의 필요성을 당대 사회에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전 사문들과는 다르게 당대 사회의 가치를 완전히 부정하지 않았으며 과거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것도 아니었다. 불교의 대사회적 입장은 인간 내면의 고통의 원인에 대한 이해와 극복, 즉 인간 각 자의 내면적 변화를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려 한 것이다.

현대의 사회 상황과 불교의 사회적 의무
현대 사회의 상황은 부처님 재세시와 비슷한 바가 있다. 세계 경제의 중심인 미국은 과도한 물욕의 추구로 인하여 노동의 가치보다는 부동산이나 주식투자의 이익 같은 노동 없는 장부상의 가치만 중시하였다. 이 결과로 과도한 부동산 투자의 거품이 꺼지면서 은행의 연쇄 부도와 이로 인한 세계 경제의 연속적 부도의 위기를 불러 왔다. 이런 물신 숭배적 미국의 가치를 반대하는 자들 중 일부는 극단적으로 변질하여 세계 곳곳에는 테러리즘이 횡행하고 있다. 우리 사회 역시 미국을 본 따 실용이라는 허울 좋은 가치 아래 물욕을 끝없이 부추김으로써 적자생존의 정글로 변하고 있다. 참으로 철학 없는 경박한 사회요 정부라 아니할 수 없다. 요즘 불교계의 정부에 대한 반발은 단지 불교계에 대한 푸대접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불교의 근본정신인 자비가 사라진 사회에 대한 불교인의 당연한 의무라고 할 수 있다. 단지 누구의 사과를 받고 파면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이다.
사회에 대한 불교의 근본적 의무, 즉 인간 삶의 진정한 가치를 제시한다는 점을 망각한 채 단지 수행만을 상품화한다는 한다는 것은 비판해야할 물신 숭배적 사회체제에 오히려 굴복하는 일이 될 것이다. 물욕이 판을 치는 세상일수록 불교는 사회의 목탁 역할을 해내고 무집착과 자비의 가치를 제시해야 한다. 승단 자체가 이에 대한 모범을 보여야 한다. 이것은 물욕이 판치는 세상의 이치와 반대로 가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오히려 그래서 물욕에 지친 사람들의 휴식처를 제공하여 더욱 불교계의 외연을 키울 수 있는 전략이 될 것이다. 불교 수행의 상품화는 결코 불교의 현대화가 아니다.

불교는 어떻게 일반대중에게 어필할 것인가
우리나라 전통불교의 수행법인 화두선은 일반인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이 수행법은 전문 수행자들의 영역에 남겨두더라도 일반 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기도나 절수행, 혹은 위빠사나와 같은 수행법들을 각 사찰의 특징에 맞게 계발하여 포교에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행법이 아니라 자비와 진리라는 불교의 근본정신에 있음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수행법을 상품화하여 소비자의 구미를 당기게 하기 보다는 진리와 자비를 실천하고 보여줌으로서 대중들이 불법에 귀의하게 해야 한다.
제 3수행법들이라고 불리는 행법들의 체계는 짧은 시간 내에 의식 변화와 신비체험을 일으키는 탁월함이 있다. 이런 행법들은 불교 내에서 다 찾아볼 수 있는데 제 3수행법들이 탁월한 효과를 가지는 것은 이런 행법들을 단기간이나마 체계적이고 집중적으로 훈련시키는데 있다. 불교의 근본정신인 진리와 자비를 부각시키면서 집중적이고 체계적인 수련기회를 제공한다면 제 3수행법들 이상의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종단에서 이런 수행법의 체계를 일괄적으로 규격화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스님이든 재가법사이든 일선의 수행지도자들에게 맡기고 불교 정신을 벗어난 경우에만 엄격한 제재를 가하면 된다. 대신 종단은 그런 행법을 체계화할 수 있는 자료들을 만들어 내는데 주력하면 된다. 이를 위해서 학자들과 일선의 수행지도자들을 지원하는 방법을 적극 강구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승단의 구성원 각 자가 지계와 자비로서 물욕에 찌든 우리 사회의 귀감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고 핵심적이다.
개신교의 많은 대형교회를 보라. 그들이 예수님의 진정한 사랑을 보여주지 못하고 단순히 자본주의 체제에 편승한 기발한 발전 전략으로 물량적으로만 거대해진 것이라면 이런 교회들은 아무리 외형이 크더라도 하등 걱정할 필요가 없다. 진리는 영원하지만 진리가 아닌 것은 곧 사라진다. 오히려 우리가 부끄러워하고 본받아야 할 것은 사회의 소외된 자들과 어우러져 진리의 삶을 살아가는 시골 예배당의 이름 없는 목사님들이다. 그리고 이것은 불교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수행문화시장에서 불교 살아남기
수행은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오해로 큰코다친 대표적 인물이 마조스님이다. 외형적 형태의 수행에 집착한 마조스님이 기왓장을 갈아 거울을 만들겠다는 스승의 일침으로 각성한 내용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다. 좌선으로 삼매의 경지만을 추구하는 것이 수행의 전부가 아니다. 그것은 중요하지만 많은 불교 수행들 중의 하나의 방편일 뿐이다. 당면한 내 현실이 가장 중요한 수행의 장이다. 진실을 직시하고 위선을 넘어설 수 있는 자세와 힘을 기르고 더불어 그 지혜를 나누며 서로 보듬는 것, 그것이 수행이다. 그런 것이 수행이라는 사실을 가르치는 것이 제 3수행법을 가르치는 기업과는 다른, 불교라는 종교의 큰 특징이다. 이런 수행의 본의를 알리는 것이 불교가 수행문화 시장에서 살아남는 가장 핵심적 전략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승가구성원 각자의 지계와 자비를 통해 청정한 승가를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심준보/동국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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