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종려상 받은 태국영화 <엉클분미>

우리가 속한 세계가 모두 환상이라고 하자 많은 사람들은 총알처럼 대답했습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고. 본인은 분명 눈으로 보고 온 몸으로 경험하는 세계를 갖고 환상이라고 하니까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고 잘라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왜 세계를 환상이라고 할까요?

<원각경>에서는 꽤 사실적인 문장으로 세계가 환상인 이유를 조목조목 짚어주고 있습니다. 육체는 물과 흙, 바람과 불로 이뤄졌는데 인연이 다하면 이 네 가지[四大]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체와 더불어 짝을 이루는 마음은 사대가 사라지면서 뿔뿔이 흩어져 없어진다고 했습니다. 보통 고유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이렇게 쉽게 사라질 수 있는 이유는, 마음이 사대를 근거로 해서 생긴 인연상(因緣相)이기 때문입니다. 근거가 사라지니 부수물도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이런 이유로 몸도 마음도 환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실재라고 믿는 사람들에게서 이러한 불교적 세계관은 황당하다는 취급을 받습니다. 그래서 환상의 세계관을 표현한 태국 영화 <엉클 분미>를 황당하게 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왜 이 영화가 황금종려상을 받았는지 모르겠다고 의문을 갖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불교적 세계관은 우리에게는 낯선 것이었습니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엉클분미>는 이야기에 중점을 둔 영화가 아닙니다. 관객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삶을 엿보게 하는 데 목적이 있는 영화가 아닌 것이지요. 이 영화의 목적은,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의 재구성입니다. 인간관계의 허구성을 파헤치면서 본질을 찾으라고 조언해줍니다. 그러니까 감독이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말은, 환상에 집착하는 삶이 아닌 실존에 충실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영화의 주인공인 분미 아저씨는 죽음을 앞둔 사람입니다. 심각한 신장병을 앓고 있어 음식도 가려 먹어야 하고, 수액을 연결하여 몸 안의 수분을 임의적으로 조절해야 합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스스로 자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농장으로 처제를 초대합니다. 마지막 남은 며칠을 가장 가까운 사람과 보내고 싶은 욕망이기도 하고, 그의 농장이나 재산을 처제에게 유산으로 남기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처제가 가장 가까운 사람일 정도로 그는 외로운 사람입니다. 아내는 19년 전에 죽었고, 외아들도 6년 전에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런데 처제는 통이라는 청년과 함께 옵니다. 통이라는 청년은 처제와 어떤 관계인지 영화에서는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들도 아니고, 친척도 아니고 , 그렇다고 연인도 아니고, 그러면서 영화는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의문을 긴장의 한 끈으로 이끌어갑니다. 의도적 의문을 유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설정은 보편적 인간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장치인 것 같습니다.

영화는 인간관계를 통해 불교적 세계관인 환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젠과 통의 관계에서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형식적으로 드러나는 어떤 관계도 아니면서 늘 함께 다니는 그들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었습니다. 사실은 서로에 대해서 잘 모르고, 형식적으로도 연결될만한 고리도 없으면서 늘 함께 다니는 젠과 통의 관계는 그냥 지나가는 인연과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그야말로 익명의 그 누구와 다름없는 관계인 것이지요.

그런데 처제인 젠과 형부인 분미의 관계 또한 별반 다르지가 않습니다. 분미의 재산을 물려받고, 분미의 장례를 주관했던 젠은 분미를 위해 추모책자를 발행해야 하는데,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걱정합니다. 그러자 딸은 그냥 지어내라고 조언합니다. 그러니까 서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면서 가장 가까운 관계라고 믿어왔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라는 것이 영화에서 분미와 젠, 또는 젠과 통의 관계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분미의 전재산을 물려받고, 죽기 전 마지막을 함께한 처제지만 정작 서로는 서로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추모 책자에 들어갈 내용을 그냥 지어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지어낸다는 말에는, 결국 우리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에서 상대방은 실재가 아니라 우리의 뇌가 만들어낸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맺는 관계란 만들어낸 모습과의 관계이므로 결국은 환상 속 인물과의 관계인 것입니다.

중간에 감독은 영화의 줄거리와 완전히 이절적인 장면을 집어넣었습니다. 난데없이 못생긴 공주가 나옵니다. 거기서 공주는 자신을 사랑한다고 하는 가마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넌 나의 환상을 보고 있을 뿐이야. "

공주는 가마꾼에게 공주라는 자신의 신분을 사랑하는 것이고, 반짝이는 귀금속과 자극적인 향수가 만들어내는 환상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꼬집습니다. 그러나 영리한 공주는 가마꾼과 달리 공주라는 신분과 화려한 귀금속이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다는 걸 깨닫습니다. 그래서 공주는 연못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자신이 걸쳤던 귀금속을 다 벗어던지며 물속으로 유유히 걸어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이런 겉치레를 통해 맺는 관계에 혐오감을 느낀 것이지요.

거짓 관계가 아닌 진정한 관계를 지향합니다. 이런 관계의 가능성을 그녀는 메기와의 관계에서 발견합니다. 마침내 공주는 메기와의 짝짓기를 통해 메기로 변해서 연못 속을 유영합니다.

그런데 이 장면이 의미하는 것은, 환상이 만들어낸 관계가 아니라 진정한 관계는 현실에서 불가능하다는 암시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상상력을 동원한다 하여도 인간의 몸이 갑자가 완전변태를 해서 메기가 되거나 원숭이 귀신이 되는 건 불가능한 것이므로 인간으로 존재하는 한 환상 없는 관계는 불가능하다는 암울한 결론인 것입니다.

영화는 관계의 환상에서 한 발 나아가 존재의 환상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존재의 환상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마지막 장면입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처제 젠과 통 그리고, 젠의 딸은 호텔에서 텔레비전을 봅니다. 그러다가 통이 야식을 먹고 싶다고 해서 밖으로 나가려다가 통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합니다. 자신들은 분명히 나가고 있었는데 여전히 텔레비전 앞에 앉아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도사의 복제술처럼 여러 명의 본인이 나타나는 모습이었습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감독은 두 장면을 교차시켜서 보여줍니다. 음식점에서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며 음악을 듣고 있는 통과 젠의 모습과 또 호텔방 침대 위에 나란히 앉아 텔레비전에 시선을 두고 있는 통과 젠, 그리고 젠의 딸. 그러니까 젠 일행은 호텔에도 있고, 음식점에도 동시에 있는 것입니다.

이 장면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자아의 분열일까요? 감독은 이 장면을 통해 불교적 세계관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세계에 대해 의심하고 있습니다. 마주보고 있는 상대가 정말로 존재하는 사람인가, 지금 머물고 있는 현재가 정말로 존재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환상 속 인물과 더불어 꿈속을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영화는 표현했습니다.

환상 속을 부유하다가 분미는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젠이 누군지도 모르는 청년과 텔레비전을 보는지 밥을 먹는지도 모른 채 환상 속을 부유하고 있는데, 그 어느 날이 되면 분미처럼 죽을 것입니다. 삶이란 결국 환상놀음에 지나지 않고, 환상이 아닌 유일한 것은 죽음이라는 것이지요. 죽음에 이르러서야 사람들은 조금 정신을 차립니다. 그래서 분미 아저씨는 젠에게 지옥 같은 도시가 아닌 자신의 농장에서 살라고 진심어린 조언을 해줍니다.

분미 아저씨는 분명 도시의 삶을 지옥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영화는 도시와 농장을 극명하게 대비시켜 보여주는데, 도시의 삶은 다른 생명체는 보이지 않고, 오직 인간만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환경에서 인간은 텔레비전 앞에 갇혀있습니다. 환상 속에서 또 다른 환상에 빠져있는 것이지요.

반면에 분미의 농장엔 풀벌레 소리가 시끄럽고 나무들이 무성하며 살아있는 것들뿐입니다. 또한 그곳엔 라오스 인도 있고, 분미의 죽은 아내와 사라졌던 아들이 각각 귀신이 되어 나타나는 등 온갖 종류의 존재가 혼재해서 살아가고 있는 장소입니다.

그러니까 분미의 말은 다양한 존재와 더불어 살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허영이나 관념이 만들어낸 가치관으로 상대방을 판단하지 말고, 생명체로서 상대방을 느끼면서 더불어 실존하는 삶이야말로 환상에 빠지지 않는 삶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영화는 사람과 메기의 짝짓기라든지, 사람과 원숭이 귀신의 짝짓기 등을 시도했던 것입니다. 가치관의 개입 없이 존재와 마주하는 삶, 이것이 바로 환상이 아닌 실존의 삶인 것입니다.

- 김은주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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